마이클 가자니가는 틀렸다. ;창발, 환원주의, 나비효과, 양자역학, 불교

in kr-science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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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가자니가는 환원주의를 한계를 지적하며 창발을 제시했다. 환원주의란 최소단위인 부분으로 전체를 파악할 수 있다는 입장이며 창발이란 부분이 모여서 부분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마이클 가자니가가 즐겨 이용하는 비유를 빌려오겠다.

자동차 부품이 있다. 자동차 부품이 정확히 어떻게 작동하는지 아는 사람은 과연 내일 도로가 정체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까? 마이클 가자니가는 창발을 이렇게 설명한다. 내일 도로의 상태는 기상, 사회, 문화 등 관계된 모든 요소를 파악해야 가능한 것인데 부분에 대한 이해만 가지고 예측할 수 없다는게 마이클 가자니가의 입장이며 창발에 대한 비유이다.

반대로 환원주의는 최소 단위 요소를 가지고 현상을 예측할 수 있다는 입장을 지니고 있다. 자동차 부품에 앞서 그걸 만들어낸 인간이 있고, 인간이 탄생한 지구가 있다. 지구는 빅뱅에 의해 탄생했으며 그것이 우주의 시초라면 모든 조건을 정확하게 되짚어 나갈 수 있다면 인간의 탄생, 인간이 자동차를 만들어내는 순간, 특정 국가, 도시의 형성, 시민들의 성향, 기상상태, 나아가 특정 도로의 교통상태까지 예측의 범주 내에 속한다는 것이다.

환원주의를 크게 좌절시킨건 나비효과와 양자역학이다. 나비효과는 초기값의 미세한 차이가 결과를 크게 변화시키는 현상이다. 내일의 도로상태를 예측하기 위해 최대한 완벽한 모델을 만들어냈다고 하더라도 단 1명의 불면증 환자를 놓친다면 그 혹은 그녀가 졸음운전으로 사고를 내는 것을 놓친다. 결국 전지에 가까운 능력을 지니지 않으면 완벽한 예측이란 불가능하다.

양자역학은 한술 더 떠서 예측 자체를 부정한다. 위치와 속도로 모든걸 예측할 수 있다는 고전역학이 위치와 속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미시세계에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나비효과와 양자역학은 서로를 도우며 환원주의를 크게 깎아내린다. 완벽한 예측이란 불가능한 양자세계가 결국 어떠한 예측에도 나비효과가 작용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낸다. 초기조건의 완벽한 계측이 불가능하기에 나비효과가 작용하여 어떠한 예측도 흐트러진다는 것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내일의 교통조건을 알기 위해서는 빅뱅부터 우주의 역사 전체를 완벽히 되짚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마이클 가자니가는 개개 인간을 예측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사회는 인간들의 모임이 창발한 것이므로 개개에 대한 분석으로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한다. 이에 대한 근거 중 하나로 Greg. J Steven의 Speaker-listener neural coupling을 제시한다. 이는 화자와 청자가 의사소통할 때 청자의 두뇌활동이 화자의 두뇌활동을 모사하여 작동한다는 실험이다. 마이클 가자니가는 이러한 작용이 인간의 집합을 이해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한다고 본다. 개인을 아무리 분석해도 그 개인은 얼마든지 타인에 의해 쉽게 영향 받는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두가지 오류를 품고 있다. 우선,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 하여 시도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진정한 예측이 불가능에 가깝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려는 도전은 무의미하지도, 그르지도 않다. 학자들은 예측이 틀릴 때마다 계속해서 새로운 변수에 대해 인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학자들이 정확한 예측을 이용해 개인의 입신, 영달을 목표로 하는게 아니라 단순히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 그 자체가 목표라면 그 목표에 점차 다가갈 수 있다.

두번째로, Speaker-listener neural coupling에서 작용한 인간의 성질 또한 개인에 내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마이클 가자니가가 이 사실을 모르고 주장을 펼친건 아니다. 그는 초기조건의 완전한 이해가 허상이며 따라서 예측이 불가능하다고 보기에 이런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상술했듯 불가능한 일에 도전한다고 그 도전 자체가 조롱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타인에게 영향을 받는 인간의 성질 자체를 이해할 수 있고 현대 사회의 면면들을 최대한 상세히 파악할 수 있다면 분명 개인이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이야기를 듣고, 어떤 존재로 거듭날지를 예측할 수 있다.

위대한 진보는 허황된 꿈에서 나타난다. 모두가 불가능이라 생각하는 일에 끊임 없이 도전한 끝에 인간은 진보한다.

나는 철저한 무신론자이지만 불교의 사상에 감탄할 때가 많다. 일즉다 다즉일, 연기, 무아와 같은 개념은 상술한 과학적 개념들을 포함하고 있다. 복잡계가 비교적 최근에 탄생한 개념임을 생각하면 더욱 시대를 앞선 위대한 사상이다. 내일의 교통조건에는 만물이 담겨있다. 빅뱅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면 내일의 불면증 환자가 낼 사고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내일의 불면증 환자가 낼 교통사고에는 빅뱅이 담겨있다. 전체는 부분이며 부분은 전체이다. 한술 더 떠 공즉시색 색즉시공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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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불교라고도 할 수 있고요)에서 천년 전에 다 알아낸 사실을 이제야 서양과학이 '검증'이라는 이름으로 따라잡고 있죠. 과학이 발전할 수록 점점 더 (동양)철학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 생기는 거 같아서 신기해요.
전 불교신자는 아닌데, 불교의 가르침은 감탄할 때가 많답니다.

