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선(妊娠線)을 보았다

in kr •  7 years ago  (edited)

인터넷을 통해 그 사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회적 평판을 신경 쓸 연결 고리가 없는 두 남녀가 대화한다는 것은 원래 리스키합니다만 그 사람과의 대화는 정말 재밌었습니다. 서로의 언어가 마찰되는 느낌이 아무 생각 없이 혀를 맞대는 것보다 더 자극적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남자는 본 적 없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기차표를 끊고 먼 곳까지 내려갔습니다.

제법 근사한 호텔방으로 그 여자가 찾아왔습니다. 9살 짜리 애가 있는 이혼녀라는 것도, 아마 예쁘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여자는 갈색 내복으로 온몸을 둘둘 감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벗기니 두툼한 배와 선명한 임신선이 드러났어요. 추운 날씨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입고 온 것에는 이유가 있었던 거에요. 난생 처음 그것을 두 눈으로 본 남자는 그만 관계를 가지다가 물건이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임신선이란 숭고한 생명을 세상에 배출한,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자국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몸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어요. 셀룰라이트가 잡힌 복부에 그어져 있는 여러 줄의 임신선을 바라보는 것은 시각적으로 편하지 않았으니까요.

예전 아이 둘을 낳은 사촌 누나가 해준 말이 있습니다. 출산을 한다는 것은, 아무리 겉으로 티가 안 나게 꾸며도 여자로서의 삶을 돌이킬 수 없게 일정 부분 포기하는 것이라고요. 그 말이 이런 의미였구나.

인간이란 참 별 것 없는 동물입니다. 달에 사람을 보냈다고 자랑질을 한다만, 배에 난 튼살 하나 없앨 기술이 없으니 말입니다. 남자라는 동물은 또 얼마나 웃긴가요? 그 여자가 말해주더군요. 전 남편이, 네 몸이 너무 별로라 더 관계를 가질 수 없으니 앞으로는 입으로만 해달라고 말했다고. 참 유별나게 매너가 없는 인간이다만 그와 별도로 출산 후 부부 관계가 전과 같지 않은 것은 매우 일반적인 일입니다. 다른 사람 애도 아니고 자기 애를 열 달 동안 힘들게 잉태해서 낳아준 그 훈장을 사랑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보통은 더 관계를 가지지 않게 되니. 참 인간 나부랭이는 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세상 어머니들은 자녀를 위해 몸에 이런 자국이 나는 것을 감수했던 것이구나. 전쟁이 나 사람들이 우수수 죽는다는 건 이런 희생 속에 태어나 자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이구나, 내가 획책하는 것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애를 속여 이런 자국을 만들게 내 자녀를 임신하게 하는 것이구나, 저 길 가는 새초롬한 여자도 언젠가는 몸에 이런 자국이 생기겠구나.

평범한 남자들과는 다르다는 자뻑 속에 살던 그 남자는 그 혼란스러운 생각 속에 섹스가 아닌 인생의 현자 타입에 빠지고 말았답니다. 무려 이틀 동안 입에 음식을 대지 못하고 자기 방에서 칩거했다고 하네요. 본인에 대한 깊은 부끄러움과 함께 말입니다.

그 여자는 그날 새벽 잠에서 깬 아이의 전화를 받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황급히 집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헤어지기 전 짧은 인사가 서로에게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 이 글 어디에도 이 글의 필자가 경험자와 동일 인물임을 나타내는 문구는 없습니다. 물론 실화가 아니라 픽션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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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판관님 살롱에 참여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혹시나 오해가 생길 수 있어 남깁니다. 살롱의 주제와는 무관한 이야기였음을 말씀드립니다.

