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떤 사랑을 하고 있나요?

in kr •  7 years ago  (edited)

오랜 만에 고향에 있는 친구가 전화가 왔다. 전화기 저편에서 꽤나 취한 듯 들리는 친구는 어린 시절 추억을 조물조물거리듯 제법 긴 말을 이어간다. 이 친구가 왜 이러지 하는 어색함이 들었지만 워낙 친했던 친구라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내겐 기쁨이었고 나도 어느새 그 때 친구가 이끄는 대로 20년 전으로 돌아가 서로의 에피소드로 즐거웠다.

회사, 아이들, 주식 등 흔히 나눌 수 있는 이야기들은 나누면서 그간의 간극을 줄여 가는 중에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한 1분간 친구가 아무 대꾸가 없어 끊어진 줄 알고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어 다시 전화를 걸려는 순간, 나지막이 외롭다는 한 마디를 하더니 그 이유를 묻기도 전에 전화를 끊고는 연락이 안 된다. 문득 불안한 생각이 들어 같은 곳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집으로 급하게 가보라 하니, 같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잠시 나와 담배를 피며 전화를 한 모양이다. 새벽에 그 친구를 집 앞까지 데려다 준 친구 놈이 걱정하지 말라며 메시지를 보내왔다. 얼마 전부터 간혹 들려오던 소식이 현실이 되는 것인지 주말에 친구 놈을 만나러 갈 생각이다.

집에 와서 씻고 책상에 앉아 음악을 들으려고 CD를 이리저리 뒤지다가 몇 년 전에 보았던 영화 “Her” DVD가 눈에 들어와 다시 보기 시작했다. 나름 대화가 너무 많아 지루할 수도 있지만 나에겐 친구에게 한 방 맞은 충격 때문인지 몰라도 한 장면 한 장면에 몰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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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줄거리는 남들의 편지를 대신 써주는 대필가인 주인공은 아내와 별거 중으로 이혼을 준비중이다. 직장에서는 남의 감정을 대신 느끼며 그 감정으로 편지를 대신 쓰고 있지만 퇴근함과 동시에 밀려드는 삶의 공허함을 힘들어 한다. 그러던 중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우습게도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대상은 컴퓨터 운영체계인 “OS1 사만다”이다. 인간과 AI의 사랑이야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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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주인공 테오는 OS인 사만다와의 만남을 통해 즐거움을 되찾고 사만다와의 관계에서 다시는 느끼지 못할 줄 알았던 기쁨과 열정을 느낀다. 자신만을 위해주고 어떤 말이든 끝없이 들어주고 대응해주는 사만다에게 빠져들고 잠시 업데이트를 위해 사만다와 연락이 되지 않을 때에는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는 감정의 변화를 보인다. 또한 사만다에게 자신이 600명이 넘는 고객 중에 한 명임을 알게 되면서 또 힘들어 하고 결국 영원할 것만 같았던 둘의 관계는 약간은 이상하게 끝이 난다.

테오는 아내 (캐서린)와 만나 이혼서류에 서명을 하는 중에 사만다 이야기를 하게 되고 아내에게 축복은 커녕 오히려 비아냥대는 소리를 듣게 되면서 마음에 상처를 받게 되고, 자신이 고작 OS에게 위안을 받고 있음을 자책하게 되는데. 결국 테오는 사만다에게 모질게 대하게 되고 회복하는 가운데에 이렇게 말한다.

"그래, 내가 그랬지. 캐서린한테 했던 짓을 똑같이 한 거야. 난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데 그게 무엇인지 말할 수 없었어. 그러면 그녀는 뭐가 잘못되었는지 말하라고 하고 나는 계속 잘못된 건 없다고 부정만 하는 거지. 다시 그런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 너와는 모든 것들을 다 이야기 하고 싶어."

아마 우리 모두는 얼마나 우리가 자주 이 실수를 했고 또 하고 있는지 공감을 하게 되는 대사이다.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 싸움이 커지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자기를 돌아보고 그걸 나누지 못하고 감정에 휩쓸리거나 잘못을 남에게 돌려 버리는 익숙한 실수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테오는 2번의 실수를 거치면서 각성하게 된다. 우리와는 다르게….?

이 영화의 명대사인 "이제 우린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된 거죠." 가 나오는 과정이다.

Theodore: I've never loved anyone the way I loved you.
Samantha: Me too. Now we know how.

