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연애운이 더럽게도 없는 아이
2011년 9월 3일
1
시내를 뒤져 5유로짜리 호스텔을 찾아냈다.
주위의 다른 호스텔의 반값이다.
싸서 좋다 했지만 역시나 시설도 5유로다.
들어가 보니 21명 도미토리다.
샤워실 꼭지는 녹이 슬어있고, 물도 잘 나오지 않았다.
침대도 2층이 아닌 3층이다.
1,2층 사람은 몸을 좀만 일으켜도 천장에 머리를 박는다.
보통 1층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침대는 오히려 꼭대기 층이 가장 좋다.
적어도 몸을 일으킬 수 있으니깐.
모든 시설이 최악이다.
이 호스텔의 유일한 장점은 싸다는 것. 그것 말고는 없다.
하지만 지금 난 어떡해서든 돈을 아껴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 버틴다.
며칠 전에 한국에서 노트북을 주문했다.
친구가 컴퓨터 세팅을 해 주고 보스니아까지 날려 주면
얼추 3일만 더 버티면 여기로 날아올 것이다.
노트북이 날아올 호스텔은 좀 비싼 곳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 돈을 아껴야 한다.
체크인을 하고 침대에 누웠더니 힘이 없다.
오늘은 나갈 생각 하지 말고 뻗어 쉬어야겠다.
하지만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것을 싫어하는 마음이 또 밀려온다.
몸은 쉬라고 하지만 마음이 계속 빈둥거리지 말라고 하니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낮잠 한숨 푹 자려고 했더니 그냥 눈만 감고 누워 있는 꼴이 되었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까 이 호스텔을 안내해 준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동양 사람으로 보이는 여자 목소리가 들린다.
영어 발음을 보니 일본 아이군.
손님 한명 더 들어왔구나. 자자.
하지만 이 아이의 부스럭거리는 소리 때문에 잠이 오지 않네.
기껏해야 배낭 하나 푸는 것일 텐데 왜 이리 시끄러워.
더 이상 못 자겠다. 결국 일어났다.
“잘 잤어요?”
잘 잤어요? 내가 일어나는 걸 기다리기라도 했나?
뭐, 암튼. 그 아이는 내가 일어나는 걸 기다리면서
계속 앉아서 가이드북을 보고 있었나 보다.
“뭐, 잠이 잘 안 오네요. 그런데 밖에 안 나가고 뭐하세요?”
“나가긴 나가야 하는데 감이 안 와서요.
오늘 여기 도착했는데 내일 새벽에 몬테네그로로 넘어가거든요.
반나절동안 여기 다 돌아야 되요.”
“그럼 지금 앉아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반나절 밖에 안 되니깐 여기를 아는 사람과 같이 도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전 여기 오늘 도착했습니다.”
“그렇다고 오늘 아예 안 나갈 거예요?”
“아뇨, 나가긴 나가야죠. 그럼 뭐, 같이 나가죠.”
마호. 이 아이 이름은 마호다. (미호가 아니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 일본 아이였다.
하지만 얼굴에서 일본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리고 당찬 아이다.
지금까지 본 일본 사람들은 다들 캐리어를 끌면서 샤방하게 꾸미고 다니던데
이 아이는 자기 키만한 배낭을 불평없이 매고 다니고 있다.
구두 신은 아이를 데리고 이 언덕을 올랐다 -_-
그렇게 당찬 아이지만 지금 만큼은 매우 고분고분하시다.
내가 가자는 곳은 다 오케이다.
일단 이곳에 대하여 잘 모르기 때문에 잘 따르긴 한다.
하지만 도시 전체를 보자고 높은 언덕을 가자고 했을 때 순순히 따를 줄은 몰랐다.
그때 신발은 그래도 높이가 있는 힐이었지.
언덕 너머에 있는 십자가 무덤들이 신기해서 한 번 올라가자고 했더니
아무 망설임 없이 바로 예스를 날릴 줄은 몰랐다.
우리나라 여자 같으면 힐신은 여자한테 무슨 매너냐고 구박을 받았을 텐데.
속으로 싫어하기는커녕 같이 신나게 농담따먹기를 하면서 여기저기 셔터를 눌러 댄다.
보통 일본 여자들은 매우 순종적이라고 한다.
하자고 하면 거절 없이 순순히 하는 사람들.
예전에는 믿지 않았다.
그런 건 사람마다 성격 차이지 일반화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마호를 반나절 데리고 다니니 알겠다.
