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은 누구의 작품인가?

in kr •  5 years ago  (edited)

에반게리온은 내 인생에서도 하나의 분기점 역할을 했던 작품이라 최근의 혐한 발언 뉴스에 안찾아볼 수가 없었는데, 사다모토 요시유키 라는 이름이 낯설어서 검색을 해보았고, 많은 생각이 들어서 몇 자 적어본다.

에반게리온 애니메이션이 처음 일본에서 방영되던 시기에, 거의 실시간으로 우리나라에 이를 소개하던 몇몇 덕후들이 있었는데. 그건 그만큼 이 작품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PC통신에서 처음에는 화제가 되지 않았었다. 나는 일본어가 유창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실시간으로 가져오는 그 무리가 될 수는 없었고 실시간으로 그 분들이 가져오면, 그것을 거의 최초로 보는 리뷰어 중에 한 명이었다.

처음 보면서 에반게리온이 여러 가지 면에서 일본은 물론 국내의 애니메이션 소비 문화, 평론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안노히데야키 감독이 작정하고 아니메쥬에 그런 썰들을 풀고 있었기에, 꾸준히 모니터링을 해왔던 사람이라면 내가 아니라도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이미 그 당시에 정체기였다.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등의 대가들은 스스로를 단무지 깍두기라고 부르며, 일본 애니메이션의 미래를 어둡게 조망했다. 그러한 가운데 안노히데야키가 보인 파격은 어쨌든 이러한 사람들 마음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것이 이미 정체기에 빠져든 일본 애니메이션 전체를 바꾸지는 못할 지라도, 의미 없는 생산만을 반복하고 있는 이들에게 잔잔한 파도는 일어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여러 아티스트들이 말을 했고, 나는 그것이 일본과 한국의 덕후 문화에서도 일어날 것이라고 봤다.

이때, 나와 같은 평론가들이나 업계에 있는 사람들이 얘기하는 그 파격의 주인공은 감독이다. 에반게리온의 경우는 안노 히데야키이다. 특히나 에반게리온의 경우, 예쁜 캐릭터가 나와서 히트를 친 것이 아니다. 에반게리온에서 파격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부분은 두 가지다. 연출과 메카닉 디자인. 캐릭터 디자이너인 사다모토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에반게리온의 캐릭터들은 만약 안노가 연출하지 않았다면 평범한 만화의 주인공이 되었을 것이다.

애니메이션에서 그의 역할은 작화 감독이었다. 작화 감독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서 덧붙이자면, 캐릭터 디자이너가 작화 감독(이하 작감)을 하는 것은 애니메이션 제작 프로세스에서는 일반적이다. 이는 작감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를 알면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작감은 동화맨들에게 가이드를 제공하고, 동화맨들이 그린 그림을 감독하고 수정한다. 흔히 말하는 작화붕괴. 캐릭터가 망가지는 것을 막는 방어선의 역할을 하는 것이 작감이다. 여기서 짐작했듯이, 작감은 연출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각 씬의 레이아웃을 짜는 사람도 아니다. 애니메이션은 고도로 분업화된 작업이다. 거기서 라인의 퀄리티를 유지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에반게리온을 국내 PC통신망에 소개했던 초기 리뷰어 중의 한 명이었고, 엄청난 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다모토 유시유키라는 이름이 내 머릿 속에 없었던 이유는 이 때문이다. 내 입장에서 캐릭터 디자이너의 이름이 기억에 남았을 리가 없다. 나는 신지, 아스카와 같은 캐릭터 자체를 좋아했던 게 아니니까.

그가 원작만화를 그렸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에반게리온은 원작만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가이낙스에서 기획을 한 오리지널 작품이고, 사다모토는 캐릭터 디자이너로서 캐릭터 라이센스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본인이 직접 만화책을 만든 것 뿐이다. 실제로 많은 캐릭터 디자이너가 만화책 작가로서의 업을 겸하고는 한다. 이는 그것이 생계 유지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랬을 때, 그 출판 만화는 그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나는 아직까지 사다모토 요시유키가 연재했던 만화를 보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보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세계적인 파장을 일으켰던 것은 애니메이션이지 그의 만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연재 시기와 상관없이 나는 출판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다른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심지어 나는 그의 출판만화가 애니메이션의 인기에 기생하여 돈을 버는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자, 그럼, 여기서 본래 하려던 질문.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은 누구의 작품일까?

사다모토 요시유키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꺼라고 보는데, 당연히 어느 한 두 사람의 작품이 아니다. 오늘날에야 컴퓨터그래픽 기술의 발전과 장비의 보급화로 양상이 달라졌지만, 그 때만 하더라도 애니메이션란 최소 몇 십명의 스태프가 모여 함께 만드는 작품이다. 또한 우리가 어떠한 작품에 열광할 때, 보통은 스토리, 연출이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본다. 에반게리온에서 신지가 한 행동이나 대사가 중요한 거지, 그 캐릭터의 형태가 작품의 핵심 요소는 아니지 않는가? 애니메이션도 영화와 똑같은 구조를 갖고 있다. 연기를 시키고 화면을 구성하는 것이 감독이고, 그 대사를 작성하는 시나리오 작가가 따로 있는 형태이다. 캐릭터의 외적인 모습을 잘 만드는 것도 물론 중요한 역할이지만, 그건 전체의 일부분일 뿐이다.

이번 현한 발언으로 에반게리온을 보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글쎄, 스탭 한 명의 혐한 발언 때문에 안보겠다는 것은 좀 이상하다. 그런 식으로 치면, 보지말아야 할 영화나 애니메이션은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나에게는 이 또한 사람들의 무지가 그대로 투영되는 현상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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