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닻을 보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사이에 진영의 몸속엔 아버지의 커다란 닻이 깊숙하게 박혔다. 갈고리 모양을 찾을 수 없다. 진영은 포기하고 바닥에 앉아 발끝에게 묻는다.
"너는 그 속에서 무얼 기다리니? 내 대답을 듣고 싶니?"
진영의 심장엔 어머니의 닻이 없다. 그 모양을 보지 못해 그릴 때마다 제각각이다. 셀 수 없이 변해버린 그 닻은 바닥에 닿지 못했다.
"넌 어디서 어떻게 매달려 있는 거니? 행복하니?"
진영은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본다. 웃고 있는 얼굴 위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다시 넘기다 포기하고 웃는다.
진영은 행복하다. 행복할 때 우는 게 가장 좋다고 정희에게 말한다. 정희는 진영과 10년을 함께 살았어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오빠는 사람에게 거는 기대가 너무 커서 문제야. 그 사람들이 오빠한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 거야?"
"난 사람에게 쉽게 기대하지 않아. 의심부터 해서 늘 문제였지."
"아니야. 오빠는 맹목적이야. 이상할 정도로 기대하고 상처받고 아파해."
"맹목적인 대상은 있지. 하지만 그들이 먼저 나에게 맹목적이었어. 믿을 수밖에 없어. 기대하지 않고 배려한다고 생각해 난 그들을."
"그렇게 힘들어하는 이유는 뭐야. 기대해서 잖아. 안 그래?"
"안 그래. 닻은 다시 올리면 돼. 그뿐이야. 난 그렇게 떠날 수 있어. 기대라는 말 자체가 내 머릿속엔 없어."
진영은 집 앞에서 넘기기 힘든 소주 한 잔을 손에 들고 있었다. 검붉은 얼굴에도 눈빛은 빛났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는다.
"형이 아는 내가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형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충격적인 놈일 수 있거든."
"진영아, 형이 널 보고 지낸 지 10년이 넘었어. 형이 한 회사에서 인사 업무부터 총무까지 15년이야. 너는 내 후배였으면 벌써 여러 번 맞고 울었다. 너처럼 할 말 다 하고 어떻게 살아. 그런 사람 드물어."
"형, 난 정직하지 못해. 형이 들으면 싫어할 걸 알기에 말하지 않는 것뿐이야. 난 여러 모습으로 살아. 동창들이 기억하는 나와 가족이 판단 내린 내가 달라. 군대에서 살았던 나와 회사에서 내 모습은 더 달라. 어둑한 때 거울을 볼 때면 진짜 얼굴이 무어냐고 묻는 게 나야."
"그렇게 살면 미치지 않니?"
"나의 모습을, 진짜 얼굴을 아는 사람이 한 명은 있으니까. 그래서 버틸 수 있어. 한 명 있어. 다행이지?"
진영은 어릴 적에 식당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두려운 일 중에 하나였다. 진영의 아버지는 식당엘 갈 때마다 진영에게 주문을 시켰다. 진영은 모르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진영의 아버지는 그런 모습을 싫어했다. 용기 없음을, 낯가림이 심한 진영을 정말로 못마땅하게 여겼다.
"커서 사회생활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 여기 밑반찬도 더 달라고 해. 일어나서 주방에 찾아가서 말하고 오란 말이야."
진영은 눈물이 많다. 평생을 울어도 마르지 않는 것이 눈물이라고 믿는다. 진영은 너무 기쁠 때도 울고, 슬퍼도 울고, 옆 사람이 앞사람이 울어도 운다. 울 때는 고개를 당당하게 들고 힘차게 운다.
"민지야, 울지 마. 울어서 해결되는 일은 없어. 운다고 누가 도와주지 않아."
"아빠는 울잖아. 영화 볼 때도 울잖아. 아빠도 울면서 왜 나한텐 울지 말라고 해"
"오빠는 왜 자꾸 애한테 울지 말라고 해. 얼마나 답답하겠어. 불쌍하지도 않아? 울어 민지야. 펑펑 울어."
...닻을 만지다
진영은 열아홉 살에 처음으로 고백을 했다.
"말로 하지 못할 것 같아서 글로 써왔어. '보통 사람들이 거절당할 것이 두려워서 솔직하게 좋아한다고 표현하지 못한다네. 나도 두렵더라. 그래도 오늘은 꼭 이렇게 읽고 싶었어. 네가 너무 좋아서 손잡고 싶어'라고 써왔어. 내가 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돼."
