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짓기]엄마의 반찬가게

in kr-writing •  7 years ago  (edited)

오늘도 선배들과 소모임 할 때 썼던 글을 가져왔습니다.
단편이라고도 하기 뭐한... 조악한 짧은 글이요 ^^
그때 썼던 글 목록을 보니 엄마 이야기, 연애 이야기가 대부분이네요.

저도 이번에 안 건데요.
지어낸 이야기에도 우리 엄마가 보여서~
또 한 번 아... 딸은 어쩔 수 없구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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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의 진동이 느껴졌다. 엄마였다.
“밥 먹었어?”
“아니, 엄마는?”
“할 줄 아는 게 없잖아.”
“알았어. 역에서 내려서 뭘 좀 사갈게.”
“그래, 이따 봐.”

어느 순간부터 엄마는 전혀 음식을 조리 할 수 없다고 했다. 전기밥솥이 해주는 흰 쌀밥조차도. 엄마의 머릿속에서 요리라는 회로만, 음식이라는 회로만 끊어진 것처럼.

급식이 일반적이지 않던 그 시절, 내 도시락은 언제나 관심의 대상이었다. 우리 엄마 반찬 한 번 먹어보겠다고 기웃거리는 아이들 때문에 도시락 임자인 나는 되레 맨 밥을 우걱우걱 쑤셔 넣곤 했다. 남자아이들이 몰래 꺼내먹는 일도 잦았다.

엄마는 서울에서도 일부러 찾아와서 사간다는 반찬가게 주인이었다. 화학조미료를 넣지 않고 만든 반찬과 젓갈들은 담백하면서도 감칠맛이 있었다. 내 고향에서는 ‘용 들어간 보약으로도 안 되면 그 집 젓갈을 먹인다.’는 말이 있을 만큼 유명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부터였다. 엄마 손맛의 기원이었던 외할머니. 엄마의 반찬가게를 처음 시작한 사람.

외할머니는 당신의 음식 재주를 싫어했다. 외할머니는 손맛 뿐 아니라 손재주도 뛰어나서 푸드 스타일리스트라는 직업이 생소하던 그 시절부터 맛있는 음식을 더욱 맛있어 보이게 하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이래저래 손으로 하는 일 대부분을 잘 했다고 보면 된다. 외할머니는 그 손재주가 여자 팔자를 가난하게 한다고 믿었다. 젊어서부터 일을 해도 해도 가난한 것이 손에 붙은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후에 우리 엄마를 보면 그건 미신이거나 잘못된 판단이었지만.

엄마가 처녀 시절 공무원으로 일했던 것도 반찬가게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외할머니가 반강제로 시킨 것이었다고 한다. 인근 고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와 엄마가 결혼허락을 받으러 찾아왔을 때도 가장 먼저 한 말이 “집안에 식당 하는 친척이 없느냐”는 거였다고 하니 어지간히도 싫었나보다.

참 슬프게도 외할머니의 노력은 아버지의 실수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다. 그 시절에는 보증을 잘못 서서 망한 사람들이 흔했다.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유지할 수 있었지만 집이 없어졌다. 외할머니는 어떻게든 다시 집을 찾으려는 엄마의 노력을 외면하지 못했다. 반찬 만드는 비법을 알려주면서도 ‘집만 다시 사면 가게 접으라.’고 덧붙이곤 했다.

엄마는 의외로 사업수완이 있었다. 외할머니는 장사를 하면서도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지만, 엄마는 곧 아빠의 수입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오히려 더 넓은 집을 사기까지 이년 반이 걸렸다. 반찬가게가 점점 성황을 이루는 것과 비례해서 외할머니의 근심은 깊어졌다. 장사가 잘 될수록 오히려 더 불안한 표정을 짓곤 했다.

할머니는 엄마와 아버지가 보내준 효도관광에서 돌아오고 사흘 뒤에 쓰러졌다. 건강하던 사람이 쓰러지면 한순간에 간다는 속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쓰러지고 일주일 후에 돌아가셨다. 엄마에게 별다른 유언은 없었다. 다만 “죽기 전에 좋은 데 보여줘서 고맙다. 손 한 번 잡아보자”라고 했는데 삼십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나도록 엄마 손을 놓지 않았다.

