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회사생활이 어렵다. 부서를 옮기고 나서 일복이 넘쳐난다. 그나마 오늘은 나름 9시 전에 퇴근했으니 매우 기분 좋은 날이다. (정말 기뻐해야 하는건가) 난 분명 일 미루지 않고 최대한 호의를 갖고 열심히 하자는 주의인데, 시스템이 얽혀있는 업무는 혼자 북치고 장구친다고 뚝딱 되는 일도 아니고 절차도 내용도 참 복잡하고 어렵다. 이렇게도 쉽게 살기가 어렵다.
새 부서로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폭탄을 안고 살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지만 가장 중요한 건 미리 낙담하지 말고,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하고, 다만 업무경과나 고민은 널리널리 알리고 고민하는 것. 괜히 아무도 모르게 묻었다가 due 닥쳐서 뒤늦게 손들지 말고, 내 힘으로 되는 건 어떻게든 되게 해내고 혼자 해내기 어려운 건 어렵다고 미리 손들자. 그리고 어떤 내용이든 의사소통을 할 때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 봐도 이해하기 쉽도록 명료하고 간결하게 해서 공유. 괜히 내 잘못도 아닌 일에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되, 할 수 있는건 최선을 다하자. 물론 보고싶은 영화가 산적한 요즈음 삼일절 출근이 이미 확정된건 슬프긴 하지만 통제할 수 없는 일에 대해 너무 슬퍼하지도 말자.
가끔 바쁜 일상 속이지만, 마음 깊이 새겨뒀던 박완서 선생님의 좋은 글을 떠올려본다. "현재의 인간관계에서뿐 아니라 지나간 날의 추억 중에서도 사랑받은 기억처럼 오래가고 우리를 살맛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건 없다." 그러니, 아무리 바쁜 와중이라도, 늘 계속해서 꿈꾸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 생각하고 노력하자.
행복하게 사는 법 – 박완서 (‘노란집’에서)
젊은이들 앞에서 늙은이 티를 내기는 싫지만 나이를 먹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닥치는 피할 수 없는 운명도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부끄러워할 것도 자랑스러워할 것도 없이 내가 요즘 겪고 있는 노쇠현상 중의 하나를 솔직하게 털어놓으려고 한다. 워낙에 초저녁잠이 많고 아침잠이 없는, 소위 아침형 인간에 속했는데 그게 요즘 더 심해져서 아홉 시 뉴스를 보다가 반도 못 보고 잠자리에 든다. 그러고는 새벽 너덧 시만 되면 깨어난다. 아마 여섯 시간쯤은 꿈 없는 단잠을 자는 것 같다.
전에는 그렇게까지 일찍 깨어나지 않았고, 눈 뜨자마자 시계 먼저 보면서 이른 아침이면 시간을 번 것처럼 옳다구나 벌떡 일어나 어제 못다 한 일들을, 주로 원고 쓰는 일이지만, 계속하다가 해 뜨면 마당에 나가 잔디 사이의 잡초 뽑기, 새로 핀 화초하고 눈 맞추기 등 정원 일을 하며 부지런을 떨었다. 찾아오는 사람도 걸려오는 전화도 없는 아침 시간엔 머리도 맑아 그 시간을 가장 능률적으로 보람 있게 보낼 수 있는 걸 은근히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 시간에 내려서 마시는 원두커피 향은 또 왜 그리 좋은지, 이 맛에 살아, 한낱 커피 향을 가지고 그렇게 외치고 싶기까지 했다.
그러나 근래 몇 년 사이에 그 버릇도 많이 바뀌게 되었다. 새벽부터 부지런 떠는 일 없이 마냥 자리에 누워 게으름을 피우게 된다. 누워서 두서없이 하는 생각은 앞으로의 계획이나 소망이 아니라 주로 지난날의 추억이고, 그중에도 현재의 나에서 가까운 지난날이 아니라 아주 먼 어린 날의 추억이다. 최근의 일은 어제 일도 잘 기억 못하는 주제에 어릴 적 일은 세세한 것까지 잘 생각이 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내가 반추하는 건 주로 사랑받은 기억이다. 나는 문명과는 동떨어진, 농사짓고 길쌈하고 호롱불 켜고 바느질하고 사는 산골 벽촌에서 태어났다. 물질적으로 넉넉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으니 요샛말로 하면 결손가정이었다.부족한 것 천지였다. 넉넉한 건 오직 사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움받거나 야단맞은 기억은 없고 칭찬받고 귀염받은 생각밖에 나는 게 없다. 그게 이른 새벽 잠 달아난 늙은이의 마음을 한없이 행복하게 해준다.