  ·  7 years ago (edited)

음 생각해보니 살롱 불참자들에게 오해를 안겨줄 수 있는 부분이 있겠네요. 해당 살롱 언급 부분은 수정했습니다^^

아하-반응이 좋았던,,,거였나욥??ㅎㅎ;;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엄청 놀라긴했었는데 말이죠-ㅎㅎ;;

ㅎㅎㅎㅎ 그 자리에 계셨던 몇 분은 나중에 정말 재밌는 이야기였다고 말씀해주셨는데... 사실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불쾌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겠지요, 제가 생각이 짧았던 것 같습니다, 해당 내용은 수정했습니다

  ·  7 years ago (edited)

단순히 남자는 본인에 대한 깊은 실망감 때문이고 여자도 단순 애의 전화로 떠난거라면 왜 마지막이었을까요?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일반적으로는 서로의 외적 모습에 실망해 오프하고 마지막이 되는데 서로가 외적 모습에 끌려서 만난 것도 아니고 여자도 내복 입고 '호텔' 갔다는 부분에서 외적인 미를 중요시하거나 남자에게 고고한 모습을 기대하는 것도 아닌 거 같은데. 일반적인 젊은 여자 같으면 심인성 발기부전에 연락을 끊을 법도 하지만, 초등학생 애가 있는 돌싱녀인데...

저도 모르겠습니다 ㅎㅎ 누구 이야기인지도 불분명하고
사실 어쩌면 만나는 것과 만나지 않는 것에 어떤 이유는 없을지도 모르지요...

남자가 죽은 것이 아니라 다행입니다.

그랬다면 좀 더 아방가르드적 문학 냄새가 났을지도 모르지만 ㅋㅋ 기록할 사람이 없었겠죠

왜 제 얘기를 ㅋㅋ

마법사님 이야기라고 하면 누구나 믿을 것 같네요 ㅎㅎ

글 잘 읽고 갑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뭔가 많은 생각을 하는 글이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운이 남는 글이네요~!!
조금더 생각해보면 깊고 따뜻한 사랑을 할수있을텐데 !!!

만남이라는 건 생각의 범위에 있지 않는 경우가 흔한 것 같습니다 ㅋㅋ

앗! 살롱 궁금했는데요. 후기가 별도로 없어서... 이렇게나마 일부를 접해봅니다. 이야기는 직접 경험은 아니신게죠? ㅎㅎㅎㅎㅎ 저도 임신선이 있지만, 그것에 대해 특별히 생각해본적은 없었습니다. 그저 잉태와 생산의 훈장정도로 ㅎㅎㅎ 자랑스럽죠!

에빵님 안녕하세요. 살롱 후기는 아이디얼리스트(@idea-list) 계정을 통해 포스팅을 올렸습니다. 살롱 주제와 무관한 이야기가 후기로 언급 되는듯하여 부득이하게 댓글로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ㅎㅎㅎ 사실 그게 맞는 생각이겠죠...

밑에 봄봄님 댓글처럼 살롱과는 무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정말 무섭네요... ㅠㅠ

여러모로 무서운 이야기죠

한국이 유별나게 칼로 째고 아이를 꺼내는 일이 많다고 하더군요. 위 글을 읽고보니 어쩌면 이런 관행(?)이 출생률 저하의 한 요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

ㅎㅎㅎㅎ 자연출산을 해도 임신선은 생기는 것 같더군요... 임신 시기랑 출산 직후 관리가 중요한데, 좀 바쁘고 경제적 여유가 없으면 그걸 그냥 방치하고 금방 지울 수 없는 선이 되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깊은 생각에 빠지게 하는데 충분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좋게 평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사실 불쾌하게 읽으신 분도 몇 분 계시는 것 같네요...

경험담처럼 생생한 단편소설 같네요ㅎㅎ 앞으로 쓰실 소설들도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ㅎㅎ 재밌으실지는 모르지만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죄송한 얘기지만 살롱 분들의 화들짝을 상상하고 엄청 웃었습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 옆에 계셨던 만화가 님은 매우 극찬하셨던 이야기지만... 실은 그 이야기에 뜨악한 반응을 보이셨던 분도 많았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능...ㅋㅋㅋㅋㅋㅋ 그래도 제이미님을 웃겨드려서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