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책] 오버 더 초이스(Over the Choice)

in kr •  6 years ago  (edited)

오버 더 초이스  

 이영도 (지은이) | 황금가지 


우리나라 판타지 문학에서 PC통신 얘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


삐- 하는 모뎀 소리와 함께 PC통신망에 접속하던 그 기억을 지금의 나와 비슷한 세대라면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덤으로 전화요금 때문에 부모님에게 혼나던)


아니메, 망가, JPOP 등은 물론이고 그 당시 PC통신을 이용하던 젊은 세대들이 향유하는 문화들은 모두 자연스럽게 통신망 안에 녹아들어갔다. 판타지 문학도 그 중 하나였다. 대부분의 큰 통신망에는 여지없이 판타지 동호회가 있었고 회원들은 그 안에서 해외 판타지 문학을 읽고 소개하거나, 습작을 남기고 이를 서로 리뷰해주는 활동을 하곤 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발군의 필력을 갖춘 이들이 등장하여 인기를 끌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이영도였다. 자칭 '타자-키보드를 두드려 글을 써왔기 때문에 타자(打者)'


어느 정도 인기였는가 하면 매일매일 다음 연재글이 언제 올라오는지 사람들이 기다리다가 글이 올라오면 바로 조회수가 수천이 넘어가버렸다. 그러한 인기 속에서 폭풍같이 연재하고 첫 작품을 완료한게 '드래곤 라자'였다. 연재기간 단, 6개월. 지금 다시봐도 훌륭한 퀄리티. 그리고 전체 원고 분량에 비교하면 엄청난 필력이었다. 


이영도의 작품이 신선했던 것 중에 하나는 설정을 설명하려 들지 않는 점이다. 판타지 문학과 기존 문학의 큰 차이점은 판타지 문학이 작가에 의해 창조된 세계에서 스토리가 진행된다는 점인데(그것이 꼭 검과 마법, 용이 나오지 않더라도) 이 때문에 작가는 글을 쓰기에 앞서 이 세계관을 만들어내는데 적지 않은 노력을 들여야 한다. 그 때문인지 당시 통신망에 글을 올리던 이들은 공들여 만든 자신의 세계를 설명하기에 바빴다. (한편으로는 힘들게 만들어낸 자신의 성취를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사람들의 글을 읽다보면, 소설을 읽고 있는게 아니라 설정집을 읽고 있는 느낌도 들었다. (글을 쓴 이들도 설정을 만드는 일에 더 매료되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이영도는 설정이나 세계관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다른 일반 소설과 마찬가지로 소설의 주인공들이 나와서 그냥 얘기를 진행해나갔다. 그 주인공들이 사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는 글을 읽어가면서 주인공들의 경험과 그들이 전하는 묘사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파악해나갈 뿐이다. 하지만 얘기가 흡입력이 있다보니, 자연스럽게 그 과정에서 지금 주인공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도 이해를 하게 된다. 나는 "그래, 이게 판타지 문학이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 전까지 다른 이들은 무슨 게임을 만드는 사람 같았다. 반면 이영도는 단지 소설의 장르로 '판타지'를 골랐을 뿐, 문학을 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영도의 소설을 읽던 시절, 나 역시 문학소년이었고 순수문학을 집필하고 있어서 더 그런 갈증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탄생한 신인 작가 이영도는 이후 계속해서 책을 내오다가 근래에는 신간이 나오지 않았다. 나 같은 팬 입장에서는 돈을 벌만큼 벌어서 이제 안내는가보다 하는 생각도... (드래곤라자 하나만으로도 국내에서 100만부가 넘었으니, 해외까지 포함하면...)


오버 더 초이스는 그러한 팬들의 오랜 기다림 속에서 나온 신간이다.


책을 읽어보니 이영도의 작품만이 가지는 고유의 매력-언어유희, 블랙코미디-이 변함없이 들어가 있어 반가웠다. 오랜만에 그의 문체를 보면서 여전히 매력적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스토리 뿐만 아니라 문장 하나 하나를 읽는 재미가 있다.) 한층 더 진화된 부분도 있었다. 뭐랄까. 좀 더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할까? 중간중간 공부를 더 했구나 하는 티가 확- 났다. 다방면의 지식이 캐릭터들의 입을 빌어 쏟아져 나온다. 예를 들면 생물학이라던가.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더해져서 오버 더 초이스의 배경이 되는 세계관은 더욱 더 현실감을 가지고 생동감 있게 독자에게 다가온다. 분명 가상의 세계지만 정말 그러한 세계가 존재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다.


오버 더 초이스는 예전에 단편으로 나왔던 오버 더 호라이즌의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 아직 그 단편들을 읽어보지 않은 분들이라면 이를 먼저 읽고, 이 책을 읽는 것도 재미를 더하는 방법 중에 하나이다.


역시나 이영도구나 싶었던 것이 이번 작품에도 반전에 반전이 계속된다. 그런 관계로 책 소개지만 스토리를 언급하는 것은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어려울 것 같다. 그냥 직접 읽고 판단하시길!


끝으로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첫 구절로 시작한다.


나는 티르 스트라이크다. 삼십여 년 전부터 티르 스트라이크 하고 있다. 당신들은 티르 스트라이크 해본 적이 없을 테니 알려주는데 요즘은 티르 스트라이크 하기 좋은 시절은 아니다.


우리 같은 서민들에게 좋은 시절이 언제 있었는가 싶지만. 판타지 세계에서조차 삶은 고된 거였다. (쉬운 일이 없어...) 초반부터 괜히 울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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