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는 항상 연결되어 있다 (서평: 김승섭, '아픔이 길이 되려면')

in kr •  7 years ago 

안녕하세요. 아직은 뉴비 @armdown 철학자입니다. (armdown은 '아름다운'입니다. '팔 내려'가 아니에요.)

지난 추석 연휴 때 썼던 독후감을 하나 올려봅니다. 작년 최고 화제작이었기 때문에, 이미 많은 서평들이 나왔지만, 나름 다른 서평들이 나오기 전에 쓴 독후감이기도 합니다. 책을 읽지 않은 분께는 약간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너무 자세하게 소개하면 책을 안 읽어도 된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어서...

해당 도서: 김승섭 지음, '아픔이 길이 되려면', 동아시아, 2017


지난 여름 내내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를 쓰느라 아파진 몸을 추스르며, 어떻게 해야 이 아픔이 길이 될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 유례없이 긴 추석 연휴를 틈타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읽었는데, 이런 아픔과는 다른 아픔을 다루는 책이었다, 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는데...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내가 결코 쓸 수 없는 종류의 책이다. 자신을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어쩌면 자신을 말해 본 적이 없어서 더욱 말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의 말문을 틔워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데이터를 쌓는 그런 포근함이 내겐 없다. 막연하게는 그러리라 짐작하고 있지만 실증적 증거는 제시하기 힘든 주제와 관련해 필요한 데이터를 만드는 법을 설계할 인내가 내겐 없다. 다행히도 김승섭 교수는 포근한 감수성과 꼼꼼한 인내로 내가 알고 싶어 하는 데이터를 가려 한 권의 책으로 묶어주었다. “저는 그들[세월호 생존 학생들]을 친구가 아니라 연구자로서 만나고 있었고, 제게는 그 마음을 표현하는 게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울컥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꾹꾹 누르고, 머리를 차갑게 하고 귀를 계속 열고 준비한 질문을 말해야 했습니다. 저는 기록해야 했으니까요. 그 기록은 무겁고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163~165쪽)

푸코가 정신병이나 감옥을 연구한 결과물을 들뢰즈가 이어받아 발전시켰듯이, 이 책은 앞으로의 내 연구에 좋은 데이터 될 것이다. 우리 사회의 아픔에 대한 역학epidemiology 연구라는 중요한 1차 자료를 제공해 준 김승섭 교수께 깊은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내가 이 짧은 독후감의 제목으로 삼은 “부조리는 항상 연결되어 있다”는 말은 책 183쪽에 나온다. 지은이는 4장에서 ‘우리는 연결될수록 건강하다’는 주장을 입증하는 데 바치는데, 나는 삐딱하게도 반대되는 표현에 눈길이 갔다. 우리가 연결되지 못하게끔 하는 원인을 ‘부조리’로 칭할 수 있다면, 그 부조리의 연결을 폭로하고 타개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일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지은이의 연구 태도는 두 가지 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먼저, 보건의 관점에서 치료보다 예방이 중요하다는 관점. “순수과학과 달리 공중보건에서 판단을 미루는 것은 여러 위험 요소로부터 현재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결정을 뜻합니다. 적절한 데이터나 과학적 연구가 부족하다는 것을 핑계나 변명으로, 더 나아가 특정 입장을 옹호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80쪽)

둘째, 아픔을 야기한 사회적 원인(“병의 원인의 원인”)이 해소되어야 참된 치료가 이루어진다는 관점. “트라우마에 대한 많은 연구는 인간의 몸에 상처를 남기는 과정에서 트라우마를 초래한 사건 자체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 사건의 의미가 해석되고 재생산되는 사회적 환경이 외상을 구성하는 핵심요소라고 말합니다. 그 고통을 초래한 사회적 원인이 밝혀지지 않고, 자신이 겪는 고통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을 때 트라우마는 더욱 확대 재생산되는 것이지요.” (175쪽)

지은이가 살핀 ‘아픔’의 범위는 암, 심장병, 당뇨 합병증 등 몸이 직접 앓는 병 말고도 우울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불안장애 등 정신질환, 나아가 사망률, 기대수명 증감, 자살 같은 현상까지 포괄한다. 연구가 향하는 지점은 분명하다. 사람이 아픈 원인을 추적하면 개인적 요인과 사회적 요인이 있는데, 지금까지 개인적 요인에 초점을 맞춰 진단과 치료가 행해졌다면, 그에 못지않게, 또는 더 중요한 사회적 요인을 주목해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라스베이거스 총기 사건(미국 내 총기 사건은 그 빈도와 크기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한 다음 진술은 시사적이면서도 시의적절하다. “살인사건 하나하나는 개별적인 배경과 상황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면 시카고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에 비해 ‘살인’을 방관 혹은 조장하는 공동체입니다.” (276쪽) 총기 규제가 이루어지 않는 사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예견이다.

