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이 글을 보는 사람이 남성이라면 내가 본 블로그에서 맨 처음 올렸던 포스팅 '바보의 벽'을 먼저 읽어보면 좋겠다.
나는 원작을 읽지 않고 영화만 보았는데. 원작에 대한 사회적인 논란이나 사람들의 평가는 접어두고 영화 자체만을 놓고 얘기하면 정말 잘 만든 영화다. 어렸을 때 일본 영화를 보면서 가졌던 일본 영화에 대한 부러움. 우리는 왜 저렇게 섬세하고 디테일하게 감정을 묘사하지 못할까. 왜 한국 영화는 자연스럽게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인위적으로 조장할까. 하는 그런 아쉬움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영화. 그동안 부러워했던 일본 영화들과 같은 섬세하고 자연스런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처음부터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는 이상,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영화에 나오는 모든 캐릭터에 공감할 수 있을꺼라 생각된다. 물론 각자가 처한 위치, 상황에 따라 어느 역에 더 공감되는가 하는 것은 다르겠지만 말이다.
원래 페미니즘이란 것이 여성우월주의도 아니고, 남성을 공격하려는 것도 아니고, 단지 젠더로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벗어나서,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이 작품은 페미니즘을 잘 녹여낸 작품이다. 페미니즘이 대중화될 수록 남녀노소 모든 사람들은 사회적 억압에서 자유로워지게 된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이 작품을 두고 벌어지는 소모전은 그런 의미에서 애초에 실체가 없는 싸움이다. 혐오 대상에 대한 몰이해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논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연히 그 길-페미니즘이 대중화 되는 길-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모든 길에 시작점이 있고 그 시작점은 항상 우리가 어느 위치에 와 있는가를 파악하는데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 작품이 딱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작품의 모든 캐릭터에 공감할 수 있고 모든 상황에 납득이 가는 이유는 영화에 나오는 모든 상황이 한국 사회에서 반복되는 일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 그나마 현실에서 드물게 일어나는 일은 공유가 맡은 남편의 모습 정도일 거다. 그런 남편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저 정도면 한국 남성들의 평균적인 수준에 비추어 상위 10% 안쪽일 것 같다. 문제는 그 상위 10%조차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문제 투성이라는 거다. 공유가 연기한 남편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심지어 좋은 남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주변에서 만나는 남성들 대부분이 그 이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 그러하다. 한국 사회에서 남성들은 세대와 상관없이 매우 낮은 젠더의식을 갖고 있으니까. 이렇게 대부분의 남성들이 무지하다보니, 그 속에서는 약간의 지식과 조금만 나은 모습을 보여도 우월한 남성이 된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자신들이 무엇이 문제인지를 아예 인지할 수 없다. 이는 한국 남성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한국 남성들 모습이 익숙한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주변 남성들의 문제가 뭔지 모른다고 할까. 한국 남성들 대부분이 매우 심각한 상태에 있지만 주변에 자기가 아는 모든 사람이 자기와 비슷하니 그게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없다.
젠더 문제가 아니더라도, 애초에 자기와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해가 어려우니 공감은 더 어려울 수 밖에 없다. 이해력이라는 말이 존재하듯이, 나와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에는 부단한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가정은 물론 학교에서도 이러한 능력을 제대로 가르치고 훈련시키지 않는다. 여성들의 경우는 그나마 자연스럽게 여성들의 커뮤니티 속에서 이러한 훈련을 하게 되지만, 남성들의 삶은 맨박스 이론에서 나오듯이 정반대를 훈련시키는 경우가 더 많다. 그렇게 공감 능력이 결여된 모습을 오히려 남자답다고 인식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자라서 성인이 되고나면 자신이 이해를 못했고 공감을 못했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82년생 김지영을 보면서 내가 느꼈던 것은 무기력감이었다. 여성들이 겪는 부조리한 현실. 그건 개인의 잘못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가부장제를 유지하고 이를 되물림하면서 여러 사람들의 언행에서 그것이 발로되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잘못된 문화의 희생자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잘못된 문화, 잘못된 구조를 인식하기보다는 상처 주고 상처 입으면서 스스로를 탓하거나 누군가를 비난하게 된다. 너무 안타깝다.
20대 초반에 비영리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느꼈던 무기력감과 똑같은 무기력감을 영화보면서 느꼈다. 너무나 가슴 아프고, 반복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어떻게든 바꾸어나가야 할 것 같은데. 한 명의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는 것 같은 느낌. 영화를 보는 내내 많이 울었다.
나는 이 영화를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보았으면 좋겠다. 21세기 우리나라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모두가 눈으로 확인했으면 좋겠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잘 몰랐던 이들에게는 새로운 사실을 아는 계기가 될 것이고 이미 알았던 이들도 영화라는 간접체험을 통해 좀 더 잘 알게 되고 머리로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것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한다.
한국 사회는 구조적으로 보면 매우 강력한 남성중심의 사회다. 젊은 세대가 그것을 못느끼는 이유는 현재 우리나라는 모든 조직이 젊은 세대를 힘있는 자리에 껴주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각 조직이 어떠한 이들에 의해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고 누가 힘을 갖고 있는지를 보면 알게 될꺼라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거의 모든 조직이 9:1, 아니 어떤 곳은 10:0으로 의사결정 조직에 남성들만 포진해 있다. 그나마 그러한 위치에 있는 일부 여성도, 대부분은 명예남성들이다. 애초에 여성이 그렇게 변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커뮤니티에 끼어주지 않으니까. 따라서 실제로 사회가 바뀌려면 결국 그 위치에 남성들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 아니면 강제로라도 여성들에게 그런 자리를 할당해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녹색당의 여성정치인 만들기 프로젝트를 응원한다.)
끝으로 김도영 감독에게 감사를 드린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부조리를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는 것은 영화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내용을 충실하게 구현하려다보면 다큐멘터리가 되버리고 영화적인 장치를 많이 넣으면 본래의 사실이 가져다주는 의미가 퇴색되어 버린다. 김도영 감독은 존재하는 사실은 어떠한 것도 왜곡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딱 적당한 수준의 영화적인 장치를 통해 뻔하지 않은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덕분에 한 편의 영화로서도 참 재밌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모든 분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한다.
기대가 되는 작품이에요 꼭 보러 가야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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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랑 보러가야겠네요! 섬세한 감정표현이라니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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