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밤, 혹은 서유럽식 허영의 즐거움
"일단 산에 오르게."
위대한 교육철학자이며 독립운동가인 주현덕이 노년을 보내던 어느 날, 그를 존경하고 한때 그처럼 살고 싶어 했던 안과주치의 박명길이, "어떻게 하면 선생님처럼 살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가 한 대답이다.
"아니, 산에 올라 무엇을 하게요?"
박명길이 다시 물었다.
"다음에 올라갈 다른 산을 찾아야지."
주현덕의 말을 가슴에 새긴 박명길은 머지않아 유능한 안과전문의로 이름을 날린다. 박명길은 국내 최초로 콘택트렌즈를 개발할 뿐만 아니라 눈물샘검사법을 고안해낸다. 하지만 그는 안과의사로만 살지 않았다. 곧이어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기계식 타자기의 쌍초점 원리로 특허를 얻고 한글 기계화의 원리를 고안하여 한글 타자기 역사에서 상징적인 인물이 된다. 의과 대학도 나오지 않은 박명길이 이처럼 놀라운 성취를 이루어 낸 것은, 그가 안정적인 의사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산을 오르듯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했기 때문이라고 세간은 평가했다.
안주하지 않는 삶. 굴지의 대기업 신입사원 K 역시 한 가지 분야에 머물며 고만고만한 삶을 누리는 길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남들이 보기에 좋은 대기업에 입사했으나, 결국 길에서 급하게 아침을 먹으며 출근하고 뜻밖의 칼퇴근에 기뻐하는 사회 소모품일 뿐이었다. 현재의 삶은 자신이 원하는 인생 방향과 거리가 멀었고 도전정신은 면접 뒤부터 필요가 없었다. 그런 삶을 바꾸기 위해 K는 자기계발을 하자고 마음먹었고, 자기계발이라면 역시 기본 중의 기본인 인문학이 좋지 않겠어, 하고 생각했다. 그는 주차장에 차를 댄 뒤 시계를 보았다. 아직은 들어가기 조금 이른 시각이었다. 시동이 꺼진 자동차의 실린더가 투둑투둑 식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K는 가져온 신문 사설 쪽을 다시 펼쳤다.
“인문학이 잘 팔리는 세상”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몇 년 전 사람들은 양극화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고 믿었고 서민 경제회복은 멈췄다고 생각했다. 빈부격차는 사교육의 질적 차이로 이어져서 끝내 빈부 세습을 낳기 때문에 이제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끝났다고 말했다. 근로환경과 고용안정은 정부가 노력하는 만큼 언론이 나서서 비난했다. 이러저러한 문제들을 통해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사람들의 삶을 좀먹고 행복을 앗아간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돈을 굴리는 사람들이 돼먹지 못해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엉뚱한 곳으로 귀결되었다.
어느 날 몇몇 학자들에게 좋은 일이 일어났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스티브 잡스가 처음 아이패드를 선보였던 자리에서, 애플이 인문학과 기술의 교차로에 있기 때문에 아이패드를 만들 수 있었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 수준의 발언은 지난 수십 년간 이름난 경영자들의 입에서 늘 나오던 낡아빠진 말이란 것은 눈치 밝은 사람들은 죄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패드라는 매끈하고 값비싼 장난감을 자랑하기 위해 잡스가 꺼내놓은 인문학 타령은 가뜩이나 밥 벌어먹기 어려워진 인문학자들에게는 기회로 보였다. 이 비주류 학자들은 이때다 하고 잡스를 내세우며 인문학이라는 개념어를 일반인들에게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제 이 일은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성공적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행복하기 위해서 반드시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인문학적 소양을 가진 사람만이 창의적인 사람이 되고 그것을 아는 사람만이 세상을 올바르게 이끌 수 있다는 믿음까지 가지고 있다. 성공한 사람들은 갑자기 너도나도 자신의 성공은 인문학을 바탕으로 한다며 인문학 열풍에 기름을 부었다. 모든 사람이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었는데, 주부를 위한 인문학, 청춘을 위한 인문학, 청소년 인문학, 어린이 인문학, 노숙자를 위한 인문학에 이르기까지, 별의별 것들이 인문학이라는 말을 달고 교육상품으로 탈바꿈했다.
오늘날 이 거대한 인문학의 열풍에는 항상 비슷한 느낌의 말이 따라다닌다. 철학, 문학, 청춘, 대안, 공동체, 시민, 통섭, 상상, 비전, 꿈, 희망 따위의, 들으면 한 3초 정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낱말들이 자꾸 불어난다. 어떤 행동 경제학자도 이런 현상이 지구 온난화를 부추긴다고 주장하진 않았으나 대학가 스터디 룸, 카페 곳곳은 뜨겁다. 어떤 곳에서는 농사와 인문학을 연결했고 또 다른 곳에서는 태교와 인문학을 연결한다. 인문학은 엄마 뱃속에 들어있는 자식과 자식을 품은 엄마의 뱃속까지 책임져줄 것만 같은 종교가 되었다.
