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를 권력화하는 인문학자

in kr •  7 years ago 

아직도 뉴비 @armdown 철학자입니다. 평소에 갖고 있던 생각 하나를 포스팅합니다.

미리 결론: 인문학 관련해서 글이 어려울 때는, 쓴 사람이 모르고 썼다고 의심하면, 대충 맞다.


어느 학자의 밀을 빌려 글을 시작하겠다.

"인문학자들이 남에게 빌려온 글을 높이 받들면서, 우리말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매우 오래된 고약한 버릇이다. 이들은 이렇게 하는 것은 밖에서 빌려온 낮선 낱말, 문장, 지식 등을 써서 말을 권력의 도구로 삼으려는 까닭이다. 이들은 입으로 소통을 말하면서도,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써서, 사람들을 무식한 상태로 몰고 가서 누르고 부리려 한다. 사람들이 이런 식의 인문학을 외면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인문학이 널리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학자들이 남의 말을 빌려와서 누르고 부리는 도구로 삼는 버릇부터 고쳐야 한다."(최봉영)



나는 물론 모든 글과 말이 다 쉬울 거라 기대하는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글의 경제성이라는 것도 있어서, 굳이 길게 풀어 쓰지 않더라도 전달 가능한 경우 짧게 쓰는 것을 선호하며 당연시한다. 또한 개념과 일상어의 간극에 대해서도 그 어쩔 수 없음을 심각하게 고려한다.

문제는 이런 기본적인 조건들과는 무관하게 어렵게 실행되는 언어활동인데, 이는 본인이 잘 알지 못하면서 말하는 경우이거나 아니면 현학 취향에서 비롯된 것이라 본다. 이태수 선생은 '쉬운 말'을 늘 강조하셨는데, 이는 그 분의 지력(知力)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넘쳐나기에 가능한 태도였다. 두 부류의 사람이 있는데, 쉬운 말을 두고 어렵게 쓰는 사람과 어려운 것을 쉽게 말하는 사람이 이들이다.

삶과 세상의 깊이는 어려운 말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삶의 터전에 뿌리를 둔 언어에서 시작할 때 인문학은 넓어질 수 있으리라. '외계어'라는 것이 뭐 별거겠는가. 쉬우면서도 깊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인문학자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바이다.

내가 쓴 책의 한 대목을 통해 하려는 말을 대신하겠다.

이 지점에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나는 외국어로 된 여러 철학 책을 한국어로 번역했고, 꽤 많은 학생들 및 시민들을 상대로 철학 강의를 해왔어요. 이 과정에서 가장 문제라고 느낀 건 철학과 일상적 삶의 괴리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철학이 삶의 문젯거리들을 대상으로 삼지만 철학 용어들은 지나치게 현실 언어와 동떨어져 있다는 거예요. (...)

철학을 조금 더 접한 사람은 ‘사유思惟’라는 말이 있지 않느냐고 되물을지도 모릅니다. 데카르트가 사용한 원래 의미를 따르면 ‘사유’와 ‘생각’은 전혀 차이가 없어요. 그렇지만 한국어에서 ‘사유’는 ‘생각’과 달리 일상에서 떨어진, 뭔가 특별한 사람들의 행위인 것으로, 아니면 일상인에게는 특별한 계기에나 찾아오는 비일상적인 일로 느껴질 뿐입니다. 우리가 늘 생각하며 살고 있다는 점을 가리는 독특한 은폐 효과를 낳고 말아요. ‘사유’가 ‘생각’을 가려버리는 겁니다. 가령 ‘생각 없이 산다’라고 하면 부정적 어감이 있지만, ‘사유하지 않고 산다’라고 하더라도 일상적으로 부정적인 느낌을 주지는 않거든요.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같은 불교 유물에서 확인되듯이, 사유’라는 말은 이미 벌써 뭔가 특별하고 전문적인 활동을 가리킨다고 여겨지고 있어요. (...)

기존의 철학 용어를 사용해야 깊은 생각에 이르는 것도 아니고 일상어를 쓴다고 그게 보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최소한 지금까지의 철학적 작업이 이룬 성취를 최대한 일상 언어로 표현할 때에만,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기만 하다면 일상어를 통해서도 철학적 성취의 열매를 나눠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이렇게 한다고 쉬워지란 법은 없어요. 생각의 깊이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하니까요. 그러나 생각을 열어놓는 것이 사유의 울타리를 치는 것보다는 좀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짚고 싶은 대목은, 왜 ‘생각’이라는 평범한 말 대신 ‘사유’라는 어려운 말을 철학계에서 선호할까 하는 점이에요. 물론 단순히 관습 때문일 수도 있어요. (...) 아니면 권위 때문일 수도 있어요.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는 말을 쓰면 구획과 권위를 잃을 위험이 있겠지요. 그래서 전문어를 사용함으로써 ‘구별 짓기’를 하는 거죠. 법조계는 법조계대로, 의료계는 의료계대로, 또 다른 학계는 그 나름으로, 심지어 노가다 판에선 노가다 판대로… 나름의 전문어를 씀으로써 대중의 섣부른 도전에서 자신을 지키려는 거죠.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것을 피하려는 목적도 있는 거라고 좋게 봐줄 여지도 있어요. 하지만 대개는 자신의 영토(일본어로 ‘나와바리’라고 하죠)를 지키기 위해서인 경우가 더 많아 보여요.

