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그녀가 허락했다

in kr •  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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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 글렌모렌지 시그넷을 시음한 아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는 “맛있네”라라고 했다. 그것은 허락이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한 병 주세요”라고 공항 면세점의 글렌모렌지 시음 직원에게 말했다. 그는 종종걸음으로 계산대 쪽으로 이동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술을 팔아서 그 또한 기뻤을 것이다.

이 한 병을 팔면 그는 얼마를 손에 쥘 것인가. 소정의 인센티브라도 떨어지는 것인가. 나는 알 수 없었다. 아내의 허락으로 나와 더불어 그가 기뻐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시그넷은 특별한 위스키다. 250도 고열로 로스팅한 초콜릿 몰트를 별로의 디자이너 캐스크에서 숙성한다. 셰리 오크에서 추가로 숙성한다.

이 지난한 과정이 시그넷의 독창적인 풍미를 완성한다. 나는 아직 글렌모렌지 오리지널의 맛을 모른다. 오리지널을 맛보지 못했는데, 변종부터 맛봐도 괜찮을까.

걱정은 시그넷을 시음하는 순간 알코올과 함께 휘발됐다. 원래 내가 면세점에서 사려고 했던 것은 다른 술이었다. 내가 산 것은 시그넷이었다.

거짓말 좀 보태서 여행하는 내내 마음은 짐가방에 가 있었다. 귀국해서 짐을 풀자마자 나는 시그넷부터 마셨다. 아내가 나를 보고 혀를 찼다.

시그넷 박스는 크고 단단하고 아름다웠다. 박스를 열자 시그넷이 자태를 드러냈다. 진갈색 병은 풍만한 곡선을 그리면서 상부로 올라가다가, 어깨에서 원을 그리며 꺾였다. 목이 와인병처럼 길었다.

병 중앙에 글렌모렌지의 문양과 이름을 금빛으로 새겼다. 스코틀랜드 전통 문양이라던가. 티타늄색 금속이 주둥이와 뚜껑을 장식했다. 손에 꼽을 정도로 잘생긴 술병이었다.

시그넷을 따른다. 짙은 호박색이다. 코를 박는다. 알싸한 알코올 기운이 캐러멜, 바닐라 냄새와 뒤섞여 콧구멍을 휘감는다. 아, 냄새에 취한다.

한 모금 머금는다. 민트향이 퍼진다. 찰나의 순간 상큼한 오렌지, 따뜻한 계피의 상반된 풍미가 정신없이 휘몰아친다. 혀를 따라 술이 이동한다. 목구멍이 달아오른다.

화기(火氣)가 콧구멍으로 빠져나간다. 술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다. 짭조름하고 매콤하다. 에스프레소, 다크초콜릿 맛이 난다. 피니시는 쓰고 달고 짜고 맵다. 이 풍미가 오래간다.

경험적으로 풍미가 독특한 위스키들은 온더록스에서도 훌륭했다. 의외로 온더록스 시그넷은 별로다. 매력적인 향기가 냉기 뒤로 숨는다. 온더록스로 먹기에는 아까운 술이다.

냉장고에서 생(生)초콜릿을 꺼냈다. 시그넷을 마셨다. 피니시를 음미하다가 초콜릿을 베어 물었다. 다시 시그넷을 조금 마셨다. 녹아내린 초콜릿이 시그넷과 한 몸이 됐다. 나는 기뻤다.

주류전문점에서 700㎖ 한 병에 약 35만원. 면세점에서는 160달러 내외. 알코올 도수 46도. 다시 사 마실 의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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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모랜지 여러종류를 마셔봤는데 이건 못먹어봤군요 ㅋㅋ 와이프 분이 위스키를 드신다니 저에겐 정말 꿈같은 얘기입니다

아 저희집 대장님도 본격적으로 음주하시는 건 아닙니다. 제가 마실 때 한모금쯤 드리면. 쫍쫍 하신 다음 “음 이건 이러이러 하군” 하시는 정도. 그리고 제가 “더 마실래?”하면 절레절레. 이런 식이에요 ㅋ

  ·  6 years ago (edited)

ㄷㅐ장님의 컴펌 통과. ㅎㅎㅎㅎ
글 읽는데,,,마치 향과 맛이 상상될정도로
엄청 표현력이 좋으시네요.

앤블리님 안녕하세요. 좋게 읽어주셔서 영광이옵니다.

