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방랑] 그 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 에콰도르 4편

in kr-travel •  7 years ago  (edited)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고 /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 최고의 날은 아직 살지 않은 날 /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 무엇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을 때 / 그 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 어느 길로 가야할 지 알 수 없을 때 / 그 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 나짐 히크메트의 <진정한 여행> 全文

국경을 넘었어. 존과 마리와 이젠 헤어져야 했지. 그들은 에콰도르 남부의 히피 마을로 알려져 있는 빌카밤바로 갈 작정이라고 했어. 삶이란 참 신비로워. 마리는 존을 만나기 전까지 콜롬비아의 수도 보코타 미장원에서 일하는 헤어드레서였대. 머리를 깍으러 온 존을 만나면서 그녀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지. 존은 일렉트로닉 뮤직 DJ이자 보석공예가이자 떠돌이 서커스꾼. 마리는 존을 사귀면서 그로부터 보석공예품을 만드는 기술을 익혔고 함께 서커스를 하며 놀았지. 그리곤 단 한번도 떠난 적이 없었던 고향을 떠났어.  베네주엘라, 브라질, 볼리비아, 페루, 에콰도르...내가 마리에게 "존 때문에 네 삶이 완전히 달라졌겠구나?"하고 묻자 마리가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에 존이 곁에서 말했어.    

"내 삶 역시 완전히 달라졌지. 마리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술을 마시면 과음 했고 돈이 생기면 흥청망청했지. 그래서 늘 삶이 불안했어. 모든 남자는 남자로 태어나지만 또한 스스로를 남자로 만들어야 할 시기가 있어. 나는 마리를 만나면서 진정한 사내가 될 수 있었어. 그녀가 내 삶에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하는 가정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마리, 사랑해!“   

늘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우리는 서로에게 축복을 나누며 포옹을 하고 헤어졌어. 언제 다시 볼 지 알 수 없다는 이별과 만남의 불확정성이 불러 일으킨 감정 때문이었을까? 나는 존과 마리를 오래, 꼭 껴안았어.    

에콰도르 북단 마을 툴칸을 지나 콜롬비아에 첫 발을 내딛었어. 입국비자 수속은 금방 지나갔어. 칠레 출신인 케노도, 아르헨티나 출신인 파블로도 주민등록증을 내미는 것으로 통과 되었어. 유럽 시민들이 각 국의 국경을 넘나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지. 그래서 일까? 그들에겐 국가라는 건 단지 국경선 외 다른 의미가 없는 듯 했어. 특히 노마드에게는.   

   

유목민들도 종종 성(城) 안으로 들어가지. 성주나 관리인은 성 안으로 들어온 유목민을 성 안의 백성이다고 여기지만, 유목민들은 자신의 필요에 의해 잠깐 성안을 지나갈 뿐이야. 그들은 성이 구축한 문명과 이기를  그들의 방식으로 이용하고, 시장에서 거래를 하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성문을 나서 성 밖으로 길을 떠나. 그들은 한 생애를 통해 수많은 성들을 지나가지만 어떤 성에도 소속되지 않지.       

조르조 아감벤, 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 페터 슬로터다이크, 마이클 센델과 더불어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꼽은 '우리 시대의 위험한 사상가들' 중 1인으로 꼽은 프랑스 철학자 미셸 옹프레는 "여행을 한다는 것은, 즐겁고 창조적인 '여가 시간'을 미끼로 문명이 요구하는 노동에 시간을 사용하길 거부하는 것이다."면서 이런 말을 남겼지.  

"도시는 공간이라는 가로 좌표와 시간이라는 세로 좌표 덕분에 한 눈에 구별할 수 있게 된 정착민들에게, 늘 정확한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있을 것을 강요한다.이를 통해 권력은 개인을 스스로 통제하게 했으며, 쉽게 감시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유목민은 시간과 에너지를 돈으로 바꿀 수 있게 해주는 이런 논리를 거부했다.전세계 사람들에게 여행을 선택하는 일은 스스로를 가두고 통제하던 것, 예를 들면 일이나 가족, 고향 같은 가장 명백해 보이는 족쇄에 대하여 형을 선고하는 것과 같다."  

