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제국의 이방인들

in kr •  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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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1년. 유럽은 몽골군의 침공으로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러시아와 폴란드가 순식간에 정복되었고 중세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강국이었던 헝가리군도 모히전투에서 몰살당했다. 결국 몽골군에 저항할만한 나라라고는 중부유럽에선 오스트리아 정도만이 남아 있었다. 오스트리아 마저 넘어간다면 이제 파리가 몽골군의 말발굽아래 놓일 차례였다. 실제로 겨울이 되자 몽골군의 정찰대가 다뉴브 강변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연히 빈의 수비대도 정찰을 강화하고 몽골군의 침입을 대비했다. 그러던 어느날. 다뉴브 강변을 순찰하던 빈의 순찰대는 소규모 몽골군과의 전투에서 몽골군 장교 한사람을 생포했다. 그런데 장교를 심문하기 위해 끌고가던 빈의 군대는 장교의 정체를 알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놀랍게도 그가 영국인이었기 때문이다. 영어뿐 아니라 아랍어와 몽골어까지 할 줄 알았다고 한다. 빈의 군대는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에 당황했다. 분명히 지옥에서온 괴물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들과 같은 유럽인이 끼어 있다니.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당황스러운 상황을 만나면 그 상황자체를 지워버림으로써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할 때가 있다.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빈의 군대는 심문조차 하지 않고 영국인 장교를 처형했다. 결국 그가 어떻게 몽골군에 가담하게 되었는지는 영원한 수수께끼가 되고 말았다.

유럽인이 몽골군에 가담했다고 하니까 이 영국인이 정말 특이한 존재인 것 같지만 이 영국인 장교의 예는 결코 특별한 예외는 아니다. 무식한 야만인 집단일 것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몽골군은 사실 몽골인만으로 구성된 군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몽골군은 그들이 정복한 지역 어디에서나 새로운 동맹자들을 자신의 군대에 합류시켰다. 순수한 몽골인만의 집단이 아니라 무수한 이방인이 원래의 몽골인에 결합한 집단이 몽골군의 실체였던 것이다. 내친김에 13세기 전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몽골군의 구성을 살펴보도록 하자.