서점의 신간 가운데 ‘인문학’이 들어가지 않는 책은 드물다. 인문학은 한때 서점을 뒤엎었던 성공학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성공학 서적을 쓴 작가들은 성공한 뒤 책을 쓰는 것이 아니라 책을 팔아 성공했고 인문학 서적을 쓴 학자들은 어떤 학문적 성취를 이루어 책을 쓴 것이 아니라 책을 써서 성공했다. 성공학이나 인문학이나 모두 성공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인문학은 성공학이다.
채용 박람회나 대학의 각종 특강 연사로 초청되는 유명 CEO들은 인문학 소양을 가진 참신하고 열정 있는 인재들이 자기 회사에 들어오면 좋겠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참신하고 열정 있는 대학생들이 가진 인문학 소양은 인문학 콘서트에 가서 명사 몇 명을 만나고 책 몇 권 읽는다고 갖춰질 소양이 아니다. 결국 영어, 학점, 공모전, 수상경력, 봉사점수, 인·적성 검사가 모두 뛰어난 학생이라야 인문학 소양으로 덕을 볼 수 있다는 점이 문제다.
이것이 인문학이 좋다는 말이 맞긴 맞는지 그제야 헛갈릴 때쯤, 누군가 창문을 두드렸다. K는 읽던 사설에서 눈을 떼고 올려다봤다. 예순이 넘어 보이는 주차 요원이 눈을 맞고 서 있었다. 시계를 보니 곧 들어갈 시간이었다. K는 미안하다며 주차비를 계산한 뒤 건물 지하로 내려갔다. ‘박다’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클럽 ‘바가바가’ 안은 벌써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
‘인문학의 밤, 고전 읽기의 즐거움’이라는 행사를 주최하는 단체는 대구의 대학생 연합 잡지 ‘봄봄’이었다. 봄봄이 인문학 행사를 주최했다고 해서 그 잡지가 다른 학생 잡지보다 더 교양 있는 잡지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각 호마다 단어 수를 조사해보면 글 하나에 쓰이는 낱말 수가 다른 잡지의 평균 정도였고, 한쪽에 한 번 꼴로 청춘이라는 낱말이 쓰였으며 두 쪽에 한번 꼴로 스펙이라는 낱말이 쓰였다. 잡지 마지막에 오는 대학생활에서는 다른 잡지들과 마찬가지로 ‘키스할 때 하지 말아야 할 말’, ‘첫 경험인 척 내숭 떠는 법’, ‘전화번호 따는 법’ 같은 제목과, ‘할 말 있‘수다’’ ‘연극여‘지도’’ 같은 말장난이 꼭 있었다. 마지막 ‘편집후기’는 항상 이상한 글씨체로 쓰여 있었고 그 가운데 꼭 한 명씩은 무릎 나온 추리닝을 입고 있거나 촌스런 뿔테 안경을 끼고 있는 사진을 넣었다. 역시 다른 잡지와 똑같은 점들 가운데 가장 똑같은 점은, 그들은 글을 쓴다고 하지 않고 싼다고 했다.
이러한 이유로, 별 특별할 것 없는 학생 독립잡지 봄봄이 ‘인문학의 밤, 또는 고전 읽기의 즐거움’이라는 행사계획을 발표했을 때, 대구의 대학생들은 들뜰 수밖에 없었다. 늘 다른 지역에서 보수라 불리는 것에 익숙하고 이제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학생들이었기에, 같은 학생들이 무엇을 일으킨다는 것은 큰 충격임이 확실했다. 그 행사는 한 호텔 지하에 있는 클럽 ‘바가바가’에서 열린다는 소문이 돌았다.
클럽 사장은 봄봄이 아니라 자신의 바텐더에게 그 소식을 먼저 들었다. 그는 전에 한 번도 그런 행사를 들은 일이 없었고 요청받은 적도 없었으나, 행사 이름을 들어보니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바텐더는 직접 사장에게 인터넷 홍보물을 보여주었고 사장은 직접 연락을 해서 편집위원들과 만났다. 계획을 듣고 난 뒤에도 그게 무슨 행사인지 잘은 몰랐지만, 자신이 인문학을 몰라서 그럴 것이라고 사장은 여겼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무식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싫었기 때문에, 괜찮은 계획인 것 같다며 맞장구를 쳤다.
행사가 열리기 이주 전, 봄봄과 바가바가의 웹 페이지에 같은 날 같은 내용의 포스터가 붙었다.
인문학의 밤, 고전 읽기의 즐거움
5월 18일. 우리의 사고에도 자유를!