동양철학은 전체를 강조하고 서양철학은 부분에 집중합니다. 불교철학은 그 사이에 해당합니다. 불교철학에서는 중도를 강조하지요. 네팔의 지리적 위치가 영향을 미쳤을까요?

사실 일즉다 다즉일, 공즉시색 색즉시공 등의 모순적인 명제들의 대립에서 나타나는 진리에 대한 개념은 서양에도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부터가 모순을 통해서만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여겼지요.

고타마 싯다르타, 소크라테스는 동시대의 사람이구요. 고타마 싯다르타는 여든살까지 깨달음을 나누며 살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극형으로 삶을 마감한걸 감안하면 시작은 동양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극형으로 삶을 마감한 소크라테스의 정신은 지혜에 대한 숭배로 계승되었지만 고타마 싯다르타의 정신은 퇴색되고 사유화 되었으니 안타깝기 그지 없는 일입니다.

요기서 싯달타를 논하셨군요.
본문만 읽다가 싯달타가 없는데 했습니다.
한국말에도 아직도 모르는 단어가 많습니다.
어려운 말도 많고요.

그러게요. 저도 평생 한국에 살았는데 아직 한국어가 어렵습니다.

흥미롭네요. 개인적으로 환원주의가 극에 달하면 나비효과는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근거는 없습니다 ㅋㅋㅋㅋㅋ), 양자의 경우엔 정말 통제할 방법이 없네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해서 도전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말은 정말 공감이 갑니다. 임상심리학자들이 참 많이 듣는 말이죠. 그렇게 분류하고 진단내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

환원주의자들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복잡계와 창발에 대해 더욱 연구되고 통합이론이 나온 이후에나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환원주의자가 진리에 도달한다면 인간의 모든 미래, 우주의 미래를 상세히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건 좀 두렵기도 합니다.

반대로 우주에 펼쳐진 모든 일을 되짚을 수도 있겠지요. 여기는 좀 흥미가 갑니다.

이런 논리로 탄생한게 라플라스의 악마죠. 기반이론이 양자역학으로 무너진것처럼 이쪽도 양자역학 이후론 그런거 없다는거 같지만요.

리처드 도킨스, 샘 해리스 같이 꿋꿋히 환원주의적 시각을 고수하는 이들도 있지요.

저는 정반합의 가치를 끌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극단에 쏠리는 일은 지양해야겠지요.

양자역학이 물리량을 측정 전까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측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랍니다~ 확률론적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본글의 맥락과 어떻게 보면 더 관련있는것 같기도 하네요 ㅎㅎ

완벽한 예측이란 측면에서 접근했습니다. 그래서 복잡계와 나비효과를 인용했지요.

@kmlee 님 짧은 댓글 남깁니다.
모든 이론의 문제점은 그것을 너무 일반화 시키려는데 있다고 봅니다.
양자역학의 논점도 비슷하다고 보는데요.
특정 한계속에서 인정될 수 있는 법칙을 그 범주를 벗어나는 영역까지
억지로 확대해서 적용시키려다 보니 대상물들의 관계가 달라지게 되고
해석이 불가능해진다고 추측해 볼 수 있겠습니다.
'가자니가'라는 사람과 그 이론에 대해 잘 모르니 성급한 추측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의 관점은 개인을 통한 사회에 대한 인식가능성 보다는
단지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접근한 것 같습니다.
즉 사회심리학적인 측면보다는 개인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 처럼 보입니다.
'거대담론'이 무의미한 논쟁으로 치부되고
'개인의 욕구충족'을 위한 갖가지 논점들이 장악하면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가 갖춰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 공허하고 기만적인 해석들이 난무하게 되었지요.
그런 변화에는 자본주의체제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kmlee 님의 견해는 실천적 의지에 입각한 것이라고 봅니다.
실천이 빠지면 인간에게 남는 것은 없습니다.
'가자니가'의 접근이 어느쪽에서 이루어 졌는지 정리해보시면
좀더 명확해 질 수 있다고 봅니다.
혼란을 더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가자니가는 집단은 개인의 합 이상이라 보았기에 개인에 대한 이해가 집단에 대한 이해로 이어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각각의 개인들을 모조리 이해하면 집단 또한 이해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개인에 대한 이해에는, 타인과의 관계, 관계하는 방법까지도 내포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히려 가자니가의 입장을 개인의 관점으로 보셨다니 굉장히 신선합니다.

소중한 견해를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사회이론 측면에서 보면 kmlee 님의 의견은 시스템에서 접근하신 것이고
가자니가라는 사람은 개인에서 전체를 본 것이지요.
개인에 시스템의 일원이 아니라면 개인을 아무리 분석해도 시스템에 대한
이해를 하기는 힘들지요.
시스템이어야
그들간의 역학관계
영향력의 행사방식
그에 따른 상호작용에 접근하게 되고
엄청난 데이터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생각하시는 대로
개인들에 대한 이해를 통해 전체를 이해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결과를 떠나서 그런 노력이 가치가 있지요.
사회에 대한 상당한 이해가 가능해질테니까요.
가자니가는 어쩌면
과거 극단적인 형태의 경험론에 가까운 거 같네요..

가자니가는 과학자라서 사회이론의 측면에서 생각해본 적은 없네요. 저도 약한 분야이기도 하구요. 색다른 관점을 제시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생소한 분야의 지식을 조금이나마 접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kmlees님 많은 생각이 떠도는데 ㅋㅋㅋ 어느 것 하나 잡아 옮길 수가 없네요ㅎㅎㅎ 아는 게 없어서요^^ 계속 이쪽 글을 읽다 보면 좀 나아질까… 하는 생각이 자리를 틉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