콜롬비아의 첫 번째 도시 파스토에 닿은 건 늦은 저녁이었어. 늘 그랬지만 숙박예약도 하지 않았던 터라 버스 터미널에서 어슬렁거렸어. 한쪽 켠에 히피들이 큰 배낭을 내려놓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어. “어이, 형제들!” 케노가 말을 걸었어. 그들은 파스토에서 가장 값 싼 숙소를 알려주었지. 히피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여행 안내서였지.    

“카니발 광장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골목에 붉은 호텔이 있는데 침대 3개가 딸린 방이면 하루 15달러 정도할 거야.”

호텔 산타 이네스(Hotel Santa Ines). 영어로 ‘성 아그네스 Saint Agnes’는 순결을 상징하는 카톨릭 성인. 그녀는 로마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하느님께 동정을 지키기로 작정했는데 뛰어난 미모를 지녔던 그녀에게 들어온 청혼을 거절하자 상대가 앙심을 품고 그리스도 신자라고 고발을 했다지. 삭발을 당하고 나체로 매음굴로 보내졌지만 끝까지 동정을 지키다 순교했던 그녀의 이름을 딴 호텔엔 우리뿐 아니라 남미 출신 방랑자들로 가득했어. 카우보이 복장을 하고 기타를 치는 페르난도, 페루 출신의 싱어 송 라이터 하비엘 등등.    

우리는 콜롬비아의 살렌토 마을에서 열리는 서커스 모임(Circo de Convention)의 참가비를 벌기 위해 파스토에서 며칠 더 묵기로 했어. 나는 페르난도와 함께 다니기도 하고, 하비엘과 다니기도 했어. 페르난도는 레스토랑을 찾아다니며 노래를 불렀고 하비엘은 길거리에서 버스킹을 했지. 

         

아르헨티나, 칠레, 브라질, 콜롬비아 수많은 남미의 길을 걷다 느닷없이 거리의 악사와 마주치곤 해. 클래식 기타, 아코디언, 트럼펫, 색소폰, 드럼 등등. 멈춰 서서 악사들의 연주를 듣고 있노라면 내가 서 있는 골목이 갑자기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는 듯한 느낌에 휩싸이곤 했지. 그리고 새삼스레 차오르는 삶의 풍요로움. 

만약 거리의 모든 악사들이 먹고 살기 위해 공장이나 회사에서 하루 종일 일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되면 그런 세상은 흑백(黑白)만이 존재하는 거리, 불모(不毛)의 광장과 같을 거야.  

행인들은 멈춰 서서 구경하다가 지폐를 모자 안으로 지폐를 내려놓기도 하고, 어떤 이는 가던 길을 되돌아와 모자 안에 동전을 내려놓기도 했어. 그건 거리의 악사들을 '동정'해서가 아냐.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해준 데 대한 '감사'였지. 또한 지구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인류로서 연대의 표시이기도 해. 흑백으로 치닫는 세상에 맞서 끝까지 싸우자는, 싸워 달라는.    

단지 '거리의 악사' 뿐 아니라 세상의 수많은 '예술가'들까지, 인류에게 삶의 풍요를 선물해 주는 그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연대를 표시하기 위해 필요한 건 1000만원이 아니었어. 평범한 사람들이 내미는 지갑 속의 1천원, 5천원, 1만원...그것이 모여 '우리 삶의 풍요를 없애려는 견고한 시스템'과 싸우는 게 아닐까?   

노래를 듣다가 지갑을 열까 말까 망설여질 때면 나는 거리의 악사들이 모두 사라진 세상을 상상하곤 해. 

아참 스팀잇(STEEMIT)에 올라오는 스티미언들의 이야기도 어쩌면 버스킹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그래, 보팅 하나 하나가 모여서 ‘우리 삶의 풍요를 없애려는 견고한 시스템’과 싸우는 거지.    

보다 다채로운 세상을 꿈꾸며!   


To be Continued.

[남미방랑] 헤르만 헤세,  '크눌프의 후예'였던 히피들을 위한 변명 - 에콰도르 3편
[남미방랑] 낯선 여행 혹은 방랑하는 삶으로의 초대 - 에콰도르 2편 
[남미방랑] 태어나려는 자는 알을 깨뜨려야 한다 - 에콰도르 1편

Written by @roadpherom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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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 여행기 기대해봅니다~
혹시나 여행준비글에 에콰도르 여행기 내용 일부 발췌해도될까요?
보다 다채로운 세상을 위해!

네 얼마든지 공유(!) 가능합니다 ^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