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
위계없는 차이의 향연
예술품의 원작성이 가지고 있던 절대 권력은 현대 사회에 와서 점점 무너졌다. 이러한 시대를 가장 먼저 꿰뚫어본 예술가는 바로 모네다.인상파가 보기에 사물의 색은 시시각각 빛을받는 순간에 따라 항상 달라지기 마련이다. 모네의 <루앙성당연작>을 보면 성당이 빛을 받는 시간대를 달리하여 똑같은 성당을 여러 장의 그림으로 남겼다. 고전주의에 살았던 예술가들이 이 그림을 보면 아마 이렇게 물을 것이다.
도대체 이 6개의 그림 중에 어느 것이 진짜 루앙성당의 색인가?
진짜 루앙성당은 어느 그림인가?
고전주의 그림에는 확실한 원본의 색깔이 존재했으며, 사물의 견고한 색과 형태에 의해 이루어졌다. 사물을 놓고 계속 그림연습을 하면서 사물(원본)과 가장 닮게, 가깝게 그린 그림(복제)의 권위가 인정받았다. 하지만 모네의 6개의 루앙성당의 색깔중에 어느것이 진짜라고 말할수 있을까? 낮과 밤, 새벽과 해질녘의 빛을 그린 루앙성당의 색깔은 모두가 자기가 진짜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6개의 그림으로 흩어져버린, 견고한 진짜 루앙성당은 어디로 갔을까?
루앙성당 그림(복제)들 사이에는 무엇이 더 원본을 닮았느냐 하는 위계질서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원본자체의 존재에 대한 의심을 하지 않을수 없다. 시시각각변하는 색깔중에 어느 시간대에 어느 방향으로 들어오는 빛에 의한 색깔을 정해서 딱 이게 원본의 색깔이다! 라고 말할수 있는가? 원본성, 원작성의 권위는 물그림자처럼 흐려진 여러 개의 루앙성당속으로 흩어져버린다. 세계는 더이상 한개의 그림안에 한꺼번에 재현되지 않는다.
반고흐
최종적 해석의 해체
이제 원본의 권위는 모두 흩어져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한 작품에 대해 비평할때 이것은 무엇이야! 라고 단언할수 있을까? 원본이 사라져버렸듯이, 작품에 대한 특권적인 해석도 모두 여러 개의 가능성 속으로 흩어져버린다. 이 과도기에 살았던 3명의 비평가가 한 그림을 두고 설전을 벌인다. 바로 고흐의 <구두> 그림!
먼저 하이데거가 시작한다. 그는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은 바로 작품자체에서 느껴지는 탈은폐된 것이라 한다. 그림 외적인 요소들은 모두 배제하고 작품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를 주목하라고 말한다. 여기까지는 그림의 해석을 규정짓지 않는 매우 탈근대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이데거는 이 구두가 농촌의 아낙네것이라고 단언해버린다. 그림이 자기한테 말을 걸었데나 뭐래나
이어서 샤피로가 반박한다. 그는 하이데거의 글을읽고 고흐가 이 그림을 그렸던 시기,상황을 모두 조사해서 종합한 결과, 이 그림은 도시에서 그려졌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농촌사람의 것이 아니란 당시 도시에서 살았던 사람의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이 구두의 그림은 단순히 구두가 아니라 고흐 자신의 모습을 구두에 빗대어 표현했다 한다. 예술가 자신의 자의식의 표현이란 얘기다.
나중에 데리다가 뒤집는다. 샤피로 너는 구두의 의미를 한 특정 주체에게 귀속시키는 것은 매우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그리고 하이데거 너는 조금 낫지만 니가 말하는 탈은폐된 작품은 어차피 한 가지 최종적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것 아니냐? 이 구두가 누구 것이냐 논쟁하기 전에, 이 구두가 한 켤레라고 단언할수 있을까? 똑같은 쌍의 신발일수도 있고, 한 짝의 신발과 나머지 한 짝은 그것을 쫒는 유령일수도 있고 가능성은 무한대다. 제발 불필요한 해석주의는 갖다버리라!