  •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동아시아, 2017) 101~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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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읽었습니다. 과거 슬라보예 지젝의 <시차적 관점>을 펼쳤다 이내 책을 덮었던 기억이 나네요. 아직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습니다. ㅎㅎ 자크 데리다의 <법의 힘>도 그랬고요.
일상어와 개념어의 간극을 말씀하셨는데요. 저도 어느 정도 동의는 합니다만, (형이상학은 차치하고) 개념어도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말일 터인데, 너무 돌려 말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예를 잘 안 들죠. ㅎㅎ 물론 (@armdown님을 포함하여) 그렇지 않은 철학자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네, 빙빙 돌려 말하는 것과 예를 들지 않는 것, 두 가지는 치명적이지요.
안 그래도 '법의 힘' 서평을 써놓은 게 있어서 포스팅 준비 중인데, 제가 읽어도 너무 압축적이라서 ㅠㅠ (암튼 올리긴 할 겁니다. 해설이 하나 더 필요할지도...)
그리고 철학에서 '예시'에 관해서도 써놓은 글이 있어서, 조만간 올릴 생각인데요.
흠... 그러고 보니 댓글이 너무 영양가가 있어서^^ (미미하지만 보팅을 해야겠네요.)

펴자마자 덮었던 책(법의 힘)이 생각나 언급했는데요. 서평 쓰신 게 있다니 반갑네요. ㅎ 보팅과 답변 고맙습니다. ^^

동의합니다. 정보 격차를 통해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려는 잘못된 행태라고 생각합니다. 무릇 지식인이라면 대중의 이해를 넓히는 것을 목표로 지성을 갈고 닦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팀잇이 지식 교류의 창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참.. 이 언어라는 것이 권위의 상징이기도 하죠.. 예전 조선시대 때 양반들끼리 사용했던 언어도 그렇고.. 구튼버그 활자가 생기기 이전에 신부들만 성경을 읽었던 것도 그렇구요.. 그런점에서 정치학적으로 한글창제가 기득권에게 얼마나 위협이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죠..ㅎㅎ

그래서 언어는 권력이지요.
요즘 스팀잇 kr 커뮤니티의 활성화도 언어 관점에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더라구요.

맞습니다. 자기가 이해 못할수록 말은 더 어려워지는것 같아요.

어지간한 주제는 중학생 정도면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언어 장벽이라는게 정말 높긴 높습니다. 어딜 가든 언어가 눈앞에 떡 하니 놓여있네요. 블록체인도 처음 알아볼때 당최 무슨말인지 알 수 없는 단어들 뿐이었죠. 특정 역영에서 자신들끼리 언어를 사용하다보면 사투리마냥 전문용어가 생겨날 수는 있다고 보지만, 일상어와 괴리되지 않게 용어를 다듬어 만들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적어도 '설명할 때'만큼은 일상과 괴리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그것도 잘 못하는 것 같아요.

저도 철학책, 인문학책에서 사유라는 말이 나와서 사전적인 의미를 찾아 본 적이 있어요. 한페이지 넘어가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여전히 그런 상태인지라..스스로의 지적 수준이 부족한 걸로 결론 내렸어요.
뭔가 심오한 뜻이 있다는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을 담고 있어서 그런 표현을 했을거란 생각이 들지만,, 그런 단어나 표현이 너무 많으니 그런류의 책을 멀리하게 되기도 하구요. 그런데 막상 원서에는 그렇게 별다른 의미는 아니라고도 하더라구요.

@armdown 아름다운 님의 글을 읽으니 살짝 위로도 되고 용기도 나네요. 감사합니다.

맞습니다. 어려운 말로 포장해서 들키지 않으려는 술책이죠 ㅠㅠ
힘 내세요.

  ·  7 years ago (edited)

월급받는 사람들이 쓰는 글들이라 그렇지 않을까요 ㅎㅎ 너무 대중적인 것도 문제긴 하지만 아무도 안 읽는 글을 써서 먹고살아야 한다면 생각이 달라질 듯..

그런 측면도 있습니다.
월급을 주는 측이 문제죠.
결국 대학과 학계가 사회와 괴리된 게 문제의 시작일 거예요.

옛날부터 언어는 권력의 상징이었죠. 과거 세종대왕이 글을 모르는 백성들에게 훈민정음을 반포하려 하자 가장 겁내고 반대한 것은 당시 기득권을 잡고 있는 양반들이었고, 한글이 퍼지기 시작하자 기득권은 그들만이 쓰던 한자로 권력을 공고히 하려고 했지요....

결국 지금도 그때와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의학은 한자. 법학도 한자. 서양의학은 영어. 대중들이 모르도록 언어를 최대한 어렵게 꼬아놓고...

그게 어찌나 안 좋아보이던지...

그런데, 지금은 또 제가 알고 있는 지식을 너무 쉽게 풀어내면 이게 또 가치가 절하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고. 이중적인 마음이 드는 것 같습니다. 혹은 아직 제가 충분한 내공이 없는 상태라 그러한 것이 불안한가 봅니다.

'생각의 가치'가 스팀잇의 기치입니다.
누구나 나눌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것이 글 쓰는 사람의 태도여야 한다고 봅니다.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언어는 모두가 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도구이지만 가끔(혹은 매우 자주) 말씀하신대로 권위를 위해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팔로우하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네, 권위를 발휘하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요.
고맙습니다.

공감합니다! 보팅과 팔로우하고 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법원 판결문 볼 때마다 느끼는 거죠.
참...

그나마 최근에는 많이 나아졌지요.
지난 번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탄핵 결정문도 참 편했더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