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의 검찰 출두, 그리고 '드디어'의 의미 : 역사의 바깥이란 없다

in kr •  7 years ago 

오늘 오전 MB의 검찰 출투 생중계를 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입만 열면 모든 것이 거짓말인 그의 입에서 '죄송'이라는 거싯말이 또 터져나왔다. 참담하다. '역사에서 이번 일로 마지막이 되었으면' 한다고? 뻔뻔하기 그지없다.

MB는 2007년 대선 당시 국민의 '부동산 재개발' 욕망을 자극해 그 물살을 타고 (그 덕분에 10년 동안 개고생 했고, 다들 두고두고 반성해야 한다) 대통령에 당선되어, 그 후 대한민국을 나락으로 떨어트려, 결국 촛불혁명을 만들어낸 (어떤 점에선 503보다 더 큰) 주역이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역사의 필연' 운운하며, MB와 503이 없었다면 지금의 '혁명 대한민국'도 없었을 거라고, 따라서 이들에게도 역사의 공이 있다고 평가(개소리)할지도 모른다. 마치 앞으로 진행될 역사의 경과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다. 거시적 관저에서 '역사'를 보야야 한다고...?

나는 종종 등장하는 이런 식의 접근에 우려를 금치 못하겠다. 저런 논리는 '일제 강점기'를 정당화하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를 뒷받침하기도 하고, 박정희 정권도 '공(산업화)과 과(민주주의)'가 모두 있다는 주장의 논거가 되기도 한다. 영광스런 현재가 있기 위해서 (불행했지만) 불가피하게 거쳐야 했을 과정이라는 것이다. 저런 논리를 펼치는 자는 역사의 바깥에 있는가?

역사의 바깥에서, 또는 역사의 곁에 서서, - 흔이 이를 '방관자'라 부른다, - 훈수 두듯 역사를 운위하는 것은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자신이 서 있는 곳 역시 물결을 피할 수 없다. 역사는 회고적으로 돌아볼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역사는 순간순간 겪어가는 과정이다. 들뢰즈의 철학을 잠깐 소환해서 말하자면, 혁명은 결국 타락하기 마련이라는 이유로 혁명을 하지 말자는 주장이 성립할 수 없는 것처럼, 긴 안목에서 역사를 보자는 주장은 헛소리일 뿐이다. 이를 위해 니체는 '역사'와 '생성'을 구분했다. 역사란 생성의 연속이며, 생성의 순간이 중요하다. 각자에게는 그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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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사건을 스쳐가듯 겪게 되는 수많은 보통 사람이 있다. '걔가 그랬대. 넌 그러지 마.' 비록 자신은 무지렁이지만 자식만은 잘 키워 서울로 유학보낸 촌로가 늘상 하던 말. '부모 생각해서라도 넌 몸조심해야 해!' 그러나 그 '너'가, 바로 당신의 자식이, 당신의 친구가, 그 '걔'라면? 왜 '걔'가 되어야만 했을지 생각해 볼 수 없었을까? 원래 역사의 사건은 강자에게 먼저 소식이 전해진다. 왜냐하면 흐름을 만들건, 흐름에 저항하건, 이런 일들이 처음 시작되는 건 바로 강자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더 정확히 부연설명하면, 역사의 새 흐름이 시작되게 하는 자가 강자이다. 강자는 사건을 만들며, 생성을 개시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걔'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란 말이다!

생성의 순간은 충돌의 순간이며, 충돌이 있으면 한 쪽은 죽는다. 지키려는 쪽과 바꾸려는 쪽은 목숨을 건 싸움을 하는 거다. 제스쳐뿐이 아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행동하게 되고, 어떤 형태로든 연루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역사에는 방관자가 있을 수 없고, 역사의 바깥이나 곁은 존재할 수 없다. 마치 그럴 수 있는 것처럼 구는 '가식과 위선'이 있을 뿐이다.

겪고 있는 자는 모든 걸 건다. 그 지속되어 온 긴장 속에서만 '드디어'라는 감탄사를 외칠 수 있다. '드디어'는 자격과 관련된 표현이다. 역사에서 누가 '드디어'라고 말할 자격이 있는가? 오래 도모한 자뿐이다. 오늘 아침 생중계를 보며, 또는 다른 일이 있었기에 조금 늦었더라도 뉴스를 찾아 보며, '저 쥐새끼 드디어'라고 외칠 수 있는 자는 오래 기다렸온 자이다. 뭐라도 해보지 못해 안달이 났던 자이다. 때로는 숨죽여 기원했던 자이다.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이 시에 대한 내 느낌을 술회할 자리는 나중에 따로 마련하더라도, 오늘을 되새기며 읽어보면 좋겠다.

꽃덤불

신석정



태양을 의논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달빛이 흡사 비 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터를 헤매이면서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
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느냐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가슴을 쥐어뜯지 않았느냐?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 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 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 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 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여섯 해가 지나갔다.

다시 우러러보는 이 하늘에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오는 봄엔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느 언덕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보리라.