나는 4장에 언급된 ‘로세토’ 마을 사례가 중요하다고 본다. 1935년에서 1964년까지 이 마을은 다른 조건은 거의 같았던 인근의 ‘방고’ 마을에 비해 ‘공동체의 힘’이 작용해서 심장병 사망률이 절반도 안 되었다. 공동체가 개인을 보호해준다는 믿음이 건강에 힘이 되었다는 것이다. 충분히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그러나 미래를 로세토 마을 사례에 기반해 설계할 수 있을까?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유명한 책 '오래된 미래'에 등장하는 ‘라다크’는 어떨까? 사실 로세토 마을은 1965년 이후 급격한 변화를 겪으면서(자본주의 침투, 개인 삶 우선시, 젊은이들의 이탈 등) 심장병 사망률이 방고와 비슷해졌다. “로세토 사람들은 1940년에 비해 심장병 사망률이 1970년에 대략 2배 가까이 증가”(295쪽)했다.

그렇게도 살기 좋던 로세토도 라다크도 자본주의화 또는 미국화의 흐름에 저항할 힘이 없었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어떤 대안을 만들 수 있을까? 사회역학은 정치적 해법을 찾는 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이런 해법은 국내 상황의 변화를 통해 얼마간 찾아볼 수 있다. 허나, 자본주의는? 국가와 정부를 가로지르며 힘차게 뚫고 들어오는 그 부조리의 연결망은?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건강을 찾기 위해 현 단계에서 우리가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문제와 우리가 완전히 새로운 발상을 해내야만 돌파할 수 있는 문제를 함께 보여준다.

사실 지난겨울의 촛불혁명과 봄의 정권교체가 아니었다면, 나는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를 쓰지 못했을 것이다. 일련의 사회적 문제들이 풀려가는 (현재 진행 중인) 과정에서 개인적인 스트레스의 정도는 급감했고, 나는 내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사실 나도, 내 식구도, 주위의 지인도, 어떤 아픔을 함께 겪었고,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우리가 그렇게 겪은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인시켜 주는 중요한 성취이다.


  • 아래는 내용 중 일부와 관련된 메모.
  • 2장 중 위험한 일터는 가난한 마을을 향한다에는, 자본주의와 기업이 주체로 기능한 대목과 국가와 정부가 주체로 기능한 대목이 뒤섞여 서술되고 있는데, 사실 잘 구별되지 않는 면이 있지만 ‘자본주의와 기업’ 쪽에 책임이 있다고 파악하는 것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듯.
  • 265~266쪽에 언급된 프레이밍햄 연구와 관련해 두 가지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데, 그것 말고도 사회적 관계망 대부분이 ‘부모, 형제, 자녀 등의 일촌 관계’였다면 유전적 특질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비만 정도가 공유된 것은 아닌지 하는 궁금증이 어떻게 해소될지?

  • 밑줄 긋기.
  • “갈등을 대하는 자세가 한 사회의 실력이다.” (188쪽)
  • “한 사회의 감수성이고 실력”(184쪽)
  • “피해자 개인에게, 자원과 자본이 없는 사회적 약자에게 인과관계 증명의 부담을 떠넘기는 한국사회의 취약함이 세월호 참사에서 극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185쪽)
  • “한국사회의 구성원이 된 이민자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지킬 줄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과연 한국사회가 세계화 시대에 구성원으로서 자격이 있는지 되묻게 됩니다.” (238쪽)
  • “인권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공동체의 수준은 한 사회에서 모든 혜택의 사각지대에 놓인 취약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고요.” (249쪽)
  • “총기가 있다는 이유로 자신의 대응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총이 없었다면 피했을 위험한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많아지는 것입니다.” (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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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 기사중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만성화된 경기 침체와 불확실한 미래, 열악한 사회보장제도 등의 사회 환경이 암호화폐 거품을 일으키는 비옥한 토양이기 때문이다. 암호화폐를 거래하는 국내 인구가 무려 300만 명 이상이라고 한다. 이들이 모두 인지적 판단력을 잃은 소위 '도박병' 환자일까. 다른 대안적 방법이 있는데 평생 모은 재산을 비트코인에 '몰빵'하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300만 명이나 있는 것일까. 그럴 리 없다.

