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원의 아침묵상 / 2017. 10. 8 (주일)
■ 예레미야 11:9-17
[ 침묵하시는 하나님 ]
하나님께서는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 중에 반역이 있다고 하십니다(9). 이는 은밀하게 진행된 음모에 따른 반란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겉과 속이 다른 백성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척 하였으나 이미 마음 속에서는 우상숭배와 음행의 길을 가고 있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이스라엘의 반역은 조상들 때부터 반복되어 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길로 행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것을 조상들의 행적을 통해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이 언약을 반복적으로 파기하였습니다(10).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과거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던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오늘의 내 모습을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역사와 성경에 오늘 우리가 범하는 것과 같은 죄와 그 결과가 셀 수 없이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특히, "내 말 듣기를 거절한 자기들의 선조의 죄악으로 돌아가서"라고 말씀하신 것은 실수로 인한 죄악을 말한 것이 아니라, 고의적이고 반복적인 죄악을 말하는 것으로서, 자기 백성의 죄악에 대하여 오래참으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죽은 신과 같이 취급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나간 역사의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교훈으로 받지 못하고, 조상들이 걸었던 죄악의 길을 반복적으로 따라가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싫어하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로므로 사도바울은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롬1:28). 죄인줄 알면서도 반복해서 죄를 짓고도 징계가 없는 것을 평안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그 죄에 대해서 물으실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성숙한 인격으로 지음받은 백성이 깨닫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오래참고 계실 뿐입니다. 죄가 드러나면 그 때에 회개하겠다는 얄팍한 꾀가 오히려 더 큰 진노를 불러오게 됩니다. 오래참으시는 하나님께서 진노의 손길로 나를 다루시기 전에 회개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반복적으로 죄악을 행하는 이스라엘에 대해 오래참고 기다리시던 하나님께서 이제 그들에게 '피할 수 없는 재앙'을 선포하십니다(11).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재앙의 때에는 그들이 부르짖더라도 듣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피할 수 없는 재앙 중에 부르짖는다는 것은 회개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처절한 고통의 몸부림이며, 죽음의 비명입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닫았던 만큼 하나님께서도 그들이 합당한 죄의 삯을 감당할 때까지 침묵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지 않으시거나 미워해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사람의 손으로 조각한 우상, 즉 말하지도 듣지도 행하지도 못한 우상들을 섬겼습니다(12). 하나님 또한 아무런 구원의 능력을 향하지 못하는 우상과 같이 취급했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면 결국 영원한 고통 속에서 부르짖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자기 중심적으로 대할 때가 많습니다. 고통 중에 부르짖으면 언제든지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확신합니다. 이스라엘과 같이 죄악의 길에서 떠나지 않으면서도 고통을 당하여 부르짖으면 언제든지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죄를 돌아보고 진실로 회개하지 않는 백성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시고 때로는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나서야 무지한 백성들은 자기의 죄를 먼저 돌아보기 보다는, 세상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수단을 찾거나 자신들이 섬기던 우상에게 부르짖고 나서야 아무런 방법을 구할 수 없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찾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습니다. 침묵하시는 하나님,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하고, 응답하시는 하나님 복 주시는 하나님만을 생각하는 신앙은 매우 위험합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성읍 수만큼 각양각색의 우상을 만들고 섬겼지만, 정작 구원의 때에 아무런 반응조차 없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13). 인생들은 이러한 우상들에게 절하고 기도하는 것이 효과가 있다고 종종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안에 있는 욕망에 소리에 스스로 반응한 것이며, 스스로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 결과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서 듣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14). 이는 하나님의 심판 때가 이르면 선지자의 중보기도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진실한 회개란 평안할 때에 자기 안의 죄에 대한 양심의 고통을 느끼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입니다. 심판의 고통이 시작된 후에 부르짖는 것은 이미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헛될 뿐입니다. 한 때는 '내 백성'이라고 칭하셨으며, '나의 사랑하는 자', '좋은 행실을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로 불리워졌던 이스라엘이 이제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토록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한 죄를 즐기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던 자들이, 이제 심판의 고통에 직면하게 되자 하나님의 집을 찾고 그곳에서 제물 고기를 드리며,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시고 구원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15). 이들은 바알에게 분향하며 제단을 쌓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제단에도 그렇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제물을 기뻐하시기 보다 믿음의 마음과 행위를 달아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예배와 제물이 결코 하나님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탐욕과 우상숭배와 악행을 버리지 않은 사람에겐 이미 성전을 밟을 권리가 없고 예물과 예배를 드릴만한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기도에 다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며, 모든 예물을 다 받으시는 것도 아니고, 모든 예배를 다 받으시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푸른 감람나무라고 자랑하시던 이스라엘이 이제 불에 타고 가지가 꺾인 초라한 신세로 전락했습니다(16).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재앙을 선언하신 까닭을 "바알에게 분향함으로"라고 말씀하십니다(17). 오늘도 우리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하지만, 풍요의 신 바알이라고 할 수 있는 '돈'을 위해 서 많은 수고와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알에게 분향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부터 온 것임을 모르고 돈으로 부터 비롯되었다고 착각하고, 재앙과 불행의 뇌관이 되는 것을 축복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의 기도>
언제든지 부르짖기만 하면 나의 죄악과 상관없이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하나님을 기만한 것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죄악의 자리에서 떠나는 것이 먼저이며 회개가 먼저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진실한 회개 속에 하나님의 응답이 있음을 알고, 먼저 지나 온 길을 되돌아 보는 신앙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