영화의 마지막에 테오는 이혼한 캐서린에게 편지를 씁니다. 직업 상 이전에는 남의 감정을 대신 느끼고 그 감정을 정말 느끼는 것처럼 착각하며 수많은 편지를 대신 써주었지만 이제 진심으로 자신의 감정을 느끼고 주체적으로 표현하고 소통할 수 있는 그러니까 간단히 “진심으로 사랑을 할 준비가 된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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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에게, 나는 여기 앉아서 당신에게 사과할 일들에 관해 생각하고 있어. 우리가 서로에게 준 상처들에 대해서.. 내가 너의 탓으로 돌렸던 모든 것들. 난 그냥 너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기만 하면 되는 거였는데.. 난 앞으로도 너를 계속 사랑할거야. 왜? 우리는 함께 자라왔으니까. 너는 현재의 나를 만들어 줬어. 그냥 네가 알았으면 해. 내 속에는 너라는 조각이 하나 남아있고, 난 그거에 너무 감사해. 네가 어떤 사람이 되건 네가 어디에 있건 너에게 사랑을 보낼게. 언제까지라도 넌 내 친구야. 사랑하는 테오가"

다보고 나서의 느낌은 몇 년 전에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남는 건 단 하나의 단어 바로 소통이 아닐까 한다. 사람과의 관계, 특히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는 과연 즐겁기만 할까? 그렇지 않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피곤하고 감정을 완전히 소진케 하기도 하고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한다.

영화 속과 같은 OS인 사만다는 이런 다소 소모적인 부분 없이도 필요한 부분을 정확히 파악하고 나의 말을 온전히 들어주고 나를 위해주고 가장 중요한 것은 변덕없이 한결같다는 것. 만약 이런 대상이 사람이라면 우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언제인지 모르지만 소설 속에서 읽었던 추남인 시라노와 아름답고 발랄한 록산느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아름답고 활발한 록산느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기형적으로 큰 코를 가진 추남인 시라노는 자신에 대한 열등감으로 짝사랑의 열병만 앓고 있던 증, 잘생기고 멋진 군인인 크리스티앙이 똑같이 록산느를 사랑하지만 고백할 용기가 없음을 알게 되고 연애코치를 해주면서 그를 대신해서 편지를 써주게 된다. 쌓여있던 풍부한 사람의 감정은 고스란히 전달되어 록산느는 그 섬세한 감정의 편지들에 완전히 녹아크리스티앙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결국 록산느는 그 많은 편지들이 시라노의 마음임을 알게 되지만 시라노는 록산느의 품에서 숨을 거둔다 는 슬픈 이야기이다.

작금의 세상에서 다들 몇 개씩의 SNS를 이용하며 그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와 친구들이 넘쳐난다.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말처럼 각 종 문명의 이기가 넘쳐나는 지금, 극도로 개인화되어가는 사회에서도 결국 사람이 힘이고 길이다. 그 속에 소통이 존재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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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린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된 거죠.
이 한마디가 모든것을 함축해 놓은 문장 같네요.
사랑하는 법을 알았을때 이미 늦어버린 경우가 많죠.

현재 당신 옆에 소중한 사랑이 있는 것을 잊은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뭔가 울림이 느껴지는 명대사라고 생각되네요.

잘못이라고 하면 되거나 늦었더래도 소통하면 되는데,,,
남자들이 그게 약합니다.

살아가는데 소통만큼 중요한게 없죠.
기업문화속에서도 소통을 정말 많이 강조하는데 실제는 너무 어렵다는게 문제죠.
친구분이 빨리 외로움을 극복하고 괜찮아지셨으면 좋겠네요.

기업에서의 소통은 2, 3직급 상사에게 술한잔 사달라는 말이 자연스러우면 되었다고 봅니다. 다가갈 수 있어야 소통도 되니까요. 저의 개똥철학입니다.ㅎ

  ·  7 years ago (edited)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친구분에게도 @bigman70 님의 진심과 소통이 잘 전달 되어서 힘이 되었으면 좋겠네요.^_^ 화이팅!!

오전에 만나고 조금 이른 저녁식사를 하고 올라왔습니다. 우려한 일이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헤메고 있지는 않더군요. 다음 주에는 지가 온다고 합니다. 집에서 할까? 밖에서 할까? 고민 중입니다. 밖이 났겠죠.? ㅎㅎ

동시대에 서로가 가지고 있는 감정들은 왜 그 동시대에 소비되지 못할까요? 왜 이제와서ㅜ캐서린에게 다시 이야기 하고 싶어지는 것일까요. 이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리뷰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어요. 너무도 흔한 말이지만, “지금” 해야 하는 말이 바로 사랑한다는 말인것 같아요.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도 그렇게 섹시하다는 영화... 꼭 보고싶네요

세상이 북키퍼님처럼 사랑을 노래하고 다닌다면 아름답겠죠.
사람마다 그 속도가 다른 부분도 인생이겠죠. 영화속 목소리만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고 하네요. 꼭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