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릭 더 월드 워커’ 라는 만화를 나는 요즘 즐겨보고 있다.
옛 8,90년대 미국 애니메이션의 향수를 살린 복고풍 작품으로, 그렇다고는 해도 사실은 동양인이 만든 작품이었다. 오리엔탈리즘의 반대격인 작품이랄까.
복고라는 컨셉에 맞추어 설정 자체도 그렇게 별날 것이 없는 작품이다. 우리가 살고 세계 외에도 다양한 평행우주가 있고, 릭이 살고 있는 우주는 마법과 과학이 공존하며 발전해온 곳. 간혹 흉악한 범죄자들이 그 기술을 사용해 다른 우주로 도망치는 경우가 생기는데, 릭은 그들을 잡는 일종의 차원 탐정으로 갖가지 세계를 누비며 다양한 모험담을 펼쳐나간다.
유치한 첫인상이긴 하지만 이야기를 푸는 방법이 제법 몰입도가 있고 성인 취향에 맞아서, 만화를 놓은지 몇 년 된 나도 간만에 즐길 수 있던 작품이었다. 그 ‘릭’이 직접 내 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저기, 괜찮으면 나 좀 도와줄 수 있을까.”
피범벅이 된 릭의 말을, 목에 부착된 언어번역기가 해석해 기계음으로 내놓았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비록 2D의 만화 그림체에서 3D의 현실로 바뀌었다는 차이가 있긴 했지만, 그건 누가 봐도 ‘릭' 이었다. 코스튬 플레이가 아니라는 건 명백했다. 왜냐하면 내 앞에 나타난 건 릭뿐만이 아니었으니까.
새벽녘의 국도. 아프리카 코끼리를 아득히 능가하는 규모의 괴물의 시체가 도로를 막고 쓰러져 있었다. 차를 몰던 도중 허공에서 튀어나온 이 괴물 때문에 나는 급정거를 밞았고, 엑셀을 계속 밞았어야 했다는 것을 깨닫는 찰나 릭이 나타났다.
엄청난 혈투였지만 늘 그렇듯 릭이 이겼다. 다만 한쪽 팔이 너덜더덜한 데다 얼굴은 반이 아작나 버린 꼴이 되었고, 만화대로라면 릭은 자신이 구해준 차원 원주민의 도움으로 휴식을 취해야 했다. 그 역할을 내가 맡은 셈이었고 나는 릭을 집으로 데려왔다.
이후 일도 정말 만화대로였다. 한동안은 거의 혼수 상태나 다름없던 릭은 본인이 가진 회복 초능력으로 점점 상처를 회복해 갔고, 내가 가져다주는 ‘새로운 세계’의 음식들을 감탄하며 먹었다. 나흘째 되는 날 회사에서 돌아오자 릭은 침대를 벗어나 있었다.
“안녕.”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릭이 웃어 보였다.
“몸은 좀 괜찮아 진 거야?”
“으음. 덕분에 별다른 후유증 없이 깔끔하게 회복할 수 있었어. 이제 슬슬 돌아갈까 하는 참이었지. 마지막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 기다렸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운이 좋았지. 월드 워커를 실제로 볼 수 있을줄은 꿈에도 몰랐어.”
“뭐?”
순간적으로 릭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고. 그제서야 난 릭에게 만화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생각과는 달리, 내 설명을 끝날 즈음의 릭은 그저 덤덤한 표정이었다.
“그렇군. 여기엔 내 이야기가 있는 건가.”
고개를 주억거리는 릭에게 내가 설명을 요구하자, 릭은 자신이 보던 책을 들어올려 보였다. 책장에 꽃혀있긴 해도 거의 십 년 가까이 펴볼 일이 없었던 책이었다. ‘그림 형제/안데르센 동화집'. 그가 책갈피를 끼웠던 곳을 다시 펴보자 ‘신데렐라'가 있었다.
“이쪽 세계에선 이건 그저 동화일 뿐이겠지?”
“그렇지.”
“하지만 내 세계에서는 이건 역사야. 지금은 없어진 작은 소국이지만, 신데렐라와 루카 3세의 로맨스는 그들이 살았던 나라보다도 훨씬 오래 살아남았지. 좋은 이야기야.”
릭이 동화집을 내려놓는 책상에 책이 몇 권 더 있었다. 사 놓기만 하고 결국 보지 않았던 세계사 서적들.