마그리트
원본과의 일치가 중요하지 않는 복제
이번엔 마그리트의 그림으로 옮겨가보자. 그림속엔 파이프가 보인다. 그리고 밑에 텍스트가 있다. "Ceci n'est pas une pipe" 해석하면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거장의 말장난인가?..파이프를 그려놓고 파이프가 아니라니..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저것은 분명 파이프가 아니라 그림이지 않는가? 아주 우연히 색깔과 형태의 형상이 파이프의 모습을 닮아있을수도 있다. 저건 파이프가 아니라 물감일 뿐이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 '이것은'은 무엇을 가르키는 것인가? 설령 '이것'이 텍스트를 가르켰다면 역시 텍스트는 텍스트일 뿐이므로 파이프는 아니다. 파이프를 그려 놓고 파이프를 부정함으로써, 마그리트의 그림은 6개의 해석의 여부를 남기게 된다고 한다.(난 6개 다 찾지 못했다-_-;)
만약 이 그림에서 텍스트를 빼버린다면, 이 그림이 가르키는 것은 오직하나, 현실에 존재하는 '파이프' 단 하나이다. 여태까지의 그림은 이렇게 단 하나의 특권적 해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마그리트 그림속 파이프(복제)는 실제의 파이프(원본)가 아니라 말한다. 이제 복제는 원본과의 일치 여부가 중요하지 않다. 과거에 원본과의 유사성의 권위밑에 깔려있던 복제는 이제 원본을 부정함으로서, 원본과 대등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원본과의 일치여부가 중요하지 않는 복제, 시뮬라크르를 과거의 재현방식을 그대로 빌려 말했던 것이다.
앤디워홀
원본없는 복제
이 그림은 마릴린 먼로의 사후에 작업한 그림이다. 먼로의 사진(복제)을 베낀 작품(복제의 복제)이다. 엄밀히 말해 원본은 그림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복제로 다시 복제했을 뿐이다. 워홀은 원본이 유일하게 갖는 유일성과 고유성? 이런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현대의 영상미디어사회에서는 어차피 보여지는 것이 다가 아닌가? 보는것은 곧 믿는것이다.
복제된 이미지의 이면에는 아무것도 없다. 화면에 복제된 마릴린 먼로 그 내면의 어떤것? 설령 있을지언정 그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복제된 이미지, 그것이 전부인 사회 아닌가. 실제 마릴린 먼로는 끝없는 복제들의 피상성 사이에서 없어져버린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복제들은 서로 다 똑같지 않다. 그리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차이를 내는 복제들의 합이 다시 마릴린먼로를 이루고 있다. 워홀은 자신이 의도했던 안했던간에 이미지가 지배하는 이 시대를 가장빨리 포착한 작가이다.
척 클로스
원본보다 더 실재적인 복제
보드리야르는 자신의 저자 <시뮬라시옹>에서 이 사회는 현실 자체가 가상이 되어버렸고, 이제 가상을 위협하는것은 오히려 현실이라 한다. 사람들은 물건을 살때 더이상 사용가치에 따라 구매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소비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것과는 다른 '차이'에 대한 기호의 소비이다. 모든게 다 브랜드값 아닌가? 사용가치를, 의미를 떠나 가격은 이 허깨비같은 가상의 것에 따라 급격히 상승한다. 의미와 기호는 이제 주객전도를 이룬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가상이다. 스팀같은 암호화폐가 대표적인 예가 아닌가!
이제 복제는 원본보다 더 실재적인 상황까지 이른다. 하이퍼 리얼리즘, 이른바 극사실주의 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 비록 원본에서 나온 복제이지만, 땀구멍 하나하나 적나라하게 들어난 저 그림은 오히려 모델보다 더 사실적이다. 더 실존적이다. 더 생생하다.
현대 사회에서는 근대까지 이루어져 왔던 모든 것이 전복된다. 굳게 믿어왔던 진리같은건 없어져버린지 오래다. 데카르트식대로 명석판명했던 합리적인 모든것의 위계질서는 무너진다. 주체와 객체, 원본과 복제, 현실과 가상, 이성과 감성, 신과 인간, 의미와 기호 등등등..이분법적인 위계질서는 시뮬라크르안에서 흐릿흐릿해져간다. 이제 특권적인, 최종적인, 꼭 있어야 하는 그런 것은 없다. 모든게 불확실하며 단지 남은것은 위계없는 차이의 향연일 뿐이다.
진리를 알고 싶다면 무한히 펼쳐진 차이의 놀이들속에서 흩어져버렸던 진리를 다시 조합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세계는 흩어졌지만 다시 모양을 이루는 별자리처럼 존재하며, 더이상 세계는 하나의 별 안에 한꺼번에 존재하지 않는다.
참고문헌. 진중권.<미학오딧세이>,<현대미학-숭고와 시뮬라크르의 이중주>
@thelump
[초간단 미술사] 지난 시리즈
모네의 작품을 보고 입이 떡 벌어졌습니다.