보통의 노력과 보통의 운으로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을 살지 못하는 사회라면, 비트코인 사태는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 9급 공무원 합격이 과거 급제처럼 기쁜 일이 되고, 정규직이 되는 것이 대단한 성취가 되어 버린 사회다. 비트코인에 매달리는 사람 대부분은 일확천금을 한 뒤 고급 요트를 타며 여생을 보내려는 것이 아니다. 대출을 청산하고 작은 집 하나 가지면 만족할 소시민이 대부분이다. 그 '시시한' 소망마저 이루기가 너무 어려워진 세상이다. "

단순히 병리학적인 문제를 떠나, 사회적으로 유리 천장을 뚫어낼 희망이 사라지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또 다른 부조리와 고통의 시작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촛불혁명을 통한 정치구조의 개혁은 이렇게 '부조리'에 억눌린 사람들이 일어난 수많은 행동 중 하나라고 보고요.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는 희망이나 소망은 조그만 것이고, 대부분이 경제적 문제를 푸는 것을 첫 단추로 해결 가능하다고 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전 재미있는 현상을 이곳 스팀잇에서 봅니다. Vote라는 것은 그 어떤 투자 없이도 할 수 있는 기부입니다. 개인에게 '경제적 부담 없이 무언가 공동체 생활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주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사회에서도 개인에게 부담 없이 무언가 기여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면, 굳이 공동체 의식을 찾지 않더라도 사회가 바뀌고 연결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렇기에 이 생태계는 4차산업혁명 이후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경제 공동체라는 생태계를 만들 하나의 모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제 글을 놓고, 이런 좋은 이야기 듣게 되어 굉장히 신선합니다.
스팀 생태계가 갖는 의미를 이미 잘 파악하고 계신 듯요.
나중에 아이디어 잘 써먹겠습니다^^;;

명쾌하네요 공감하고 갑니다.

아...! 이 책 정말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가난은 몸에 아픔을 새긴다는 것이 너무 가슴아프고도
이런 연구를 하는 분들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교차했습니다.
리뷰도 너무 좋네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원작이 워낙 훌륭해서요.
김승섭 선생님은 올해에도 중요한 저술을 출판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같이 기대해 보겠습니다.

저도 읽으면서 느낀 것이 많은 책이었습니다. 책소개를 스팀잇에 올린 적도 있는데, @armdown 님의 글을 읽으니 제 글이 좀 부끄럽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읽었던 책이 많지는 않지만, 사회현상이라든지 의료에 관한 책들의 경우 일화를 바탕으로 감정적인 결론을 이끄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잘 수집되고 검증된 데이터를 사용한 글은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힘이 있는데, 이 책이 그러했습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막연히 짐작했던 걸 수치로 증명해 주었다는 점이라고 봐요.
이렇게 되면 다른 검증되지 않은 수치로 자신을 옹호했던 기득권층이 꼼짝 못하게 되지요.
계속 교류하면서 생각 나누겠습니다.

부조리의 연결망에서 벗어나려면.. 그게 거미줄 같아서 자꾸 말려들어가게 되니.. 오히려 당당히 끊고 나와 합리의 연결망을 새로 구축해야 할텐데요.. 이 블록체인이 그런 역할을 해 주려는지..

사실 '내부고발자' 문제가 말씀하신 내용과 관련되지요. 부조리의 연결망을 끊는 건 '투명성'인 것 같고요, 블록체인이 그걸 기술적으로 뒷받침할 거로 기대합니다.
철학자로서 계속 고민하면서 뭔가 입장을 도출해 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와.... 이런 책이 있었군요.. 좋은 책 소개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우리가 '감'으로 알고 있는 걸 '수'로 정리해 준 고마운 책입니다.
내용 자체는 익숙할 수도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