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껍질 안에 하얀 속이 있는 바나나는 트윙키라는 과자와 함께 Asian-American을 비하하는 은유로 사용된다. 하지만 10여년 살면서 실제로 들어본 적은 없다...
좋아해 마지않는 강남순 교수님의 글(아래)을 읽는다. 한때 나에게도 동방예의지국 어쩌구 류의 국뽕 재료였을 존댓말, 그에서 파생한 복잡한 호칭이 가져오는 사람 사이의 불필요한 위계 등을 이름없는 들꽃을 보면서도 떠올리시는 교수ㄴ... 아니지 이 위압적 호칭을 버려야 하니까 쓰신 글에서처럼 들꽃누나라고 해얄까... 들꽃누나 덕에 오늘도 훌륭한 아무생각거리가 생겼다.
유학 나오기 전에 양키들이 예의에 대해 뭘 알겠냐는 은근한 우월감을 갖고 있었는데 그게 얼마나 다층적으로다가 멍충한 생각이었는지 깨닫는데는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다. 일단 미쿡인들의 어른 공경은 우리랑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에도 우리만큼 복잡한 존댓말이 있고, 다양한 위계를 나타내는 호칭들이 있다 (물론 내가 학교에 있었어서 좀더 그렇게 느낀 부분도 있다). 이를테면 내가 졸업한 과는 박사학위 디펜스를 무사히 통과한 학생들에게 지도교수가 의례 "call me [지도교수 이름]" 라는 축하 인사를 건넨다. 자기와 동급인 박사가 되었으니 자신을 더이상 Professor 혹은 Dr. [지도교수 성]이라고 부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나는 학위 과정 내내 지도교수님을 Dr. Sinnott 이 아닌 Susan 이라고 부르는 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우리 교수님은 디펜스를 마치고 Call me Susan을 까먹고 느무 평범한 Congratulations 이라고 했을 뿐이고... 교수님 나한테 왜그랬어요 ). 하지만 디펜스를 마치고 나서도 학교를 떠날때까지 교수님을 Susan이라고 부르지 못했다. 나중에서야 이메일로 "Dear Susan"을 쓰면서도 심장이 두근두근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무튼, 미국인들도 호칭이 지니는 위계를 잘 알고 잘 사용한다.
그런데 그들의 언어의 특징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게 될때 우리말과 좀더 뚜렸한 대비를 이루는 것 같다. 학교를 떠나 스타텁에서 일하면서는 이름말고 다른 호칭을 쓸일이 없다. 사장도 보스도 다 이름으로만 부른다. 사실 그것보다 더 생경했던 것은 동료들이 가족들을 얘기할때도 이름을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지금의 나는 동료들 가족 이름을 모두 알고 있고, 아내와 아이들을 말하면서 더이상 my wife, my son 등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기까지 Susan 만큼은 아니었지만 쉽지는 않았다. 사람을 역할이 아닌 이름으로 부를 뿐인 작은 차이일지도 모르겠으나 미국인을 대할 때와 한국인들 대할 때의 나'들'은 꽤 다르다. 같은 사건을 놓고도 서로 다른 감정을 동시에 느낄 만큼이나 다르다. 요새는 뭐랄까 '개인적으로 미쿡적으로 생각하지만 한쿡적 마인드가 이해는 된다'는 정도의 스탠스가 많아진다. 점점 바나나가 되는걸까.
<들꽃 철학, 존재의 위계주의에의 저항> 강남순
나는 들꽃을 좋아한다. 오늘 집근처에 있는 '트리니티 강'가를 산책하며 들꽃을 만났다. 꽃집에 있는 화려한 꽃들을 볼 때는 전혀 가지지 못하는 감동을, 나는 들꽃을 만날 때마다 경험하곤 한다. 한국에서 며칠동안 하던 어떤 NGO 모임의 강사로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지내는동안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말고 자신이 불리기를 원하는 닉네임으로 부르는 실험을 한 적이 있다. 한국에서 이름을 부를 때는 성 만을 부를 수도, 이름 만을 부를 수도 없다.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가 곁들이는 'O 박사님,' 'O 실장님, O 부장님 등으로 부르고 불린다. 곳곳에서 이러한 '존재의 위계주의'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평등과 정의'를 모색하는 NGO 모임이라도, 한국의 호명장치는 나이, 성별, 직책과 함께 서로간의 '존재의 위계'를 끝없이 '자연화'하고 재생산한다. 그 모임에서 내가 나의 닉네임으로 쓴 것이 "들꽃"이다.
인간은 꽃의 세계들에도 위계를 만들어 내었다. 꽃들은 저마다 아무런 이유없이 피고 지면서 자신의 생명을 뿜어내고 거두고 하는데, 인간은 그 꽃에 '위계'를 부여했다. 장미, 튜울립, 수선화 등 갖가지 '이름'을 붙여주고, 그러한 이름을 통해서 '비싼 꽃'과 '싼 꽃'의 범주를 만들어서 꽃-세계의 위계를 구성한다. 꽃들과 전혀 상관없이 인간만이 그러한 위계를 구성하여 이득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들꽃'은 무엇/누구인가. 들꽃은 이름도 없고, 꽃가게에서 팔지도 않는다. 그러나 들꽃은 인간의 인위적 관리없이 스스로 피고 진다. 모든 꽃들에 이름이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인간이 만들어내는 그 어떤 권력의 위계구조도 꽃 세계에 들어서기 어렵게 될 것이다.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사회,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인간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권력'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권력은 언제나 '위계'를 형성한다. 위계사회의 전형인 한국에서는 하다못해 출판사와 계약을 하는 계약서에도 "갑"과 "을"이라는 위계적 용어를 쓴다. 영어 계약서에는 '저자(author)'와 '출판사(publisher)'라고 표기되었는데, 한국 계약서에는 저자와 출판사를 '갑'과 '을'로 표기하고 있다. 한국사회 곳곳에서 작동하고 있는 극도의 위계주의가 한국고유의 '갑질'이라는 용어까지 등장하게 하였다. 미디어에 등장하는 것은 재벌가의 '갑질'뿐이지만, 사실상 '갑질'은 재벌가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국사회 도처에서 아주 작은 '권력'만 있어도 사람들은 위계를 만들어서, '갑질'을 하고자 한다. 존재의 위계주의에 너무나 익숙한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한국사회는, 언어구조에서도 작은 저항의 몸짓조차 못하게 한다.
나는 들꽃을 바라볼 때 마다, 그 들꽃의 존재가 이 현실세계의 지독한 위계주의에 고고한 저항을 하는 것처럼 느낀다. 들꽃을 바라보며, 내가 생각하게 된 '들꽃 철학'이다. 다양한 변혁운동을 들여다보면, 인류역사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변화들은 이렇게 이름없이, 그러나 사회 곳곳의 '틈새공간'에서 다층적 위계주의에 작은 몸짓으로라도 저항하는 이들에 의해서 일어났다. 위대한 영웅들이 만들어 낸 변화보다, 이렇게 들꽃처럼 곳곳의 틈새공간에서 만들어내는 작은 저항의 몸짓들을 하는 '들꽃' 같은 이들에 의해서 사실상 인류는 이 세계에서 '평등의 원'을 조금씩 확대하는 '진보'를 이루어 온 것이다.
꾸욱.들렸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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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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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욱.들렸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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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교차가 큰 날씨에요 감기조심하세요^^
비오고 눅눅하고 불쾌지수 높은 날이지만!!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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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고맙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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