원본은 중요치 않네요.빛과 색의 아름다움으로 승!
고흐 신발 작품 평은 정말 흥미롭네요....이러다 저 신발을 보고 우주를 심오하게 표현한거다 뭐 이럴수도 있겠다 싶어요.
흥미로운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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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쵸. ㅋㅋ '다양한 해석 가능성' 이게 저 시기에는 어떤 해방감을 줬을지 몰라도, 지금은 점 하나 찍어놓고 온갖 미사여구와 뜬구름잡는 이야기를 하게 만드는 단초가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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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그림이 생각 났는데 마침 포스팅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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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리스팀 해주셔서 제가 감사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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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을 보고, "여기서 '해체' 나오면 정말 딱딱 맞겠다."라고 했는데 해체가 나왔네요 ㅎㅎ 묘하게 기분이 좋군요! 오늘 글은 아는 내용이 대부분이라 꽤 수월히 읽었어요 :)
더이상 하나 안에 존재하지 않는 편이 맞다고 생각하긴 한데, 다 해체된 상태에서 과연 어떤 게 어떻게 존재할는지 의문이 들어서, 하나로 엮는 유연한 경계가 필요하지 않나 성싶네요. 오늘도 좋은 포스팅 고맙습니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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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벤야민이 별자리 비유를 든 거 같아요. 해체된 진리들을 조합해보면 별자리처럼 각자의 상을 떠올리게 될테니까요. 오늘도 방문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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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가 조금 재미가 없어서 포기한 책 중 하나였는데, 응용해서 올려주시니 꼭 읽고 싶었던 제가 더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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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런가요 저는 영상 강의랑 함께봐서 그런지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ㅎㅎ 미대에서 배운것보다 이 책에서 배운게 더 많았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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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가 이렇게 흥미로운 것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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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 읽으셨다니 뿌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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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그림 너무 좋네요. 정답을 말해주지 않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여지와 해석점을 남겨두는 것에 오라지널이 있는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잠시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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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그래서 요즘 창작자들의 관객이 "이거 뭘 뜻하는거죠?" 라는 질문에 답하기를 굉장히 꺼려하는 것 같아요. 다양하게 해석했으면 좋겠다는 그들의 바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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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저 군화가 고흐 자신의 것이었다...라고 느껴지네요.
답이 무엇이었는지는 어차피 모르니 상상하는 자가 주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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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가 그린 것은 다 고흐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어떤 면에서 화가가 그린 모든 그림은 다 자화상일 수도 있듯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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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고퀄리티의 미학 글을 써주시다니...일단 정말 감사합니다.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좋네요^^ 정말 가상과 복제의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전시회를 홍보하는데 '인생샷 찍기 좋다' 라는 것을 들이대는 것이나, 어디에 가서 뭘 하든 간에 인스타그램에 사진 올리는 것이 '목적' 이 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고...그런 것을 알면서도 저 또한 가상에 지배되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대인이기도 하네요. 개인적으로는 예술의 가치를 논할 때 그것이 복제로써의 역할에 얼마나 충실한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떤 사진이 원본 사진인가, 합성한 사진인가, 복제된 사진인가 하는 것에 따라서 감동이 달라진다고 하시는 분도 계시던데,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어차피 사진이라는 것 자체가 실제 세계를 복제한 것 아닌가. 그걸 모두가 알고 보는 것인데, 거기에 복제를 또 했건 안했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거죠. 그것보다는 순간의 기록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뻔한 얘기같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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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가 젊을수록 원본에 대한 개념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 사회가 그래서 참 흥미로워요. 6.25 전후 세대부터 태어날때부터 아이패드를 만지작거리는 아이까지 모두 한 장소에 살고 있으니까요. 말씀하신대로 사진을 예로 들어도 사진 자체가 카메라라는 필터를 거쳐 임의적인 조합으로 복제된 것인데, 어르신 세대는 거기에서도 원본성을 찾으려고 하는 경향도 많이 보이구요. 사실 제 포스팅 자체가 어찌보면 뻔한 이야기입니다 ㅎㅎ 긴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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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요. 저희 아버지 세대와 저희 세대간의 간극은 정말 어마어마하더라구요. 뻔한 이야기라 하셨지만 그저 뻔하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생각할 거리가 많은 주제들이라서 이런 것들에 대해 스스로 또 생각해보고 고민해봐도 좋을 것 같다 생각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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