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 없는 성장’이 지속되면서 완전고용은 그 흔적조차 희미한 개념이 되었다. 경제가 성장하면 더 많은 일자리가 생긴다는 상식의 빈자리를 현재 상황이 이른바 ‘뉴 노멀(new normal: 새로운 표준 혹은 규범)’이라는 주장이 채워나갔다. 다수가 고통 받는 상황에서 정부가 무엇이든 해야 하지 않겠냐는 주장은 정부가 일자리를 만드는 일은 비효율적이라는 논리, 혹은 그것이 당장 필요하다고 해도 정부 재정에 여유가 없다는 논리 앞에서 좌절되었다. 그 자리는 결국 어떻게든 각자도생하는 방법을 나열한 자기계발서가 대체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 우울한 상황이 정말로 ‘새로운 표준이자 규범’인가? 정부가 완전고용을 보장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해서는 안 되며, 그럴 능력도 제한되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신선한 답을 제시하는 책이 새로 나왔다. 랜덜 레이(Randell Wray)의 『균형재정론은 틀렸다』는 화폐의 본질을 탐구함으로써 화폐는 물론 정부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주장을 제기한다. 이 책의 원제는 ‘Modern Monetary Theory(MMT)’로 국내에서는 ‘현대화폐이론’이라고 소개된 새로운 경제학 이론의 입문서이다. 하지만 현대화폐이론의 중요한 함의 중 하나가 정부 재정의 균형(balance) 추구에 얽매이는 정책 처방은 어리석다는 것이기에 옮긴이는 위와 같은 제목을 선택한 것 같다.
현대화폐이론은 아직 국내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론이다. 2015년 시사인에 현대통화이론이라는 제목으로 짧게 소개된 적이 있다. 지난 미국 대선의 민주당 경선 후보였던 버니 샌더스에게 경제적 조언을 해준 학자가 현대화폐이론을 지지하는 학자 중 한 명인 스테파니 칼튼이라는 소식과, 제레미 코빈 영국 노동당 당수도 현대화폐이론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정책에 반영할 수 있다는 소식 때문에 이 비주류 경제학 이론에도 어느 정도 관심이 쏠린 것 같다. 하지만 그 이후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현대화폐이론을 자세히 소개한 글은 찾아보기 어렵다. 비교적 낯선 이론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에서 현대화폐이론과 관련된 논의를 들어본 사람들은 이 이론에 대한 몇 가지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흔했다. 안타깝게도 이는 이론에 대한 정당한 비판이 아니라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글에서는 필자가 접했던 대표적인 오해 3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이런 오해에 대한 수정은 철저하게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였다.
오해 1: 현대화폐이론은 ‘통화를 찍어내는’ 방식으로 정부 지출을 무한정 늘려도 괜찮다는 주장이다. 이는 정부 지출이 초래하는 다른 거시경제변수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은 이론이다.
현대화폐이론에서는 정부 지출이 조세 수입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부 지출이 선행한다고 본다. 저자에 따르면 주권 통화를 발행하는 주권 정부와 일반 가정이나 기업을 지배하는 경제 논리는 다르다. 정부는 “자국 통화로 가치가 매겨진 채무에 관한 한, 만기가 돌아올 때마다 언제든 모두 지불할 능력”(p.47)이 있다. 정부는 필요한 만큼 주권통화를 발행할 수 있다. 저자는 중앙은행의 통화 창출 과정은 결국 각 민간은행과 민간 경제 주체의 은행 계좌에 해당 금액을 입금해주는 과정이며 이를 ‘엔터키를 누르는 과정’으로 직관적으로 비유한다. 하지만 정부가 언제나 ‘엔터키를 누를 수 있다’는 것이 언제나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저자도 정부 지출에 제약을 가해야 할 이유로 지나친 지출이 야기할 수 있는 인플레이션과 환율 압박, 민간이 써야 할 자원의 고갈, 경제적 유인(인센티브)의 왜곡 등을 언급한다. 더불어 정부가 예산을 작성하는 것이 정부 지출의 책임성을 담보하는, 스스로에게 가하는 제약이라는 점도 분명히 명시한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자국 통화로 발행한 정부 부채를 결국 상환하지 못해 정부가 비자발적으로 파산하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는 점이다. 정부 지출을 현명하게 활용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오해 2: 현대화폐이론은 미국처럼 기축통화의 주권국화 혹은 국제적으로 널리 가치가 인정되는 일부 선진국에 국한된 이론이다. 때문에 소규모 개방경제인 대한민국에서는 적용하기 힘들다.
