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노인

in kr-writing •  7 years ago 

< 최노인>

도로 곳곳에 움푹 패인 웅덩이는 지난 밤 거세게 내렸던 빗줄기의 상흔이다.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린 다음날의 아침 운동을 주저 할 만도 한데 최노인은 아랑곳 없이 집을 나선다. 동네 어귀를 벗어나 약수터로 들어가는 산책로에 이르자 최노인은 준비한 장화를 갈아 신는다. 비 온 다음 날에 여지 없이 이어지는 진창길을 위해서다.

유쾌해야 할 아침 운동 길이 황톳길의 진창 길로 변해 버린건 야산 그루터기에 별장이 들어서면서 부터다. 동네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용 녹지 지역에 별장이 들어설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마을에는 별장의 주인이 정치계의 거물급 인사 라는 둥, 모 재벌 회장에서 중국인 갑부가 미세 먼지를 피하기 위해 짓는 다는둥, 갖가지 소문이 돌았지만 정작 소유주를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별장 공사를 막으려고 마을 사람들이 시청에 까지 가서 농성을 벌였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결국 별장 공사는 시작 되었고 쌓아 올린 흙더미와 장비들로 주민들은 더 이상 약수터를 이용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노인에게 아침 운동으로의 약수터 산책길은 포기 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별장 공사가 시작 되어서 중장비가 약수터 길을 쑥대밭을 만들어도 그는 하루도 빠짐 없이 약수터 길을 오르 내렸다.
이렇게 밤새 많은 비가 내린 날에도 무겁게 발걸음을 내딛으며 그는 아침운동을 이어 오고 있는 것이다.

질척 거리는 걸음을 옮기는 사이로 최노인의 주의를 끄는건 또 다른 발자국이다. 최노인을 앞서간 발자국. 의외다
발자국은 마치 최노인이 가는 길은 안다는 듯이 성큼성큼 먼저 걸어 갔으며 약수터 길과 별장으로 이어지는 샛길의 갈림길에서 주저하듯 머뭇 거리다 샛길로 향하고 있었다.
is.jpg "어느 놈이 벌써 지나갔군' 크기로 봐서 그건 분명 남자의 것이었다.

순간 최노인은 얄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것이 지난 밤 이후로 이 길을 올라 갈 사람은 별장지기 박씨와 자신뿐, 그외에 이 길을 사용 하는 사람은 없었고 더욱이 별장지기 박씨는 아픈 아내를 간호 하기 위해 며칠 전 서울로 가버린 상태이기 때문이다.

잠깐의 호기심을 거두며 최노인은 자신의 일에 집중 하기로 했다. 이제 몇미터만 가면 자작나무 숲이다.이 자작나무들은 그가 몇년전 심고 이제껏 가꾼 그에겐 자식과 같은 존재다.여전히 푸른 빛으로 반기는 자작나무 숲을 한동안 어루만지던 그는 발길을 돌려 좀 더 깊숙한 숲속으로 전진한다. 억센 수풀과 늘어진 나뭇가지들로 가려진 오솔길을 따라 조금 가다보면 작은 옹달샘이 나온다. 이 물길이 갈라져 약수터와 별장으로 이어진다. 그는 한 손으로 샘의 물을 떠서 마신다.알싸한 맛이 혀 끝을 자극하고 목젖을 타고 흐르는 물은 아침의 정기를 온 몸 구석구석에 전달해 주며 마침내 그의 남근을 불끈 솟게 만든다. 나이가 들면서 느끼는 무기력감을 이때 만큼은 잊을 수 있어 그는 좋았다.
그는 이 느낌 때문에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심지어는 아픈 몸을 이끌고도 아침 운동은 거르지 않는다.

몇 번의 심호흡을 마치고 돌아서는 그의 눈에 반짝이는 무엇가가 보인다.
그가 집어 든건 핸드폰 고리다. 아마도 반짝이는 구슬이 동물의 시선을 끈 듯 하다. 그렇게 물어다 놓은 갖가지 물건들을 수풀 곳곳에서 본 적이 있다. 이제 슬슬 내려가야 겠다고 생각하며 최노인은 그 핸드폰 고리를 주머니에 넣는다. 손녀에게 줄 생각이다. 그리고 한가지 아침 운동의 클라이 막스가 남았다.

최노인은 별장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몇 걸음 내려가 그는 바지를 내린다. 그리고 정확히 샘이 별장 쪽으로 갈라지는 물길쪽을 정조준 하며 발사한다. 그의 소변이 만들어 내는 포말이 물길 속에 사라져 흩어져 버리지만 그 물을 마시는 누군가는 그의 배설물을 마시는 것이다. 그가 별장쪽 사람들을 그렇게 단죄 하는것은 힘 없는사람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항거이고 정의의 실현인 것이다.

오늘따라 내려 오는 발걸음이 무겁다. 간 밤 억세게 내린 비가 내뿜은 습기가 그의 몸을 무겁게 만든다. 아무래도 화장실을 가야 할 것 같다.공중 화장실은 아래 50M쯤에 있다.
도착할때까지만 기다려 주면 좋을텐데 마음이 급하다. 걷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급기야 최노인은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주머니 연신 주머니를 뒤적이며 휴지를 찾지만 손에 닿는건 아까 주운 핸드폰 고리뿐이다. 늘 갖고 다니던 휴지가 없다. 남자 화장실에 분명히 휴지는 없을터, 그래서 그는 여자 화장실로 걸음을 옮긴다.
여자 화장실을 칸칸히 점검하던 그가 마지막 문을 열었을때 최노인은 처음으로 아침운동을 한 것을 후회했다.
한 여자가 목을 메고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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