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면 여섯 일곱명씩 모여서 근처 노천카페에서 저녁을 함께 먹거나
맥주나 칵테일을 마시면서 큰 소리로 떠들고
느긋하게 앉아 깊은 외로움와 스트레스를 털어냈다.
지구 반바퀴를 돌아 낯선 타지에서 외국인 근로자로 살아가는 일은
정말 고된 것이었다.
같은 한인은 더 위험한 상대였고,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이 더 안전한 친구였다.
다니엘은 한국말을 할 줄 알았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덕에 쉽게 눈에 띄는 타입이었다.
다니엘은 스페인어보다 영어를 쓰길 좋아했다.
누군가는 한국어로, 누군가는 스페인어로, 또 누군가는 영어로
같은 장소에서 3개국어를 사용하며 호탕한 수다를 떨었다.
다니엘과 나는 영어로 근황을 확인했다.
철수도 영어를 할 줄 안다고 했지만 그의 문장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니엘, 철수가 하는 영어 알아들을 수 있어?
알아듣기는 하는데, 엉망진창이야. 그냥... 뭐... 우유, 먹다, 오늘, 너가.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라고 보면 돼.
엑- 자기는 영어 잘한다고 하던데.
뭐? 말도 안돼.
철수는 내 선임이었다.
엉망진창인 영어를 구사하는, 짚시같은 인간이었다.
상황에 따라서 필요한대로 닥치는 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지구 반바퀴를 돌아 잘못된 곳에 불시착했다.
불행한 땅이었다.
꿈과 희망을 가득 품고 도착한 그곳은 불행이 가득한 곳이었다.
비열함과 술수가 넘치는 곳이었다.
입만 열면 험담이나 비난을 주고 받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향수병에 찌든 이들이 각자 맡은 일을 그냥 대충 대충 하는 곳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내 영혼이 바싹 말라가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기쁨도 만족도 즐거움도 느낄수 없는 곳이었다.
피폐해져가는 영혼을 느끼면서 간절히 기도했다.
누군가를 보내주세요.
다음날, 나는 전화 한통을 받았다.
다니엘이었다.
한국으로 한달간 여행을 떠났던 그가 돌아왔다는 것이다.
내 연락처를 모를텐데.... 혜나에게 전화를 걸어 내 연락처를 알아냈다고 했다.
오랜만에 만나서 놀자. 맛있는 것도 먹고.
좋지. 다른 애들한테도 이야기할게.
아니. 지민이랑만 만나고 싶은데.
그날 왠지 나는 예쁜 원피스를 입고 싶었다.
다니엘과 나는 두 달만에 다시 만났다.
잘 지냈어?
다니엘의 목소리는 항상 부드럽고 차분했다.
아니... 사실 안 좋은 일이 있었어.
무슨 일인데?
진우라는 애가 있는데, 아주 가깝게 지냈거든. 시간이 가면서 진우가 참 좋아지더라. 그래서 고백했다가 차였어.
아.... 괜찮아? 지민?
응. 그냥 그래.
다니엘은 꼼꼼히 내 얼굴을 살펴보았다.
진짜 괜찮아? ...
사실, 답답해. 마음이 답답하네. 울고 싶어도 눈물이 안나. 그냥... 답답해.
내가 도와줄까? ...
어떻게?
이 노래 들어봐-
다니엘은 어떤 한국 여가수의 노래를 틀어주었다.
그리고 자리를 비웠다.
네가 없는 그 길에서 나는 널 기다렸어.
이런 가사였던 것 같다.
울컥 울컥 하는 마음을 계속 다잡았다.
내 눈치를 보면서 한참을 왔다갔다 하던 다니엘이 내 옆에 앉았다.
지민,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아냐, 우는 모습 보여주고 싶지 않아.
왜? 내가 남자라서?
아냐, 그냥... 불편해.
그럼, 내가 게이라고 생각해봐. 나는 게이야. 너한테 관심도 없다구.