가장 중요한 주력군은 물론 몽골초원의 경기병들이다. 몽골초원의 유목민으로 태어나 걷기도 전에 말을 타기 시작하는 이들은 말그대로 타고난 기병이다. 당연히 기마술이 뛰어나고 말위에서 자유자재로 활을 다룰 수 있다. 더군다나 최소한의 보급만으로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능력 덕분에 보급부대가 거의 필요 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자신들이 끌고 다니는 말의 젖만으로도 생존이 가능했다고 한다. 몽골군이 아무런 보급부대도 없이 세상 끝까지 원정에 나설 수 있었던 데는 이들의 놀라운 기동력과 생존능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거의 약점이 없는 무적의 군대일 것 같지만 이들도 약점은 있다. 이들이 경기병이라는 사실 자체가 바로 약점이다. 경기병이라는 단어가 알려주는 것처럼 이들은 거의 갑옷을 걸치지 않는다. 안에는 비단옷을 입고 바깥에는 가죽을 덧댄 매우 가벼운 갑옷을 걸쳤다. 기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최대한 가볍게 입고, 가벼운 장비만을 걸치는 것이다. 그래야 말도 지치지 않고 빠르게 달릴 수 있다. 하지만 갑옷을 거의 걸치지 않으면 방어력이 약해질 수 밖에 없다. 견고한 방어벽을 이루고 있는 보병의 밀집부대를 정면에서 공격하는 것은 이들에게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가능한 정면 충돌을 회피했다. 대신에 활을 이용했는데 몽골군은 관통력 높은 매우 강력한 활을 가지고 있어서 정면 공격을 회피하는 그들의 약점을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고 약점을 감출 수 있는 전술도 개발해냈다. 그들이 사냥터에서 항상 사용하는 방식을 전쟁터로 끌어들인 전술이었다. 우선 사냥터에서 짐승을 몰듯이 적군을 몰아 원형으로 둘러싼다. 몽골군은 적에 비해 월등한 기동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적군은 사냥원진을 활용한 몽골군의 포위망을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곤 엄청난 숫자의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몽골의 활은 우리나라의 각궁처럼 복합재질로 되어있는 작고 가볍지만 강력한 활이었다. 따라서 사거리가 매우 길고 관통력이 높았다. 따라서 이정도 공격만으로도 상당한 살상효과가 있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도 이러한 몽골군의 전술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출전하는 타타르(몽골)병사는 각자 60개의 화살을 휴대할 의무가 있다. 그 가운데 30개는 짧은 화살인데 이것은 적을 움직이기 못하게 하기 위해서 사용한다. 나머지 30개는 긴 화살로 화살촉도 큰데 이것은 근접 거리에서 적병의 얼굴 및 팔을 관통하거나 적병의 활시위를 절단하거나 그 외의 곳에 직접 손상을 가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이 60개의 화살을 모두 써버리면 그들은 칼이나 철퇴, 창을 휘둘러 서로 치는 백병전에 돌입한다... 화살을 다 쏴 버리자 병사들은 각자 활을 화살 통에 넣고 칼과 철퇴를 들고 적에게 돌격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효율적으로 공격해도 결국은 정면공격과 백병전으로 승부를 내야할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몽골의 정복범위가 넓어지고 다양한 전투방식을 가진 적들을 만나게 됨에 따라 정면공격의 필요성도 커져갔다. 몽골군의 전통적인 방식만으로는 해결 할 수 없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순간에 몽골인들의 개방성과 유연성이 빛을 발했다. 몽골인들은 자신이 잘 할 수 없는 분야에서는 꺼리낌 없이 자신이 정복한 이방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자신들만의 전통적인 방식에 집착하거나 자기들끼리의 힘만으로 해결하는 것은 몽골인들의 사고방식과 가장 거리가 먼 방식이었다. 우선 코카서스 산맥의 알란족처럼 전통적인 중기병들을 적극 활용했다. 따라서 몽골군이 백병전 공격을 원할 때는 몽골인이 나서지 않고 여진족, 킵차크 투르크족, 알란족, 러시아인인 루스족(Rus)이 전투에 나섰다. 이민족 출신의 중기병들이 몽골군의 최대 약점을 커버해준 셈이다.

이민족 출신의 중기병들을 몽골군에 받아들이는 것은 또 다른 이점이 있었다. 아무래도 원거리에서 화살을 이용하여 공격하는 전술에 비해 중기병들의 정면 돌격은 아군의 희생도 클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상대방이 유럽의 기사들 처럼 철갑으로 중무장한 상태일 경우 피해는 더 커졌다. 이런 희생이 큰 정면 돌격에 이민족출신 중기병이 참여함에 따라 핵심전력인 몽골군의 희생을 줄일 수 있었다. 총병력이 10만 남짓에 불과한 군대로 전세계를 상대해야하는 몽골군으로서는 전투로 인한 아군의 희생을 최소화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이런 유목민 위주의 군단에 정주민 사회 출신의 군대가 더해졌다. 물론 보병은 아니었다. 몽골군은 기동성을 매우 중시해서 기병으로만 원정군을 구성했기 때문에 보병이 끼어들 여지는 거의 없었다. 대신 기술자들의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공병대가 큰 활약을 했다. 이 이민족 출신 공병대야말로 몽골군이 가진 기술력의 핵심이었다.