현대화폐이론 이론의 주춧돌인 민간과 정부 대외경제부문의 거시경제 회계 항등식(각 부문의 적자와 흑자를 모두 합하면 0이 되는 항등식 관계)은 모든 나라에 적용된다. 물론 미국의 달러화 표시 자산이나 다른 ‘강력한 통화’로 표시된 자산은 그렇지 못한 국가의 통화로 표시된 자산보다 더 선호되며, 이 때문에 일부 개발도상국은 주권 통화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화로(이를테면 달러화) 채무를 발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변동환율제를 채택한 상황에서 자국 통화로 정부 부채를 발행하는 주권 통화 사용 국가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게임의 규칙을 적용받는다. 때문에 현대화폐이론의 국내 정책 함의와 국제 경제 함의는 대한민국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내용이다. 오히려 현대화폐이론의 분석은 1990년대 후반 동아시아와 러시아를 강타한 외환위기, 2000년대 초반까지 지속된 아르헨티나 경제 위기는 물론 2010년 이후 유로존 위기를 이해하는 더욱 설득력 있는 분석틀을 제시한다. 이 글에서 모두 소개할 수는 없지만 책 본문에는 국제 경제를 분석함은 물론 관련 정책을 고려할 때 참고해보아야 할 유용한 시각이 많이 소개되어 있다.
오해 3: 국내에 소개된 바대로, 현대화폐이론은 진보적 정치세력을 위해 고안된 이론이다. 때문에 객관적인 이론이라기보다는 이념적으로 편향된 이론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은 모든 사회과학 이론은 특정한 가치를 추구하며, 특히 정책 제안에 있어 ‘가치중립적인’ 처방이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꽤 논쟁적인 주장일수도 있겠지만 좀 더 직접적인 방법으로 이 오해를 풀 수도 있다. 저자는 명확하게 현대화폐이론이 우파 정치인에게도 채택 가능한 이론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8장의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을 신봉하는 이들을 위한 MMT: 자유지상주의자도 ‘일자리 보장 프로그램’을 지지할 수 있을까?”라는 절에서 현대화폐이론이 큰 정부를 옹호하는 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유지상주의자(libertarians) 혹은 작은 정부를 추구하는 입장에서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이론임을 강조한다. 현대화폐이론은 단지 주권통화와 이를 바탕으로 한 정부 지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묘사한 이론이며, 이를 적용하는 것은 현실 정치인의 몫이다. 저자의 말을 직접 인용하자면 “화폐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응용하여 정부의 정책 형성에 대해 합리적인 분석을 가하는 것"(p.489)이 목표이므로, 변동환율제도를 따르고 주권통화를 사용한다는 기본적인 전제만 충족시킨다면 선호하는 정부의 크기와 상관없이 현대화폐이론을 참고한 경제 정책 처방이 가능하다.
위에 설명한대로, 현대화폐이론에 관한 오해는 저자의 논의를 충분히 따라간다면 대부분 해결된다. 필자는 현대화폐이론의 주창자들은 구체적인 정책 지향점을 제시하는 목표 이상으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주권통화의 작동원리를 ‘기능적 재정’의 관점 아래에서 일관된 흐름으로서 묘사하는 데 더욱 집중하고 있다는 인상까지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화폐이론이 설명하는 화폐와 주권 정부에 대한 설명은 지금까지 필자를 비롯한 거의 모든 이가 기존에 접했던 경제학 이론에서 ’이단‘이라고 부를 만큼 새롭다. 또한 옮긴이 해제를 인용하자면 “새로운 경제 질서와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수많은 이들의 성난 목소리"(p.32), 더 쉽게 표현하자면 기존 경제학의 처방에 지치다 못해 질려버린 이들에게 반가운 시각이다. 때문에 필자는 현대화폐이론이 국내에서도 지금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고, 논의되어야 할 가치가 충분하며, 다행스럽게도 이 책이 그 마중물 역할을 훌륭히 해주리라고 기대한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팔로우하고 앞으로도 구독 꾸준히 하겠습니다
저도 팔로우 받을수있을까요?ㅎㅎ
Downvoting a post can decrease pending rewards and make it less visible. Common reasons:
Submit
안녕하세요. 글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팔로우 하고 앞으로 올려주시는 글 즐겁게 읽어보겠습니다!
Downvoting a post can decrease pending rewards and make it less visible. Common reasons:
Subm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