언제나 강한 누구에게 의지하면서 순종적으로 살고자 하는 성격.
[하지만 속은 모른다지?
언제나 칼을 갈고 속에 능구렁이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고는 하는데.
하지만 여행하면서 그런 국민성까지는 알지 못하겠다.]
언덕에서 내려와서는 작은 강을 따라 걸었다.
세계 1차 대전의 근원지가 된 현장이 이곳에 있는 다리 중 하나에 있다.
세르비아의 대학생이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암살한 사건이다.
책 봐도 나올 법 한 이야기를 해 줘도 좋아하면서 연신 셔터를 누른다.
그 다리 위에서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셀카도 찍었다.
“이제 배가 좀 고프네요.”
“뭐 먹어야 할지 생각한 거 있어요?”
“그냥 이곳에서 먹어야 되는 것만 먹고 가면 되요.”
흠.. 조금 고민된다. 그저 체밥치치만 먹여도 될지,
그래도 제대로 된 다른 요리를 먹여야 할지.
안 그래도 체밥치치는 너무 많이 먹어서 다른 걸 먹어보고 싶었다.
여기저기 뒤져 보았다.
가게는 어느 정도 있다.
하지만 어디가 맛있는지 모르겠다. 정보가 없다.
내일이면 보스니아를 뜰 아이한테 혹여나 맛없는 추억을 만들기는 싫은 나의 마음이다.
그 때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나의 목적은 맛있는 추억을 선사하는 것이 아니었다.
맛없는 추억만 주지 않으면 되었다.
그리고 마호는 아직 체밥치치도 먹어본 적이 없다.
그저 고기와 빵을 굽기만 하는 요리라 레스토랑간 차이가 크지도 않다.
쉽게 생각하자. 이 아이에게 너무 근사한 것(?) 까지 해줄 필요는 없잖아?
역시 마호는 체밥치치 정도로도 신기해한다.
“이런 것들은 어떻게 알았어요?”
“사라예보는 오늘이 처음이지만 보스니아는 일주일 전에 들어왔거든요.
절 재워준 사람들 덕분에 많이 익혔죠.”
빵에 고기와 양파를 싸 먹는 것 까지 신기해 하는 마호다.
체밥치치는 어딜 가도 떨어질 수 없는 김치같은 존재이다
그녀에겐 이 모든 것들이 신기하다
날이 어둑해졌다. 호스텔에서 한잔 하려 한다.
마트에서 맥주 피처 하나와 과자를 사 왔다.
컵 정도는 호스텔 부엌에 있겠지. 그런데 컵이 하나밖에 없네?
“지금이라도 컵 사올까요...?”
“필요 없어요. 마호는 컵으로 마시고 전 사발로 때리죠.”
그렇게 나의 맥주잔은 사발이 되었다.
이 풍경이 너무 웃기다면서 또 셔터에 담는다.
내가 사발을 마실 때마다 뭐가 그리도 웃긴지 연신 배꼽을 잡아 댄다.
배꼽을 몇 번 흔들어 주니 날 바라보는 눈이 점점 달라지기 시작했다.
컵 없으면 사발로 마시는, 이 모든것들이 재미있었던 잠깐의 한 때
그렇게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같이 몬테네그로에 따라가야 되나?
한국말도 아닌데 이렇게 쿵짝이 잘 맞아보긴 처음이라서.
하지만 오래가지 않아 훼방꾼이 쳐들어오기 시작했다.
“헤이~! 귀염둥이들.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
“합석해도 돼요?”
근 190cm 되는 아이들이 떼거지로 들어온다. 자연히 새로 온 아이에게 관심이 쏠리게 되어 있다.
“아시아 친구들 둘이서 뭐 하고 있어요? 같이 다녀요?”
“아뇨. 전 일본에서 왔고, 이 친구는 한국 친구에요.”
“정말 여기저기서 다 오네요. 우리도 좀 사온 게 있으니 같이 먹죠.”
이 좋은 분위기는 이렇게 위아더월드가 되어 버렸다.
이런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은지 마호는 10시에 침대로 갔다.
2
근 190cm 넘는 아이들 중에는 폴란드에서 온 남자 둘, 여자 하나서 같이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음 목적지는 모스타르에요.”
“뭐, 거기야 매 시간 차가 있으니까 괜찮아요.”
“저희는 그런 게 소용없어요.”
“왜요?”
“저희는 히치하이킹으로만 다녀요.”