"생각할 시간은 있는 거지? 집까지 데려다 줄 거지? 집 앞에서 대답할게. 괜찮지? 그 정도는 기다려 줄 수 있지?"
진영은 민정과 만나려고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했다. 밤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엘 가고 싶다고 했다. 집이 아닌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진영의 고개는 이번에도 발끝을 향해 있었다.
"너 나랑 살 거야? 결혼할 거야? 다른 여자 안 만날 거지? 난 너랑 밥 먹으면 이상하게 할머니가 생각난다. 이상해."
"할머니는 여성 아니니? 난 남자거든."
"그러니까 이상하다고. 특히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이 어쩜 우리 할머니랑 그렇게 닮았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야."
"우는 눈은 비슷하지 않을까? 눈동자가 다르게 생긴 건 아니잖아?"
진영은 민정과 2년 만에 헤어졌다. 진영과 민정은 다른 지역으로 대학엘 갔다. 진영은 영화관에 혼자 갔다. 민정에게 자랑처럼 이야기했다. 아무렇지 않게 혼자 영화 보는 남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민정이 그 소리에 웃으면 진영은 슬펐다. 외로움은 불쑥 찾아왔다.
"누나, 후배랑 만나면 안 돼요? 그렇게 하면 큰 일 나는 거예요?"
"진영아, 나 4학년이야. 곧 교생 실습도 나가야 하고 취업 준비도 해야 해. 시험 준비할 시간은 턱 없이 부족해. 자신이 없다."
진영은 선영은 자주 다퉜다. 진영은 선영이 신기했다. 선영의 말투와 몸짓, 버릇까지 항상 흉내 냈다.
"누난 매일 실수하고 누군가 옆에 거 안아주고 감싸줘야 하는 사람 같아"
"바보란 얘기지?"
"이것 봐. 못 알아듣잖아. 귀엽다고."
선영은 졸업을 앞두고 학교에 자주 오지 못했다. 진영은 선영이 없는 술자리가 즐겁지 않았다. 선영의 전화만 기다리다 술에 취했다. 선영은 술에 취한 진영을 찾아다녔고 싸웠다. 진영은 선영과 대낮 카페에서도 싸웠다.
"우리 예전처럼 다시 안 되겠지?"
"그럴 거 같아."
진영은 선영이 간 뒤 편지를 열었다. 몇 장의 편지 위에 눈물이 지문처럼 남아 있었다. 진영은 또 울었다. 소리 내서 울었는데 창피하지 않았다.
"야, 1학년 애들이 우리랑 주말에 밥 먹는 게 쉬운 일인 줄 아냐? 그리고 태연이가 무조건 너 데리고 나오라고 하더라. 너 좋아하나 봐. 대학로 오후 2시다."
"내가 지금 누굴 만날 때가 아니다. 6개월 뒤에 입대야 병신아."
"군대 가면 다 헤어지냐? 잘 보여서 편지라도 써달라고 매달려 진짜 병신아."
진영은 태연이 싫었다. 진영은 심장이 빨리 뛰어야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심장이 뛰지 않았다. 태연은 졸업한 선영의 후배다. 그게 더 싫었다. 만나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마음먹었었다.
"선배는 내가 싫어요? 아니면 여자한테 관심이 없어요?"
"아니, 관심 많아. 그런데 너는 여자로 보이질 않아."
"선배처럼 얘기하는 사람 숱하게 봤거든. 다 여자로 보더라."
"난 진짜야. 귀찮아. 솔직히 너. 하나만 묻자. 내가 왜 좋아?"
"나도 그걸 모르겠어. 그래서 너무 답답하고 짜증 나."
진영은 겨울에 군대엘 갔다. 일주일마다 내무반으로 4~5통씩 편지가 날아왔다. 한 통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날아다니는 편지를 움켜쥐었다. 진영은 울음소리를 조여가며 울었다.
"헤어지자."
"오빠 혼자 헤어져. 난 혼자 계속 사귀면 돼"
"헤어지는 거다."
"그래, 혼자 잘 이별해. 내일 편지에서 보자. 잘 자."
진영은 정희를 보고 생각했다. '이런 여자와 결혼이라는 걸 하는 걸까'
"생각해봐. 나는 매일 이 집에서 자고 출근한다. 너는 여기서 출근하다가 가끔씩 내 집에서 자고 간다."
"무슨 말이야?"
"아깝지 않니? 집세도 양쪽 주인집에 내고 있는데 여긴 강남이고 나는 홍대야. 택시비가 좀 많이 나오니?"
