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8일은 여성의 날입니다. 이를 맞이하여 포지티브한 형태의 기념사를 개인적으로 남기고 싶어졌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여류 경제학자 조안 로빈슨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다들 알다시피 (예전에 비해 조금 나아졌지만) 경제학은 여전히 남초이고 남성적인 성격이 강한 학문입니다. 노벨상 수상자 중 여성은 단 한명도 없고 지금도 학문적 논의를 주도하는 측은 남성이죠. 물론 전공과 직업을 선택하는 것에 직접적 성별 제약이 없는 오늘날에는 이것 자체가 차별의 징후를 보여준다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다만 여성들이 (대안적) 경제학에 대해 더 관심을 갖고 진출하게 된다면 경제학계의 풍경은 다소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조안 로빈슨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여성의 날을 맞아 그를 떠올리게 된 이유는 그가 경제학계에서 희소한 여성경제학자였을 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주류 경제학에 대해 거침 없는 논쟁적 자세를 유지한,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 사이에서도 '원 오브 더 카인드'였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평가했듯이 "조안 로빈슨은 경제학상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긴 여류경제학자였다."
그의 작업을 반추하면 이렇습니다.
<자본축적론>에서는 흔히 단기에만 적용된다고 알려진 케인스의 유효수요이론을 장기성장이론으로 확장했습니다. 사회 전체의 유효수요를 진작하는 것은 장기의 성장에도 유리하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로빈슨의 이론에서 기업의 투자, 내부유보, 임금결정에 의해 경제성장(자본축적) 경로가 결정되며 이들 모두 제도적/정치적/사회적 요인에 영향을 받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 생각하면 기업과 자본에 대한 적절한 사회적 통제를 통해 더 바람직한 성장모델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로빈슨은 수요 측면에서 소비와 투자의 균형이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담보한다는 생각을 개진했습니다. 로빈슨의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 보다 더 지속 가능하고 조화로우며 진보적인 성장과 분배체제가 가능하다고 믿는 경제학자들 상당수가 수용하는 견해입니다.
한편 로빈슨은 <불완전경쟁의 경제학>에서 수요와 공급의 즉각적인 일치에 의해 가격이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며 현실의 가격결정 배후에는 불완전경쟁과 기업의 시장지배력, 과거의 관습에 기초한 미래에 대한 기대, 시간에 걸친 조정과정 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이는 대기업의 시장지배력이 일반적인 상황 속에서 기업의 경쟁과 의사결정에 대한 보다 현실적이고 대안적인 미시이론을 불러오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제가 조안 로빈슨을 접하게 된 계기는 <캐임브리지 캐임브리지 논쟁>이라고도 불리는 이른바 <자본논쟁>이었습니다. 로빈슨은 이 논쟁의 대표적인 논객으로 참여했고 결과적으로 사무엘슨, 솔로우 등으로 대표되는 당시 쟁쟁한 신고전파 주류 남성 경제학자들이 논쟁에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표현대로라면 이들이 '쳐발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 논쟁에 참여한 로빈슨에 대해 '걸크러쉬'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자본논쟁에서 로빈슨은 이질적인 자본재를 '가격'으로 뭉뜽그려 동질적인 생산요소로 취급하고 이윤을 이러한 자본의 한계생산물에 대한 보수로 간주하는 주류경제학의 통념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로빈슨은 자본의 이윤(=한계생산물)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가격을 알아야 하는데 이 자본의 가격이 애초에 설명해야 할 이윤 혹은 이자율과 연동되어 있다는 점에서 신고전파 경제학이 치명적인 순환논리에 빠져 있다는 점을 멋지게 증명했습니다. 로빈슨은 애초에 이윤이 자본의 한계생산성 같은 즉물적 특성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사회적/정치적/제도적 힘관계에 의해서도 결정되는 범주로 보았기 때문에 자본에 관한 주류경제학의 이론적 모순에 대해 가차 없는 태도를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 같은 로빈슨의 행적을 관통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제학의 일련의 가설에 대하여 두 가지의 질문이 요구된다. 그 가설이 다루기 쉬운가, 또 현실세계에 상응하는가?"
저는 이것이 오직 여성만이 던질 수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경제학의 현실설명력이 점차 의문에 부쳐지고 현실 속에서 너무나 명확히 보이는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더욱 예민해진 오늘날 평범한 남녀 모두가 던질 수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조안 로빈슨의 업적과 생애는 대안을 추구하는 경제학도 모두에게 보석과 같이 빛나는 사례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