“시저와 리처드 1세의 일대기도 좋지. 그야말로 한 시대를 풍미한 걸작들였어. 우리 세계에서는 한 사람의 극작가의 손에서 창조되었지만… 뭐. 그렇다고 그들이 위대함이 깎여나가진 않으니까.”
주머니에서 꺼낸 차원 이동기를 재부팅하면서 릭은 말을 이어나갔다.
“내 이야기를 읽었다면 알고 있겠지만, 여기 네가 사는 우주와 내 우주는 물론이고 이 세상엔 무수히 많은 우주가 존재해. 닮았으면서도 다른 세계들. 그 세계들은 저마다 이야기의 법칙으로 이어져 있어. 모든 픽션, 이야기들은, 다른 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서 존재한다는 거지.”
“나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걸… 그러니까, 네 만화에선 그런 걸 본 적이 없는데.”
“100%존재한다고 보기에는 논란이 좀 있는 법칙이라서. 몇몇 학자들은 아예 사이비 취급하기도 하고. 하지만 난 믿어. 그 누구보다도 많은 세계를 넘나들어 오면서, 한 세계의 역사가 한 세계의 픽션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경우를 무수히 봐 왔지. 단순히 무한한 평행우주의 우연으로 보기에는 너무 자주 보여.”
납득이 잘 되지 않았다. 신데렐라를 생각해 봐도, 그건 창작자 본인의 머리속에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던가? 창작자와 다른 세계 사이의 연관관계가 없이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는 건가.
“예를 들면, 이런 걸수도 있잖아. 그런 이야기를 만든 사람이, 사실은 너처럼 차원을 돌아다니는 사람이어서 다른 차원의 역사를 본따…”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미 그런 작품과 작가들을 수천 수만 명이나 봐 왔는걸? 그 사람들이 전부 차원 이동자였단 말야? 우리 세계에서도 차원을 이동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은 정말 얼마 안 돼. 근데 너희 세계의, 수 세기 전의 작가가 차원을 넘나들 수 있었다고? 그것도 여러 차원에서 오직 작가들만?”
이야기를 계속해나가면서 릭의 목소리는 점점 열띤 기색을 띄우고 있었다. 진짜로 맞고 아니고의 여부를 떠나, 그가 이 법칙이라는 것에 가진 열정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 나도 알아. 증명할 수는 없겠지. 한 인간이 살아오면서 드나들 수 있는 차원의 수는 정해져 있으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이야기들과 그에 대응하는 우주를 찾으려면 수천수만 년이 걸려도 모자라겠지. 하지만 나는 믿어. 맹신이라고 해도 좋지만, 그러리라는 확신이 있어. 바로 어제 읽었던 소설이 오늘 방문했던 세계의 역사이거나 현재일 때. 그런 경우를 나는 너무 많이 봐 왔다고.”
자신의 높아진 목소리 톤을 의식했는지, 이 시점에서 그는 헛기침을 하며 살짝 얼굴을 붉혔다.
“말이 좀… 격해진 거 같은데. 미안. 하지만 나로서는 이게 꽤 중요한 이야기거든.”
“음. 약...간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일종의 로망 같은 거구나.”
“애초에 내가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으니까. 두근거리잖아. 내가 재밌게 읽는 이야기가 어느 세상에서인가는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게. 그 이야기들의 세계를 한번 직접 보고 느끼고 싶었거든.”
그렇게 말을 들으니, 상상력이 빈곤한 나도 제법 많은 것들을 떠올려 볼 수 있었다. 책을 그렇게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이런 나도 감명깊게 본 픽션은 몇 작품 있으니까. 그런 것들이 창작이 아닌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하는 이야기들이라면야….
“그렇다면 적어도 우리 세계는 좀 지루한 이야기들밖에는 없겠구나.”
“무슨 말이지?”
“그러니까, 너도 보다시피 우리 세상엔 마법이나 괴물들 같은 건 없으니까. 초능력자들도, 로봇도 없고. 적어도 모험물 배경으로서는 그렇게 적합하지 못한 곳이잖아.”
어쨌거나 지금 기분은 상당히 들뜬 상태였다. 릭이 차원 경찰을 시작한 계기라니. 아직 만화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주인공의, 어쩌면 우리 세계에서 그의 이야기를 그리는 작가조차도 모를 수 있는 속사정을 내가 알게 된 것이다.
“끝내주는데.”
