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의 나는 무척이나 단단한 아이였다. 삑하면 우는 울보면서도, 어머니가 드라마를 보며 펑펑 우는 옆에서 나는 "엄마 왜 울어?"라고 무심한 말을 하곤 했다. 그 시절의 나는 영화나 드라마, 소설, 만화 등의 콘텐츠를 보고 감동을 받아 본적이 거의 없었다. 나를 부끄럽게 하고 슬프게 하고 화나게 하는 것들에는 금방 반응해서 울어버렸지만, 타인 혹은 상상 속의 인물의 감정은 내게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몰입은 잘 해서, 소설이나 만화를 닥치는 대로 읽던 것에 비하면 감수성은 영 꽝이었다. 생각해보면 재밌는 일인데, 감수성과 몰입은 보통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꼬마가 중학생이 되자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음, 초등학생 때에는 일기를 강제로 써야 했지만, 중학생 때에는 직접 일기장을 사고, 펜을 사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시를 쓰기 시작한 때도 그 쯤이고, 인터넷 소설 카페에 가입해서 소설을 써 올리기도 하고, 다솔 같은 창작 플랫폼에도 글을 쓰곤 했다. (이런 다솔이라니, 거의 10년 전 이야기이다.) 그림도 많이 그렸고, 블로그도 열심히 했다. 그 쯤부터 나는 조금 변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물론, 그 때도 나는 여전히 단단한 아이였다. 주변 일에 공감이라곤 잘 못하는 아이. 중학생 시절에 대해서는 또 할 말이 많지만 그랬다간 글이 삼천포로 빠지고 말 것이다.
시간은 그런 와중에도 계속 흘렀다. 나는 사춘기가 늦게 왔다. 2차 성징이야 또래 애들과 비슷한 때에 왔지만, 사춘기는 고2인지 고3인지 그 쯤 왔던 것 같다. 엄마의 착한 아들이었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 엄마랑 무척 싸우는 아들이 되어 있었다.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당연히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입시를 한창 준비하는 때에 오면 얘기가 조금 다르다. 바빠서 일기를 쓰진 못했지만 여전히 소설을 끄적이고, 시를 썼다. 내가 겪던 불합리에 대해서 고민하고 갈등하던 때이기도 하다. 아침 일곱시에 일어나, 일곱시 반에 등교하고 밤 열한시 반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던 시기. 내 삶의 목표가 강제로 한 지점에 맞춰졌던 시기. 내 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던 시기. 그런 시기를 거치며, 나는 점차 변하기 시작했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신 차려보니 나는 감수성이 강하게 발달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타인이나 상상 속
캐릭터가 겪는 고통이나 불합리에 관한 것들을 잘 못 보는 성격이 되어 있었다. 타인의 고통이 꼭 나의 고통 같았고, 민망함이나 언짢음, 답답한 같은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각이 다 그랬다.
수능 끝나고, 대학도 붙었는데, 나는 "빵점동맹"이라는 만화를 볼 수 없었다. 우연으로 인해 주인공이 수능 시험장에 입실하지 못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당시 내게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자극적인 장면이었다. 마침 입시를 했던 경험 때문에 주인공이 겪었을 감정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소한 악운이 겹쳐 수능을 못 치게 되는 주인공의 이야기. 그 주인공이 겪었을 좌절이나 고통들이 머릿속으로 물밀듯 들어와 나는 그 웹툰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시간은 흘러 연재가 끝났고, 이제는 부러 찾지 않으면 볼 수 없게 되었다. 지금 다시 보라고 한다면 볼 수는 있겠지만, 썩 유쾌하지 않은 그런 감정의 전이를 겪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군 입대를 고민하고(고민 했는데 왜 아직도 안 갔을까....) 있던 시절에는 "뷰티풀 군바리"를 보지 못했다. 판타지고, 성상품화고, 그런 것들을 다 떠나서 군대에 가면서 겪는, 묘사된 불합리들을 감당하며 콘텐츠를 즐길 수 없었다. 어쩌면 내 이야기일지도 모르는 것들인데, 정확히는 알고 싶지 않았다. 한참을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볼 수 있게 되었지만, 결국 댓글창에서 사람들이 싸우는 모습에 지쳐서 더이상 보는 것을 그만두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 글을 쓰게 된 계기. "스펙 옵스 : 더 라인"이라는 게임이 있다. 모래 폭풍으로 고립된 두바이(정확히는 기억 안나지만 중동의 어느 부유한 도시)에서 벌어지는, 전쟁 범죄에 대한 게임이다. 나는 심지어 스포일러까지 봤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게임을 진행할 수 없었다. 꽤 최근에 게임을 오십분 가량 한 적이 있었는데, 초반부에 미군인 주인공이 아군인 미군으로부터 공격받게 된다. 대의야 어떻든 미군으로 플레이 하는데 같은 미군을 죽여야 하는 상황이 정말 유쾌하지 않았고, 거기에 깃든 사연(스포일러이므로 검색을 추천합니다.)까지 미리 알게 되었으니 나는 정말 게임을 플레이 하고 싶지가 않았다. 알고 있는 최악의 결말에 내가 직접 다가가야 한다니. 그 과정마저도 최악인데. 나는 그 이야기의 일원이 되고 싶지 않았다. 아마 조만간 그 게임의 스토리에 관해서 친구한테 그냥 이야기를 들을 것 같다. 어차피 "스팀(Steam)" 가족 공유로 하던 게임이기도 하고.... 게임을 구매할 생각이 없다면 스토리에 관해서 간단하게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스포일러를 하고 싶지 않아서 내가 느꼈던 감정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할 수 없다니 조금 슬프다.
긴 시간 후 나는 결국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렇다. 이 글은 누군가에게 했던 이야기기도 하고, 할 이야기기도 하다. 언젠가 나는 스펙 옵스를 마저 플레이 할 수 있을까? 글쎄, 그러기엔 조작감이 좀 구린 게임이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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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탈탈 털어보여주는 이런 모습에...저는 감동합니다.
때론 단단하고...때론 사무치게 여린....그 모든 존재가 내 안에서 옹기종기 살고 있겠지요. 어느 때 누굴 표면에 불러세우느냐-의 선택-
잘 봤어요. 지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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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타타님 블로그 재밌어 보여서 팔로우 하고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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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영화,책등을 즐기는데 제한이 있다니..
감수성이 풍부한게 꼭 좋은건 아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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