"그러니까 오빠 집에 가서 자라고 했잖아. 수십 번 이야기했다."
"같이 살자. 한 집에서 돈 아끼자. 어차피 결혼할 거니까. 맞지?"
진영은 정희의 어머니를 찾아갔다.
...닻을 내리다
진영은 정희와 함께 민지를 안았다. 민지는 진영을 닮았다가 정희를 닮았다가 그렇게 컸다. 민지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추운 등굣길인데 민지는 웃는다.
"아빠, 아빠 엄마 이름은 뭐야? 나는 친할머니가 없어?"
"어. 친할머니는 없어. 그 대신 고모도 있고 고모부도 있잖아. 외삼촌도 외숙모도 있네. 엄청 많네 가족이."
"이혼했어?"
"민지야, 이혼은 부끄러운 게 아니야. 엄마 아빠도 같이 살다가 이혼할 수 있어.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엄마 아빠가 매일 뽀뽀하고 껴안는 거야."
"엄마 말이 맞아. 아빠 할아버지랑 할머니는 아빠가 너보다 어린 네 살에 헤어지셨대. 지금은 아빠의 첫 번째 누나랑 같이 살고 계시다고 하더라. 아빠도 부산 고모한테 들은 거야."
"학교에서 가족 그림 그렸는데 아빠 할머니는 내가 마음대로 그렸어. 이쁘게 그렸으니까 너무 섭섭해하지는 말고."
진영은 지옥 같았던 고속도로에서 벗어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천안 휴게소예요. 30분쯤이면 도착할 거 같아요. 별로 안 막혔어요. 휴게소에서 간단하게 먹을 테니까 먼저 점심만 챙겨 드세요."
"무조건 서두르면 안 돼. 그리고 일 차선으로는 절대 운전하지 말아라. 아무리 조심해도 저쪽 차선에서 넘어오는 미친놈들 차는 못 피해. 끝 차선으로 다니란 말이야."
"알아요. 그렇게 운전하고 있어요. 좀 있다가 봐요."
여든 살을 훌쩍 넘긴 진영의 아버지는 한쪽 다리를 전다. 교통사고 후유증이다. 진영의 아버지가 받은 합의금이 진영의 대학 졸업장을 위한 대가였다는 걸 진영은 아직까지 모른다.
"담배 한 대 피우러 가자."
"예술하는 사람들은 담배 안 피우면 안 되는 거지? 담배를 아직도 못 끊으면 어떡해. 매형이 걱정 안 해?"
"야, 나 담배 니 매형이 가르쳐 준 거야. 알지도 못하면서 나불대지 말고 음식물쓰레기 들고 따라와라."
"후~우~. 내일 아침에 봉투 하나 줄 테니까. 정희 어머니 갖다 드려. 얼마 전에 환갑 맞지?"
"누나가 봉투까지 하면 부담스러워하실 텐데. 말 잘 전할게. 넣어둬."
"아니야 이놈아. 내가 미안해서 그래. 너같이 사람 같지 않은 사위한테 너무 잘 해주셔서 감사하고 미안해서 그래. 나중에 전시할 때 한 번 꼭 모시고 와."
"부끄럽네. 누나는 벌써 결혼 24년 차인데. 난 매형에 부모님 챙겨본 적이 없네. 돌이켜보면."
"앞으로 잘하고 넌. 특히 장모님한테 잘해야 해. 들어보면 너한테 보통 잘 해 주시니? 살아보니까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줄 줄 알더라. 너나 나나 사랑받은 사람들 옆에 두고 살아서 이 만큼 사는 거야."
진영은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들에게 편질 쓰고 포장한 선물을 건네는 게 좋았다.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두려웠지만, 싫다는 감정보다 미안한 감정에 더 가까웠다. 모르는 음식점 가게 아주머니가 귀찮아할까 봐 주저했다. 진영의 아버지는 그렇게 편질 쓰고 포장하고 선뜻 말을 건네지 못하는 아들이 영 못 미더웠다.
"민지야. 아빤 항상 혼자였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했어. 몰랐거든. 아빠는 아빠 할아버지하고 아빠 누나한테 정말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란 거 있지? 몰랐었어. 아빠 할아버지랑 누나가 아빠한테 고백했어. 아빠를 정말 너무 많이 사랑했고 사랑한다네. 부럽지?"
진영은 그제야 닻을 내렸다.
다음 회 기대할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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