클럽 ‘바가바가’ 저녁 9시
주제 : 나만의 삶을 위한 인문학 고전. 청춘들을 위한 진짜 인문학!
다양한 프로그램 : 골든벨, 토론, 시원한 뒤풀이, 음료와 약간의 술 제공.
포스터의 내용을 본 학생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였다. 봄봄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광고를 공유하기 시작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행사는 아직 준비단계였는데 다른 지방에서 아이디어를 베끼기 시작했다. 젊음이 모이는 클럽과 인문학의 만남은 전례 없는 시너지를 만들어냈다. 너무 관심이 쏠리자 바가바가의 사장은 봄봄의 편집장에게 사람 너무 많이 들어오면 통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편집장은 하는 수 없이 행사 일주일 전부터 입장권을 선착순 판매하기로 했다. 다만 입장권 수익으로 임대료를 내야 하는 탓에 어쩔 수 없이 입장료는 올랐다.
퇴근길 버스 안에서 신입사원 K는 자신의 15년 뒤를 상상했다. 그는 애써 좋은 모습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새로움에 대한 기대도, 기쁨도, 보람도 없는,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은 그저 그렇고 그런 밋밋한 삶만 떠올랐다. 15년 뒤 그는 사람들이 얘기하는 안정은 있을지언정 자유는 없는 사람으로, 아이들과 부인의 그림자가 되어 그것이 꽤 괜찮은 행복쯤으로 알고 있는, 즉 자기는 없고 주위만 있는, K 과장이었다. K는 결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제 뜻을 크게 펼칠 수 있는 회사의 임원이나 적어도 부장은 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변화가 필요했다.
버스 앞자리에 앉은 여대생 두 명이 ‘인문학의 밤’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들은 건 바로 그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인문학이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질렸지만, 자기계발을 위해서라면 그런 공부도 필요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은 절대 앞자리 여자들의 목선이 예뻤거나 관능적인 목소리를 가졌기 때문은 아니었는데, 만약 그게 사실이었다면 K는 번호를 바로 물었을 것이다. 절대로 K는 여자들이 마음에 들어서는 아니었지만, 그 ‘인문학의 밤’에 대해 더 알고 싶은데 나중에 좀 더 가르쳐 줄 수 있겠느냐며 결국 더 예쁜 한 명의 번호를 물었다. K는 스스로 H 자동차 연구개발부에서 일한다고 말한 뒤 명함을 꺼내 주려다가 도로 집어넣었는데, 그 까닭은 사실 연구개발이 아니라 설계부에서 일한다는 점이 덜 매력 있게 보일까 봐는 아니었고 여대생들은 명함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바가바가를 즐기는 사람 가운데 몇몇은 그런 걸 왜 클럽에서 하냐며 주말 밤의 즐거움을 빼앗긴 처지에 대해 불평했다. 꼭 밤에 할 필요도 없고 오후에 시작해서 저녁에 끝내고 뒤풀이를 다른 곳으로 가서 하면 되지 않느냐는 항의글이 바가바가의 홈페이지에 빗발쳤다. 그러나 사장은 인문학 또한 젊은이들의 해방구가 된다면 한 번쯤은 이런 일도 좋으니 그대로 진행한다고 했다. 클럽을 즐기는 사람들은 인문학의 밤을 기대하는 사람만큼이나 많았기 때문에 불만 글은 폭주했다. 결국 바가바가 클럽의 단골 중의 단골인 L이 불만을 참지 못해 다음과 같은 말로 봄봄의 온라인 게시판을 더럽혔다. “이런 고상한 일이 바가바가에 어울리긴 하나? 강의실 문 잠그고 연애하면 욕할 것들이.”
대구 여성주의 학생모임 회장이자 봄봄의 편집장 P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안녕하십니까. 독립잡지 봄봄의 편집장 P입니다. 저 또한 요즘 젊은 학생들이 클럽을 많이 즐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저희가 대구에서 가장 큰 클럽 바가바가를 선택한 까닭이기도 합니다. 술과 진한 스킨십, 귀가 찢어질 듯한 음악 역시 즐겁겠지만, 정신을 고취하는 고전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일 또한 즐겁습니다. L님이 원하시면 저는 주저 없이 입장권 한 장을 드리겠습니다. 오셔서 직접 겪어 보시고 판단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편집장 P가 직접 나서서 이렇게 글을 달자 L은 더 따질 말이 없다는 듯 ‘그럼, 거기 가서 한 번 미친 듯이 뛰어놀아 주겠다.’는 글을 남겼다. L의 글 밑으로 여러 클럽 단골들의 악담이 이어졌다. L은 입장권을 받기로 했고 몇몇 나머지도 입장권 선착순 구매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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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거야 임마; 흑역사좀 캐지맙시다; 아닙니다 덕분에 지울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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