“뭐?”
“응?
“방금 네가 말한 거. 그냥 끝내준다가 아니라 말을 살짝 늘였잖아. ‘끄으읕' 내준다고.”
“아….”
‘끝내주는데'의 ‘끝’ 부분을 길게 늘이는 것은 내 오래된 습관 중의 하나였다. 대개의 경우 별 문제는 없었지만, 간혹 이것을 거슬려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기에 릭 역시 그 중 하나라고 생각했지만.
“너, 이름이 성필이라고 했던가? 남 성필?”
“어어… 근데 갑자기 왜….”
“너 혹시 고등학교 때 교통사고 당한 적 있냐? 병원에서 엑스레이 찍어서는 골절이라고 진단이 났는데, 막상 너는 그렇게 아프지도 않고 제대로 걸을 수도 있어서 다시 찍어 보니 단순히 금 간 거라고 판명이 났고. 깁스만 한 삼주쯤 하고 멀쩡히 돌아왔었지?”
“...!?”
정확했다. 릭이 설명한 그대로를 나는 고등학교 때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렇다는 것은….
“와우. 네가 진짜 ‘성필' 이었을줄은 몰랐는데, 그냥 이름이 같다고만 생각했었어. 그런 식의 이름을 쓰는 곳이 꽤 되니까. 그런데… 와우!”
갑자기 릭은 잔뜩 흥분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아까 법칙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보다도 더욱.
“내.. 이야기가 있는 거야?”
“있다마다. 아주 유명하지! 나도 네 이야기 전권 사서 가지고 있는걸. 이런 세상에, 널 실제로 볼 줄이야.”
너무 갑작스러워서 어떻게 반응해야할지를 모르겠다. 내 이야기라고? 지금까지 이십여 년을 살아 봤지만 딱히 이야기가 될 만한 사건이 있다고는 생각이 안 되었다. 게다가 ‘전권’ 이라고? 한 권으로 끝나는 이야기도 아니란 소리가 아니가.
“뭐 순문학이나 그런 건가? 휴먼드라마 같은.”
“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 순문학이라니. 휴먼드라마라니. 네 팬들한테 했다가는 맞아죽을 소리지 암.”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릭은 이미 몇 일에 걸쳐 봐왔을 집의 정경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렇게 생겼던 거였구나' 라는 그의 말이 실제로 들리는 느김이었다.
“어떤 이야긴데? 무슨 내용이길래….”
“나도 말해주고 싶은 생각은 굴뚝 같지만… 지금 보니 아직 ‘프롤로그’도 시작하기 전의 상황 같네. 여기서 뭘 말해주는 건 네 미래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테니까. 아. 그렇게 된다면 지금의 일도 앞으로의 출판본에서 언젠가 회상으로 나오는 걸까? 진짜 끝내주잖아!”
그의 말이 끝나가 무섭게 삐- 하는 전자음이 울렸다. 차원 이동기의 재부팅이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 갑자기 릭이 내 어깨를 꽉 쥐었다.
“음. 어쨌든 이만 갈 시간이 되었군. 즐거운 만남이었어. 친구.”
“이봐!”
“그래도, 다른 말은 못 해줘도 이 정도는 알려줘도 되겠지. 아까 말했었지? 이 우주가 모험물엔 적당하지 않은 지루한 세상이라고.”
다음 대사 대신, 그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저어 보였다.
아니란 걸 알게 될 거야.
그의 눈빛에 섞인 갖가지 감정들을 읽어낼 수 있었다. 호기심. 선망. 그리고… 동정? 동정?
“야!"
내가 잘못 읽었기를 바라며, 나는 손을 뻗어 릭을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릭의 몸은 섬광이 되어 방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렇게 릭은 사라졌다.
.fin
이 글들은 작가가 그때그때의 아이디어와 충동으로 작성한 짧은 이야기들의 모음입니다.
몇 년 전 창작한 소설도 있고, 방금 막 써져 나온 따끈따끈한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몇몇 이야기들의 경우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예전 버전을 보신 분들도 있겠네요!
모쪼록 재미있게 즐겨 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릭 더 월드워커'라는 만화가 실제 있는 줄 알고 찾아봤는데 가상의 만화인가보네요 ㅎㅎ 재미있는 소설 더 많이 써주시기를!
Downvoting a post can decrease pending rewards and make it less visible. Common reasons:
Subm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