어린 날의 추억이 아무리 달콤하다 해도 기억이 미치는 한도는 대여섯 살까지가 고작이고 젖먹이 때 일이나 그 이전, 태어날 때 처음 본 가족이나 이 세상의 첫인상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까지도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엄마로부터 들은 이야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들어가고 나서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30년대는 일제 식민지 치하였다. 창씨개명은 하기 전이었지만 한자로 된 우리이름을 일본식으로 발음해서 불렀다. 학교 가기 전에 집에서 꼭 배워 가야 할 것이 자기 이름을 한자로 쓰는 거였다. 선생님이 출석부 부를 때도 물론 그 한자 이름을 일본식 발음으로 바꿔 불렀다. 일학년 때도 시험 치는 일이 잦아 시험지에 이름을 쓸 때마다 나는 고민도 되고 짜증도 났다. 복잡하고 획수가 많은 내 한자 이름은, 이름을 기입하라고 마련된 네모칸 빈칸을 빠져나오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집에 가서 엄마한테 내 이름이 너무 어렵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더니 엄마가 하시는 말씀이, 나는 밤 열두 시에 태어났는데 여자아이를 순산했다는 소식을 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두 분이 그때부터 밤새 머리를 맞대고 옥편을 찾아가며 지으신 이름이 내 이름이라는 거였다. 그 후 다시는 내 이름에 대한 불평을 안 하게 되었다. 불평은커녕 새 생명을 좋은 이름으로 축복해주려고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을 두 남자, 점잖고 엄하기로 집안에서뿐 아니라 마을에서도 알아주는 상투 튼 할아버지와 젊은 아버지를 떠올리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존중받고 사랑받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 시절만 해도 남녀차별을 많이 할 때였다. 특히 시골에서는 더했다. 시골 동무들 중에는 ‘간난이’, ‘섭섭이’ 등 어린 마음에도 아무렇게나 성의 없이 지은 것 같은 이름을 가진 아이도 많았다. 그런 아이들에 비해 나는 특별한 대접을 받고 태어난 것처럼 느꼈고,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지만 나는 결코 불쌍하지 않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존중할 수 있는 자부심이 생겼다.
아버지는 일찍 여의었지만 조부모님과 두 숙부님 내외와 고모까지 한집에서 사는 대가족이었다. 사촌이 생기기 전까지 집안에 어린애가 나 하나뿐이어서 귀염도 많이 받았지만 어리광이 심하고 음식도 많이 가리고 누가 조금만 나한테 언짢게 해도 할머니한테 일러바치는 질 나쁜 고자질쟁이였던 것 같다. 한번 울기 시작하면 목이 쉴 때까지 그치지 않는 고약한 성질 때문에 애먹은 얘기를 숙모들한테 많이 들었다. 그런 나쁜 버릇을 서서히 고쳐준 것도 엄마였다고 생각한다. 학교 갔다 와서 동무들하고 싸우거나 이지메당한 얘기를 하면서 그 동무를 미워하고 욕하면 엄마는 내 역성을 드는 대신, 그러지 말고 그 동무 좋은 점을 한 가지라도 찾아보라고, 며칠이 걸리더라도 그런 마음으로 동무를 대하면 반드시 한두가지는 좋은 점이 보일 거라고 하셨다. 그렇지만 어리광이 몸에 배고, 고자질하기 좋아하는 고약한 버릇에 누구 편도 안드는 그런 말씀이 먹혀들 리 없었다.
그러나 일러바쳐야 소용이 없다는 걸 알게 되고부터 차츰 고자질하는 버릇은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엄마한테 귀가 따갑게 들은,남의 좋은 점을 찾아내면 네 속이 편하고 네 얼굴도 예뻐질 거라는 잔소리는 철들고 어른 되어, 엄마한테 그런 소리를 안 듣게 된 후에 오히려 더 자주 생각나고, 어떡하든지 지키고 싶은 생활신조 같은 것이 되었다. 그리고 엄마가 나한테 하신 것과 똑같은 잔소리를 내 아이들에게 하게 되었고, 내 성질까지 정말 그런 사람이 된 것처럼 느낄 때가 많다.
남의 좋은 점만 보는 것도 노력과 훈련에 의해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단언할 수 있으니 누구나 한번 시험해보기 바란다. 남의 좋은 점만 보기 시작하면 자기에게도 이로운 것이 그 좋은 점이 확대되어 그 사람이 정말 그렇게 좋은 사람으로 변해간다는 사실이다. 믿을 수 없다면 꼭 한번 시험해보기 바란다.