그게 뭐야...
나는 진짜 게이야. 울고 싶으면 울어. 내가 콧물 닦아줄게.
캬하하하하... 콧물이라니. 나 안울었거든?
내가 그냥 옆에 있을게.
우리는 그 노래를 같이 들었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서러움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끅-끅- 소리를 내며 꾹 참아도... 너무나 서러웠다.
작은 필요에도 섬세하게 반응하며 챙겨주고 도와주고
계속 관심을 쏟아주던 사람이
사랑을 고백하니 갑자기 싸늘하게 변해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다니.
이 땅에서는 순수한 것이 하나도 없구나.
모든 것이 거짓이구나.
따뜻한 미소와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데....
어처구니가 없어서 참고 참아도 눈물이 꾸역 꾸역 흘렀다.
그냥 울어. 나는 게이라니까. 신경쓰지 마.
다니엘은 서럽게 우는 내 옆에서 조용히 휴지를 뽑아주었다.
눈물인지 콧물인지 범벅이 된 얼굴을 계속 닦았지만
정말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 처럼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내 손에 금새 휴지가 한뭉치 쥐어졌다.
이리줘. 버려줄게.
다니엘이 콧물로 푹 젖은 휴지를 낚아채려고 한다.
아냐, 더러워. 내가 버릴게.
괜찮아, 그냥 줘. 으- 축축하잖아. 더럽게~
다니엘의 농담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울고 싶으면 더 울어. 괜찮아. 내가 불편하면 나 저기까지 또 걸어갔다 올까?
아니야...
한참을 울고 나니, 가슴이 너무나 시원했다.
정말 뻥 뚫린 것 같았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앉아있는 내게 다니엘이 말했다.
너 살사 출 줄 알아?
살사? 아니.
내가 알려줄게.
다니엘은 핸드폰을 만지작 대더니 살사 음악을 크게 틀었다.
그리고 내게 왼손을 내밀더니 가볍게 내 오른손을 잡았다.
오른발, 왼발, 왼쪽, 오른쪽, 뒤로, 앞으로
그는 천천히 살사 스텝을 알려주었다.
울어서 퉁퉁 부운 눈으로 부지런히 다니엘의 스텝을 보면서 따라했다.
우리는 한가한 저녁 쁠라사에서 손을 맞잡고 살사를 췄다.
엄마야, 미안.
괜찮아. 발가락 하나 부러졌을텐데 뭘.
야아~ 하하하하
다니엘은 나를 웃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아주 환하게 크게 맑게 웃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다니엘이 다시 데이트 신청을 했다.
지민, 나 3달후에 미국에 공부하러 가.
응, 전에 애들한테 들었어.
그런데... 지금 나랑 만나보면 안될까?
뭐?...
내 여자친구가 되어줄래?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때에 나는...
다시는 만날수 없을 지도 모르는, 나와 영혼이 닮은 이 사람을 단 3달만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어차피 타지에서 만나는 인연, 그냥 짧은 게 좋잖아.
둘 중 어떤 생각이었을까 나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니엘은 빈 집에서 혼자 피아노를 치는 것을 좋아했고, 외국어 배우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손재주가 좋아서 뭔가 뚝딱 잘 만들어냈고, 글쓰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주말 빈 숙소에서 혼자 악기를 연주하곤 했다.
시끄러운 클럽에서 토요일 밤을 보내는 것도 한두번이지 도저히 재미가 없었다.
외국어 배우는 게 재미있어, 영어와 일본어를 배우고 있었고,
손으로 뭔가 만드는 것을 좋아하고, 글쓰는 취미가 있었다.
내 여자친구가 되어줄래?
그게 .... 싫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다시는 못보는 거지.
다니엘을 꼭 다시 보고 싶었다. 다시 볼 수 없다면 너무 슬플 것 같았다.
빨리 이야기해줄래? 여기 모기가 너무 많아.