몽골군이 공병대의 가치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칭기즈칸이 북중국에 자리한 서하를 공격하면서 부터였다. 초창기 성공격에 애를 먹던 칭기즈칸은 중국인 기술자들이 멀리서 거대한 돌덩어리로 성벽을 부술 수 있는 공성무기를 만들 줄 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전통적으로 유목민족은 자신의 힘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성곽에 강렬한 적개심을 드러내곤 했다. 그 성곽을 무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칭기즈칸은 공성무기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칭기즈칸은 이 무기들을 자신의 군대에 곧바로 도입했다. 무기만 도입한 것이 아니었다. 무기를 만들 줄 아는 기술자를 끌어들이는 것을 더 중요시 했다. 재미있는 것은 몽골군은 항상 무기 그 자체 보다 무기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이다. 근대적인 인권 개념 같은 게 있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더 실용적이었기 때문이다. 전세계를 상대로 전투를 했던 몽골군의 원정거리는 수천Km를 넘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렇게 먼 거리를 원정하는데 만약 무거운 공성무기 같은 것을 끌고 다녔다면 아마 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제풀에 지치고 말았을 것이다. 몽골군은 공성무기를 끌고 다니는 대신 기술자들을 높은 대우를 해주면서 데리고 다녔다. 적의 요새에 도착하면 즉석에서 기술자들이 주변의 목재나 석재등을 활용한 공성무기를 만들어 공격에 착수했다. 적의 요새나 성을 목책을 이용해서 통채로 감싸는 토목공사도 물론 이런 기술자들이 나서서 순식간에 해치웠다. 군대 자체가 일종의 토목공사 전문가 집단이었던 로마군을 제외한다면 이 정도의 토목공사를 수월하게 해낼 수 있었던 군대는 아마 몽골군이 유일할 것이다.

1258년에 있었던 몽골군의 바그다드 포위공격은 이런 몽골군 공병대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전투였다. 1257년 겨울 몽골군이 바그다드로 접근해오자 당시 바그다드를 지배하고 있던 압바스왕조의 군대는 티그리스강 위에 놓인 모든 다리를 불태워서 몽골군의 도하를 저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들의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중국에서 징집된 몽골군의 공병대에게 티그리스강에 도하용 다리를 놓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때 사용된 다리는 물론 반영구적인 교량은 아니었다. 적당한 크기의 배들을 엮고 그 위에 널판지들을 연결한 일종의 배다리를 만들었다. 이 배다리 덕에 몽골군은 신속하게 티그리스강을 건너서 바그다드를 포위할 수 있었다.

포위공격에서도 중국인 공병대의 활약은 눈부셨다. 몽골군은 공성무기를 끌고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공병 부대는 바그다드 부근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해서 즉석에서 공성무기를 만들어야 했다. 우선 키가 큰 야자나무들이 베어져서 초대형 투석기의 재료가 되었다. 이어서 바그다드를 벽으로 둘러싸는 공사가 벌였다. 그런데 바그다드 부근은 숲이 부족해서 목책을 쌓을 만한 나무들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공병부대는 곧 대안을 찾아냈다. 깊은 도랑을 파고 그 흙으로 벽을 만들어서 바그다드를 둘러싼 것이다. 누벽이 완성되자 곧 초대형 투석기들이 거대한 돌덩이와 불덩어리들을 날리기 시작했다. 결국 바그다드 시민들의 저항의지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몽골군이 바그다드에 대한 포위작전을 시작한 게 1월 29일이었는데 2월 3일에는 이미 성벽이 파괴되고 몽골군이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서남아시아 최대의 도시인 바그다드조차 한달을 버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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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몽골군단은 결코 순수한 몽골인들만의 집단이 아니었다. 오히려 몽골인들만의 순수성을 고집했다면 초원에서 일어나 잠깐 빛을 발하고는 사라져갔던 무수한 유목민들의 길을 답습했을 것이다. 하지만 몽골인들은 이방인을 받아들이는데 꺼리낌이 없었고 그랬기에 역사상 가장 넓은 진정한 세계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관용이야말로 몽골제국이 가진 진정한 힘의 원천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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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역사공부 했네요..^^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대한민국이 외국인 이민자를 받아들여야 할까요?

보팅누르고가요.

외국인 이민자를 받아들일까 말까는 이미 선택사항이 아니 것 같습니다. 이미 들어오고 있으니까요. 더 중요한 선택은 그들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