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 없는 변명

in kr-story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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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같이 공을 가지고 놀다가, 아이가 보지 않을 때 공에 접착제를 발라 바닥에 고정시킨다. 아이는 공을 몇차례 밀어보지만 공은 더 이상 굴러가지 않는다. 아이는 아주 서럽게 울음을 터트린다. 그렇게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서는 아이에게 다시 공이 구르는 모습을 보여주저야만 한다. 아이는 울먹거리며 직접 공을 몇번 굴려보고, 공이 다시 정상적으로 구른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울음을 그친다. 그날에 B가 느낀 감정은 이 굴러가지 않는 공을 보고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의 감정과 비슷하다. 당연히, 감정은 그 감정을 유발한 사건의 객관적인 중대함과 꼭 비례하지는 않는다.

B는 그를 만나는 날을 기다려왔다. 그도 B를 만나는 날만을 기다려왔다. B와 그는 몇달 전부터 일주일에도 몇번씩이나 그날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B가 출발하기 직전에도 그는 B와의 약속을 꼼꼼하게 조율했다. B는 그가 그날이 완벽할 수 있도록 얼마나 신경 쓰는지를 느낄 수 있었고, 편안함을 느꼈다. 어느새 긴장감은 해소되고, 기대감도 사라졌다. B는 더 이상 기대할 필요가 없었다. 보통, 내일 해가 뜬다는 사실을 기대하진 않는다.

B가 약속장소에 도착했지만 그는 없었다. 그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 B는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여전히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당연히 일어나야 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B에게 그가 아픈건 아닐까, 오는 길에 사고라도 당한건 아닐까하는 걱정이 찾아왔다. 하지만 순수한 걱정이었다. 그 걱정은, B를 괴롭히진 않았다. 그가 아프든, 사고를 당했든 B가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한나절을 기다리고 돌아가서 마침내 그와 연락이 닿았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변명을 했다. 그는 약속시간 전에 낮잠을 잤는데, 어린 아이를 안고 있다가 갑자기 팔에 힘이 풀리면서 아이를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깨어났다가, 다시 잠들었다고 한다. 중간에 깼지만 B에게 전화를 하진 않았다. B는 혼란스러웠다. 몇달을 기다린 약속이었다. 그 약속을 단순히 졸려서 깨트린 것도 이해하기 어렵고, 걱정할 것이 뻔한 자신에게 전화를 하지 않은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잔다고 못 나왔다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는 이유도, 꿈 이야기를 하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B에게는 다양한 감정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가 겪은 일이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갑자기 졸음이 쏟아져서 기절하듯 잠들었으며, 꿈을 꾸고 화들짝 놀라서 깨어났지만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B에게 연락하기 위해 전화기를 향해 기어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났을 때 몸에는 아무 이상도 없었다. 고작 낮잠을 잔다고 약속을 깨뜨렸다고 하면 B가 화낼 것이 분명했지만, 그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B가 이해하길 바라며 그는 최대한 상세하게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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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가 그 한나절 동안 썼을 마음을 생각하니 그가 참 얄밉습니다. 그나저나 대문이 새로이 업데이트 되었군요. 한 층 귀여워지셨습니다ㅎㅎㅎㅎ

예전에 쓰던 대문을 꺼냈습니다. 앞으로 이런 이야기들에는 이 대문을 이용하려구요.

엇 저게 예전 대문이었군요...

네. 오래 전에 쓰던거라서 처음 보시나봐요.

저도 2월에 가입한 뉴비에 불과했습니다ㅠ

저런 상황에서 최대한 상세하게 하는 이야기를 듣고 이해를 해 주는, B는 반 천사 같습니다.

그도 B도 서로 이해하겠죠
약속이야 다시 잡으면 되니까~^^

글쎄요.

화들짝 놀라서 깨어났지만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전화기를 향해 기어가거나 정신을 잃었고, 깨어보니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아이를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깨어났다 다시 잠들었고 중간에 깼을 때 전화를 하지 않았다

는 큰 차이가 있는 서술인 것 같습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B가 자신이 보유한 의학적인 지식들을 짚어보며 걱정할 일이고, 후자는 화낼 수도 있는 상황이 아닌가요?

저라면 후자의 서술을 들어도 쌔하고 지식을 총동원하기 시작할 것 같습니다. 전자의 서술과 그 이상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질문 공세를 시작할 거구요. 물론 정신적인 문제도 인간 손절 요인이긴 하지만요.

그는 B가 걱정하길 원하지 않았으니 최대한 별일 아니라는듯 이야기했죠. 저도 묘사가 부족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지적해주셨군요. 감사합니다.

거짓말을 하기 싫은 것과 걱정하길 원하지 않아서 별일 아니라는듯 이야기하는 것은 충돌한다고 생각합니다. 걱정하길 원하지 않아서 거짓말하거나 거짓말을 하기 싫어서 소상히 밝혀야 할 것 같습니다. 뭐 이것은 너무나 개인에 따라서 척도가 다를 수 있는 문제지만요.

그도 침착할 수 없었겠죠. 놀란 사람은 비합리적이곤 하죠.

B 입장에서는 굉장히 마음이 상했을거 같아요. 거짓말을 할 필요 없이 조금만 저 미안해 하는 마음으로 이해해 줄 것을 부탁하는 조로 이야기를 했다면 이해할 수 있을텐데...

낮잠이 아니라 정신을 잃은 것이라고 이해해주면 큰 일도 아닐 듯 해요. 반대의 경우라면 뭐 인연이 아닐 수도 있구요.

알아가는 시간이 늘어나면 그만큼 그 사람에 대한 디테일도 늘어나겠죠? 일부 그렇지 않고 언제나 그 선을 넘어오지 않는 분들도 계시지만, 자기가 생각하고 이해가능한 범위 안에서만 이해가 되는 건 어쩔수 없다고 보는데, 그게 악의가 있거나 내게 배려가 없다거나 하지 않다는 걸 확신하기에는 얼마의 시간이 걸릴까요? 오해를 대화로 솔직히 나눌 수 있음은 처음보는 이에 대한 예의였던 건가요? 어릴 때 증조 할아버지께서 밤에 옆 마을에서 넘어오다 호랑이를 봤다는데... 밤에 사람을 보는 것보다 무섭지 않으셨다는 말이 이젠 잘 이해가 됩니다. 사람은 내가 가진 관점에서 일관성이 없을 때 더욱 무서운 것은 아닌지요?

낮시간에 눈이 천근만근일 때가 있죠 ㅎㅎㅎ

kmlee님이 이 글을 쓰신 의도가 뭔지 궁금해지네요. 어떤 상황을 가정하고, 사고의 실험 같은 걸 해보는 것일까? 싶은 생각도 들고요. B가 친한 사람이었다면 쌍욕 나왔을 것 같네요. ㅎ

의도는 없습니다. 그냥 떠올라서 썼어요.

남녀관계인가요?
그는 B에게 별 감정이 없는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