엄마의 팔꿈치 아래서부터 손바닥까지를 수십 번을 쓸어내리고 또 쓸어내리더니 ‘아직은 아니다. 손 놓지 마라’ 하며 또 쓸어내기를 반복했다. 죽기 전 아쉬움을 표현하는 것 치고는 좀 이상하다 싶은 생각이 들었을 때, 할머니는 엄마 손바닥 위에서 무언가를 움켜쥐는 시늉을 하고는 ‘이제 됐다’ 며 미소 지었다.

그날 밤에 외할머니는 주무시듯 돌아가셨다.

장례가 끝난 후에야 엄마가 이상해진 것을 깨달았다. 반찬이 되었어야 할 재료들은 썩어서 버려야 했다. 일시적이겠거니 하는 마음에 한동안 가게를 닫고 쉬기로 했는데 삼년이 가도 사년이 가도 다시 열지 못했다. 가게가 없어진 후에 엄마의 운명은 외할머니의 바람대로 흘러갔다. 엄마는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게 됐다. 가세의 확장이 중단된 것 빼고는 그럭저럭 잘 살아졌다. 가끔 “다시 음식을 할 수 있게 되면 그때는 내가 죽을 때가 된 것”일 거라고 하는 것이 입버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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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찬가게 가보고 싶었는데, 마지막 부분에서 슬프게 끝나네요! 할머니께서는 자신의 딸이 더 고생할까봐 걱정하셨나봐요.

요건 모델이 제 친구(베프)의 어머니에요~
반찬가게는 아니고 식당을 오래 하셨어요.
지금은 가게를 접으셨지만 제 인생 순대국이에요 ^^
또 결말과 다르게 지금도 음식을 무척 잘 하십니다 ^^

젊어서는 화장품 회사에 다니셔서 지금도 저만 보면 눈썹을 새로 그려 주시는 분이에요
친구 어머니를 모델로 지어낸 이야기인데 저기에도 우리 엄마와 제가 보여서~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의 공통점(?)같은 걸 느끼곤 합니다.

좋은글 잘 읽고갑니다..^^
상상할수있게 만드는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 학교 선배들이랑 만든 소모임 비슷한 데서 쓴 글이었는데 그때도 이상하게 엄마 관련된 글은 다들좋아하더라고요... 이 글은 지어낸 글인데도요 ㅎ 엄마의 존재감을 느꼈어요 ㅎㅎ

뻔하지 않은 글 매번 잘 보고 있습니다.

뻔하지 않은 글이라니! 과찬이십니다!
최고의 찬사여요! 정말 감사드려요!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소설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앞으로도 좋은글 많이 기대하겠습니다!!

소설이라고 하기엔 너무 짧아서 꽁트라고 봐야 할 것 같아요 ^^
엄마라는 소재는 언제 어떻게 왜! 써도 좋은 소재 같아요.
우리 모두 엄마의 자식이기 때문인가 봐요 ^^

슬픈 스토리네요~
현명하신 할머님이셨네요~~ 자식 잘되라고 안좋은건 물리고 싶지 않으셨던 그 마음이 너무 아름다우셨어요~

할머니도 결국 엄마니까요....
(저희 어머니는 외할머니 덕에 가난하게 컸다고 하시긴 합니다만 ㅎㅎㅎㅎ)

손재주 많은 여자는 가난하게 산다는 속설을 알려주신 친구의 어머니는
(이 글의 모델이요) 정작 지금도 음식을 몹시 잘 하십니다 ㅎ

새벽에 글을 읽으니 더 슬프게 느껴집니다..

엄마라는 단어가 불러오는 감성이 있는 것 같아요!

짱짱맨은 스티밋이 좋아요^^ 즐거운 스티밋 행복한하루 보내세요!

잇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