(1946)



내가 이 시에서 가장 아득한 구절은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여섯 해가 지나갔다."이다. 누가 이 말을 외칠 자격이 있는가? 생각할 시간을 가져보기 바란다.

내가 전에 포스팅했던 글(묻힌 글)의 일부를 소개하며 글을 마치겠다. (참조: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의미 - 실천학적 역사관 서설

이제 나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의미를 다시 규정하고자 한다. 그것은 사마천이 암시한 것처럼 '일은 반드시 올바른 쪽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일은 반드시 올바른 쪽으로 돌아가게 만들어야 한다'는 보다 적극적인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나는 '필(必)'을강하게, 실천적인 의미로 해석했다. 그것은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과 같은 당연한 사태가 아니라 물을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퍼 올리는 것과 같은 인위적인 사태이다. 그것은 의도를 담은 의식적 실천이다(나는 다른 곳에서 무위(無爲) 사상의 허구성에 대해 비판해보려 한다). 역사는 필연적인 법칙을 따르는 것도 아니고 당위적인 방향으로 흐르지도 않는다. 정의(正義)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만들어내야만 한다.

역사는 역사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역사는 만인의 것이며, 역사학 역시도 많은 학자들의 작업이다. 역사와 마찬가지로 역사학 역시도 하나의 재료이다. 그러나 그것은 독특한 재료로서, 사람은 그 재료의 산물이자 그 재료를 다루는 존재이기도 하다. 사필귀정이 미래의 문제인 한 역사는 여전히 과거의 것으로 남게 될 뿐이며, 사필귀정이 현재의 실천으로 해석되어야만 우리는 역사의 무게와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무게와 굴레란 과거에 이미 이루어진 일이기에 현재의 우리가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자포자기적 생각을 뜻한다. 그리고 이렇게 해야만 영웅이 되지 않고서도 역사의 주역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현재의 역사란 과거의 정치이며 현재의 정치는 곧 미래의 역사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역사를 과거의 소관사항으로 만들 것이 아니라 미래의 소관사항으로 만들자는 말과 같다. 그만큼 현재의 실천이 중요하게 된다. 미래의 역사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의 실천을 통해 만들어 감으로써 도래한다. 이 사실은 거듭 강조되어야 하며, 실천학의 본질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다. 실천학은 인식 또는 발견의 문제보다 실천 또는 창조의 문제를 앞에 놓는다. 실천 후에 존재가 있게 되고 그것이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이치. 그렇다면 문제는 어떤 것을 만들 것인가에 있게 되고, 거기에 '사필귀정'의 '정(正)'이 관련을 맺게 된다. 여기서 '정'이란 '옳음'이요 '정의'이며 이와 관련한 가치판단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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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팡새끼..5년동안 많이 해처먹었죠..

  ·  7 years ago (edited)

참여하지 않으면 나쁜 역사가 반복되겠죠. 보팅하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나쁜 역사를 바로잡는 게 사는 의미 중 하나겠지요.

보팅하고 갑니다. 좋은글 잘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한 마음 한 뜻으로 적폐청산~

가열찬 목소리-오늘 아름다운철학자님의 사자후가 스팀잇마을에 쩌렁-울리네요.
공감합니다.
자유를 속박한 이들-어떤 것을 줬다해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자유 이상의 것은 없기 때문이죠.

준 것도 없습니다.
아, 아니, 고통과 비참과 굴욕과 가난을 주었지요.!

MB도 잘못에 대한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의 거짓과 탐욕에 대한 댓가를 받아야죠.

역사의 심판 전에, 사법 심판부터 받고요~

입만열면 구라에 자본주의의 악마!!사라졌으면 합니다.

누구처럼 시위하는 사람 하나없다는게 웃겼습니다.ㅋㅋ

시위를 잘 관리한 것 같더군요.
그래도 지금은 온 국민이 가슴에 분노를 안고 노려보고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분노를 시원하게 가라앉혀주었으면 합니다.ㅎㅎ

참.. 세상이 답답한 면이 많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도 많고..
긴 글 잘 읽었습니다. 보팅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겪어 본 사람은 치를 떨 수밖에 없습니다.
사법 심판과 역사의 심판 모두 치를 것입니다.

보팅하고 팔로우 하고 갑니다.
글 잘 봤습니다~

고맙습니다. 종종 뵈어요.

실천 후에 존재가 있게 되고 그것이 인식의 대상이 된다! 멋지네요!

고맙습니다.
그게 제 철학의 핵심 사상 중 하나입니다^^

정말 존버하다 보니 이런 날이 오긴 오는군요.
제작년까지만 해도 이 날이 올까 했는데.

십분 동감합니다.
우리가 해냈습니다.
헤쳐왔습니다.
누군가는 그래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우리였습니다!

오죽하면 변호사 선임 할 돈 없다는 말이 사기쳐 받을 돈이 없다고들 할까요.

그러게요.
늘 후불제인데, 한 번 들어가면 살아 못 나올 길을 가니...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