시그넷 아름답네요
꼭 한번 시도 해보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번 드셔보셔도 좋을 술이에요.

모습이...아까워 못 마시겠는데요
과감 하시군요 ~~~부럽
전 장인댁에 소주 나시라 갈께요
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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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간이 부었나봅니다 ㅋㅋ 소주 한잔 하셨나요?

저도 위스키 맛있게 먹고 싶네요
양주는 딱히 맛을 몰라서
자주마시면 맛을 알까요?

그럼요. 집에서 혼자 음미하시기를 추천합니다. 밖에서 부어라 마셔라 하면 그 맛을 알기 어렵지 않나 싶어요. 너무 비싸지 않은 놈들로 시작해보셔요!

도전 해봅니다~

얼마전에 정말 비싼(얼마인지 잘 모름..) 위스키를 한잔 마셔볼 기회가 있었는데...
완전 신세계더군요..ㄷㄷ 40도가 넘는 술이 그렇게 부드러울 줄이야..
이 술도 정말 마셔보고 싶습니다..
와인에 위스키까지 좋아지면 술값이..ㅠㅠ

미술관님...응원합니다!

술값이... ㅠㅠ

위스키는 저렴이는 저렴이대로, 비싼 놈들은 또 그놈들대로 제각기 맛이 있어서 좋더라고요.

물론. 비싼 놈들이 대개 맛있죠. 무서운 진리 ㅋㅋ

그 정말 비싼 위스키 무엇었을지. 맛은 또 어떠하였을지. 궁금합니다 ㅠㅠ

확실히 주류에 붙는 세금이 많은 모양이군요.
가격 차이가 좀 나네요.
비행기 탈 일이 있으면 사는 걸로 해야 겠습니다.

네네 기회 있으면 한 번 드셔보세요. 독특하고 매력적인 녀석입니다.

아 술 끊고 지금까지도 진짜 안 땡기는데, 왜 막상 마신 이야기는 간접체험처럼 좋을까요. ㅎㅎ

저도 대리만족 ㅋㅋ

미네르바님도 끊으셨나요? ㅎㅎ

끊어야지 말만하고 못 끊고 있습니다 ㅎㅎ 오랜만에 답글 다네요 ^^;

아 술 끊고

예전에 끊을 거라고 하셨던 거 기억나요. 아직까지 금주 중이라니. 무서운 사람...

저는 수백회의 금주 다짐에 실패한 후로 다시는 술 끊겠단 소리를 안 한답니다 ㅋ

다시 사 마실 의향이 있다.

이 문장 오랜만에 보는 듯 하네요.
제가 라산타는 마셔본 적이 있는데, 그때는 무슨 술인지도 모르고 마셨다는...

아아 우리는 때로 좋은 것이 좋은 것인줄 모르고 흘려보내곤 하지요. 언젠가 더 귀한 술 드실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땐 맛있게 드시는 걸로!

오리지널과 시그넷은 가격차가 크네요 저는 오리지널은 마셔보고 시그넷을 못마셔봤어요ㅋㅋㅋ 시그넷 부럽습니다

잔기술 부리는 건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음 이거 먹곤 생각이 좀 달라졌어요. 맛있어요. 색다르고. 좋아요 ㅋㅋ

!!!!! 짧은 일정으로 사케를 한아름(?)안고 돌아오는 남편을 오매불망 기다리고(여기 지금 4시 26분이예요.) 있었는데, 새로운 괜찮은 술이라뇨?!!!!!

세관원! 세관원!

...

장난입니다... 사케 드시다보면 시그넷 잊으실 거에요. 알딸딸

이나라는 의외로 인당 5L의 주류, 또는 24캔의 맥주 반입이 가능합니다. ㅋ

조...좋은 나라다...

유럽 다녀올 때 좋아요 ㅋㅋㅋㅋㅋㅋ

좋은거 드셨네요

ㅋㅋㅋ 다 레드님 덕분 아니겠습니까

그럴리가요~~!!!!!!

나는 기뻤다.

크... 진정성...

ㅋㅋ 숨길 수 없는 진심

#weboss 태그에 감사드리며 ,

위보스는 즐겁고 품격있는 술 문화를 만들고
더 좋은 술을 스티미언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지지하겠습니다.
@afinesword 님의 양질의 글에 감동받아 위보스에서포스팅을 리스팀 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

아아 리스팀까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