옛 성현의 말씀 중에도 이런 게 있다. ‘이 세상 만물 중에 쓸모없는 물건은 없다. 하물며 인간에 있어서 어찌 취할 게 없는 인간이 있겠는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 있다면 그건 아무도 그의 쓸모를 발견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발견처럼 보람 있고 즐거운 일도 없다. 누구나 다 알아주는 장미의 아름다움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도 좋지만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들꽃을 자세히 관찰하고 그 소박하고도 섬세한 아름다움에 감동하는 것은 더 큰 행복감이 될 것이다.
우리 삶의 궁극적 목표는 행복이다. 행복하려고 태어났지 불행하려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각자 선택한 행복에 이르는 길은 제각각 다르다. 돈만 많이 벌면 행복해지리라 믿는 사람도 있다. 그리하여 누구는 돈을 벌기 위해 일상의 사소한 기쁨은 희생하고 일만 하다가 저녁이면 돈을 세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돈 세는 일은 갈증난 이가 소금물 마시듯이 잠시의 목마름은 채워줄지 모르지만 곧 더 목말라진다. 그래서 하루하루 더 욕심에 쫓기어 휴식을 모른다.
권좌에 오르고 싶은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권좌라는 사닥다리엔 정상이 없다. 설사 나 외엔 윗자리가 없는 정상에 올랐다고 치자. 그러면 그 자리를 더 오래 혼자서 누리고 싶은 욕심에 뒤에서 기어오르는 모든 사람을 적대시하고 발길질하며 전전긍긍하게 될 것이다. 미처 정상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말이다.
최고의 부자, 최고의 권력자도 시시하게 여길 수 있는 게 아마도 학문이다 예술일 것이다. 그러나 미나 진리의 추구처럼 천부의 재능 없이는 끝이 안 보이고 분야가 없고, 설사 재능이 있다고 하여도 좌절과 절망을 일용할 양식 삼을 각오가 돼 있지 않으면 도전하기 힘든 분야가 그 분야라고 생각한다. 어떤 전문 분야나 마찬가지이다. 중고등학교 땐 좋은 대학만 들어가면 성공한 인생을 반쯤 달성한 줄 알지만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세상 사람이 알아주는 대학을 나올수록 가족이나 세상 사람의 기대치도 높아진다. 기대에 못 미칠 때 일류학벌이 도리어 열등감이 된다. 열등감처럼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게 없는데, 그건 그 사람이 처음에 우월감의 맛을 보았기 때문이다. 으스대는 쾌감을 알기 때문에 아무도 안 알아주는 입장을 참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부자가 되거나 권세를 잡거나 전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 개인의 특별한 능력이듯이 행복해지는 것도 일종의 능력이다. 그리고 그 능력은 성공한 소수의 천부적 재능과는 달리 우리 인간 모두의 보편적인 능력이다. 창조주는 우리가 행복하길 바라고 창조하셨고, 행복해할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춰주셨다. 나이 먹어가면서 이를 실감하게 되는데 그것이 연륜이고 나잇값인가 보다.
하늘이 낸 것 같은 천재도 성공의 절정에서 세상의 인정이나 갈채를 한몸에 받는다 하지만 그 성취감은 순간이고 그 과정은 길고 고되다. 인생도 등산이나 마찬가지로 오르막길은 길고 절정의 입지는 좁고 누리는 시간도 순간적이니 말이다. 이왕이면 과정도 행복해야 하지 않을까. 인생은 결국 과정의 연속일 뿐 결말이 있는 게 아니다. 과정을 행복하게 하는 법이 가족이나 친척, 친구, 이웃 등 만나는 사람과의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불행의 원인은 인간관계가 원활치 못한 데서 비롯된다. 내가 남을 미워하면 반드시 그도 나를 미워하게 돼 있다. 남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나는 잘못한 거 없는데 그가 나를 싫어한다고 여기는 불행감의 거의 다는 자신에게 있다. 자신이 그를 좋아하지 않고 나쁜 점만 보고 기억했기 때문이다.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다는 소리와 다름이 없다. 처음에도 말했듯이 인간관계 속에서 남의 좋은 점을 발견해 버릇하면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어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기적이 일어난다.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받을 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이세상에 없다. 그런 인간을 하느님이 창조하셨을 리가 없다.
현재의 인간관계에서뿐 아니라 지나간 날의 추억 중에서도 사랑받은 기억처럼 오래가고 우리를 살맛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건 없다. 인생이란 과정의 연속일 뿐, 이만하면 됐다 싶은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니다.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사는 게 곧 성공한 인생이다. 서로 사랑하라고 예수님도 말씀하셨고 김수환 추기경도 말씀하셨다. 그 말씀은 너희 모두모두 행복하라는 말씀과 다름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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