그렇다. 이 아이들은 절대 교통수단에 돈을 쓰지 않는다.
태워주는 사람들은 뭘 믿고 해주는건지...
하긴, 에스토니아에서 날 재워준 친구도
시내를 나갈 때면 무조건 히치하이킹으로 나갔지.
이상하게 유럽은 히치하이킹이 잘 먹히더라고.
하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태워준 사람이 강도면 어떡하려고...
이런 식으로 이 아이들은 돈을 정말 최소한으로만 쓰고 다닌다.
방값으로 하루 10유로 이상이 나가지 않는다.
마호와의 분위기를 흐린 것 때문에 원래 이 아이들과는 같이 다니려 하지 않았다.
아침 일찍 혼자 나와 거리를 보았다.
성당에서 마주쳤긴 했지만 인사만 하고 다시 돌아다녔다.
2시쯤 되자 날이 너무 더워서 일단 호스텔로 들어왔다.
하루에 너무 많이 보면 이 도시에 대한 애정이 너무 빨리 식기 때문에
아껴가면서 보고 있는 터라
정오만 넘어가면 할 것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폴란드 아이들도 더운 것은 못 참겠는지 3시쯤에 다 들어왔다.
7시쯤에 같이 전망대를 올라가기로 하고 그 동안은 방 안에서 뒹굴거렸다.
밤이 되어 같이 언덕을 올라갔다.
그런데 여자 아이는 우리랑 계속 떨어져서 올라간다.
분명 학교 친구라는데 올라가다 보면 꼭 뒤쳐져 있다.
“저 아이는 왜 그런데요?”
“몰라요. 원래 저래요. 한두 번 그런 게 아니라서요. 신경 안 써도 되요.”
저녁 어스름의 공동묘지
그리고 야경
꼭대기에서 같이 맥주를 까고 있는데 여자아이,
아가타는 혼자서 저 너머를 바라보며 멍때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친구들 사이에도 4차원으로 통하는 기분이 든다.
“아가타 어때요?”
“왜요?”
“한번 같이 자 보세요. 요리도 잘하고 빨래도 잘하고 몸도 좋잖아요.”
“풋!”
그런 쪽으로 몰고 가긴.
다시 호스텔로 돌아와 같이 맥주를 마셨다.
그러다가 남자 둘은 잠깐 밖으로 나갔다.
이제 나와 아가타 단 둘이었다.
계속 히치하이킹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유럽은 정말 히치하이킹이 잘 된단다.
옛날에 가난했던 학생 시절 다 히치하이킹으로 다닌 사람들이 커서
지금 자동차로 다니기 때문에
옛날 생각을 하면서 잘 태워준단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인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니 벌써 12시다.
“나 이제 자러가야겠다.”
“그러게. 나도 들어가야지.”
“그래. 내 방까지 히치하이킹 해줘.”
방까지 히치하이킹...? 이거 뭐지?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난 못 알아들은 척 하고 방으로 가려 했다. 그런데
“히치하이킹 해달라니깐?”
업어다가 놓아주지 않으면 계속 앉아있을 기세다.
아무래도 오늘 드디어 솔로 생활을 청산하나 보다.
“여기, 저기, 오케이 여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방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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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은 또 다른 21인실 도미토리였다.
2011년의 아가타
2016년에도 다시 한 번 봤었는데 사진이 어디갔지..
암튼 히치하이킹했던 모험정신은 그대로 남아있고
지금은 모험심 없어서 걱정이라는 남자친구분과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
2016년에도 다시 한 번 봤었는데 사진이 어디갔지..
암튼 히치하이킹했던 모험정신은 그대로 남아있고
지금은 모험심 없어서 걱정이라는 남자친구분과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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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1_5 첫 주행 + 1_6 북한도 자전거로 달린다고?
CHAP1_3 + 1_4 Bryan Almighty + 자전거의 운명은?
CHAP1_1 + 1_2 인천 출발 + 히드로 도착
CHAP0 준비
CHAP0_번외 가져갔던 장비 일람
CHAP0_6 출국 그리고...
CHAP0_4 자전거 맞추기 + 5 쉥겐조약
CHAP0_3 항공권과 장비 마련하기
CHAP0_2 어디를 어떻게 가볼까?
CHAP0_1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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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버앤캘리에 이은 웹툰입니다
아이들이 보기에도 좋을꺼 같아요^^ 글작가님이 무려 스탠포드 물리학박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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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자전거여행 정말 꿈같이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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