뭐? 모기가 많아서 빨리 대답하라고? 너- 진짜.
아니야, 농담이야. 아니, 사실이야. 얼른 대답해줘.
......
지민, 내가 싫어?
아니, 싫으면 내가 왜 너랑 같이 있겠어?
그럼?
...... 그래. 우리 만나보자.
내 대답을 들은 다니엘은 정말 환하게 웃어주었다.
다니엘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내 마음이 그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걸 느꼈던 것 같다.
우리는 3달밖에 만나지 못하지만 그 정도 인연이라면 그냥 받아들여야지.
용감하게도 그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3개월이 흐르고, 나는 말하지 않았지만 초조함을 감출 수 없었다.
다니엘,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
응?... 뭐가?
왜 나한테 계속 거짓말 하는 거야?
뭐가?....
다른 애들이 그러는 데, 네가 하는 말 다 믿지 말라고. 너 3개월 후에 미국 간다더니, 어떻게 된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말로만 미국간다고 하고, 나랑 대충 정리하려고 했던거 아냐? 전부터 네가 공부하러 간다고 이야기하고 다녔다던데.
지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다니엘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3개월전 나처럼 눈가가 빨개지면서 억울한 눈물을 쏟았다.
언제까지 내 말을 안믿을 거야? ... 지민.
내가 공부하러 간다고 이야기하고 다녔던 건 맞는데, 이번에 정말 티켓까지 끊고 파티도 했었어.
그런데 부모님한테 말씀드렸어. 못가겠다고.
왜?
네가 이틀에 한번씩 힘들어서 펑펑 울고 있는데, 여기에 나도 없으면 너 혼자 어떻게 여기에서 살아?
네가 여기에서 매일 펑펑 울고 있을 게 뻔한데, 나혼자 미국가서 공부하면 공부가 잘 될까?
다니엘은 대성통곡을 하고 울었다.
부모님이 나보고 미쳤다고 하셨어. 힘들게 준비했는데, 왜 포기하냐고.
내가 알아서 한다고 말씀드렸어. 여기에서 공부해도 된다고.
나는 다니엘을 꼭 안아주었다.
미안해. 미안해. 다니엘 오해해서 미안해. 그런 줄 몰랐어.
네가 그런 선택을 했는 지 몰랐어. 미안해, 다니엘.
다니엘은 어린 아이처럼 꺼이꺼이 소리를 내며
내게 기대서 크게 울었다.
미안해. 미안해. 다니엘. 이제 안그럴게. 오해하지 않을게.
지구 반대편...
사막같은 낯선 땅에서
거친 들풀같은 가시덤불같은 사람들 틈에서
나는 천사를 만났다.
신이 내 기도를 들어주었던 것일까?
그 천사는 내 눈물이 흐르는 시간에 항상 옆을 지켜주었다.
미소를 잃어가는 내 옆에서 나를 계속 웃게 해주었다.
그 천사는 내가 그 땅을 떠나는 그 날 바닥에 주저앉아 또 억수같은 눈물을 쏟았다.
반짝반짝 그 천사의 미소가 아직도 뚜렷하다.
천사도 분명 나의 진심을 들었을 것이다.
다시 돌아올게. 기다려줘.
천사와 나를 추격하는
검은 경찰들이 따라왔다.
그리고 우리 둘을 갈기 갈기 찢어놓았다.
천사는 항상 내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었다.
그리고 나를 따뜻하게 바라봐주었다.
언제나 근처에 어슬렁거리는 이리같은 녀석들로부터 나를 보호해주었다.
검은 경찰들은 다니엘을 붙잡아 가두었다.
그날 나는 그 문장을 경험했다.
'가슴이 마음이 갈기 갈기 찢긴다. '
하늘에 달과 해가 동시에 떠있는 것을 바라보는 이상한 기분처럼
빛나는 천사의 미소와 마음이 산산히 찢기는 고통이 함께 떠오른다.
나의 천사는 지금 평온하다.
평온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