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무언가를 향한 강렬한 욕망을 느낀다. 보통 그 무언가는 굉장히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오늘은 파파이스 닭달버거를 먹어야 해’라고 생각하여 하루종일 햄버거를 갈구하다 결국 ‘닭달버거 세트 하나요’를 외치게 되고, 길을 걷다 뜬금없이 ‘아 지금 페퍼톤스 검은 우주를 들어야 해’ 라는 생각이 들어 허겁지겁 주머니에 있는 엉킨 이어폰을 꺼내 풀지도 않고 핸드폰에 엉거주춤 꽂아 노래를 재생해야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
그리고 오늘. 난 거의 매일 이유 없이 코피를 흘리는 코피인이라 아침에 땅콩을 까먹다 코피기를 느끼고 화장실로 향하다 급 욕망이 솟았다.
‘지금 라쇼몽을 보고싶어...!’
그래서 봤다. 라쇼몽.
내가 라쇼몽을 처음 접한 건 중학교 때로, 지금 생각은 안나는데 그 당시 좋아하던 한 뮤지션이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들을 정리해놓은 리스트가 있었고 라쇼몽은 그 리스트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영화들 중 하나였다. 그리하여 그 때 처음 이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오색찬란 풀에이치디에 익숙한 중학생에게 일본 고전 흑백영화는 넘기 어려운 벽이었다. 그래서 먼 훗날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읽는데 내가 본 적 없는 영화인 줄 알았다. 어쨌든 이런저런 이유들로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아니...? 이 영화...? 재밌어...! 그렇다. 매우 재미있었다. 영화를 본 후에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필모를 훑으며 찬양할 정도로 재미있었다. ‘8월의 광시곡’은 빼고. 안보길 추천한다.
비가 쏟아지는 날, 비를 피하기 위해 허름한 라쇼몽 밑에 모인 세 사람(승려, 나무꾼, 하인)이 있다. 곧 이들은 어떤 살인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산에 간 나무꾼은 칼에 찔려 죽은 사무라이를 발견하였고 칼은 현장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그에 연루된 네 사람이 관아에 모였는데 모두가 다른 진술을 말한다. 누구의 이야기가 진실인가? 유일한 진실은 존재하는가?
먼저 강가에 쓰러져있던 도적 타죠마루를 한 행인이 신고해 체포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증언을 시작한다. 자신이 사무라이를 기습해 그의 아내를 겁탈하였고 그의 아내는 자신의 수치를 두 남자가 아는 것은 안된다며 둘의 싸움을 부추기고 이긴 자에게 가겠다 말한다. 사무라이와 스물세합의 치열한 결투를 벌인 끝에 자신이 승리하였으나 여자는 도망가고 없었다 한다.
그 뒤로 사무라이의 아내 마사코가 잡혀왔고 증언을 한다. 겁탈 당한 후 타죠마루는 도망가고 남편 사무라이가 자신을 경멸의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에게 단도를 내밀며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 부탁하다 쓰러진다. 정신이 들었을 땐 이미 사무라이는 단도에 찔려 죽어있었다. 그 후 연못에 몸을 던지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말한다.
그리고 죽은 사무라이가 무녀에 빙의되어 증언을 한다. 아내를 겁탈한 도적은 아내를 꼬드겨 함께 가자고 한다. 아내가 도적에게 남편을 죽여야 자신이 갈 수 있다고 하자 그 말에 충격을 받은 도적은 여자를 쓰러뜨린 후 여자를 어떻게 할지 묻는다. 그 사이 아내는 도망갔고 자신은 도적을 용서하지만 배신감과 절망감에 아내의 단도로 자결한다. 얼마 후 누군가가 그 단검을 뽑아가는 것을 느꼈다고 말한다.
모두가 다른 증언을 하여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 후 나무꾼은 라쇼몽에 모인 승려와 하인에게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한다.
사무라이의 아내를 겁탈한 도적은 그녀에게 자신과 결혼을 하자며 애원하지만 여자는 둘이 결투를 하여 이긴 쪽에게 가겠다 한다. 사무라이가 이런 여자는 필요 없다며 무시하자 도적 또한 흥미를 잃자 여자는 둘의 승부욕을 자극해 싸움을 붙인다. 도적과 사무라이는 으아아 소리지르며 허공에 칼을 찌르고 넘어지고 굴러다니며 아주 추하게 싸운다. 사실 여기가 제일 재밌다. 하여튼 혈투 끝에 도적이 운 좋게 이기게 되지만 여자는 도망친다.
가장 진실에 가까운 증언은 결국 제 3자인 나무꾼의 증언일 것이다. 뭐 나무꾼도 결국 자신이 단도를 훔쳐간 것을 숨기다 들켰지만. 저들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자신에 대해 정직할 수 없다. 나를 조금이라도 더 좋게 포장하기 위해 미화와 거짓말을 해가며 애를 쓰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진실이 진실이 아닐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과연 절대적 진실은 무엇인가 고민하게 되고 나만의 진실을 뽐냈던 과거에 몸이 절로 수그러들게 된다. 영화 볼 때는 ‘하핫 저런 거짓말쟁이들~ 아주 다 대단하고만~~’ 하는데 끝나고 생각해보면 나도 저런 사람들인 것이다.. 그래서 참 찝찝한 영화이기도 한데 그래서 더 대단하다. 영화 중간중간 은근하게 나오는 승려는 마지막에 나무꾼이 비록 단도를 가져갔으나 버려진 아이를 데려갔기에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며 해피엔딩 아닌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나는 이를 ‘아니야 그래도 인간이 아직 완전 쓰레기는 아니야’라는 감독의 손톱만한 인류애가 아닐까 생각한다. 마치 온갖 사이코패스와 범죄자들이 판치는 사회에서 은은하게 가끔 나오는 훈훈한 기사들을 보는 기분, 그와 비슷한 것이다.
이 영화는 이런 철학적 문제들을 담으면서도 매우 재미있다. 1950년 작으로 매우 오래되었음에도 보면서 오... 오...? 오...?? 오...??? 이런 감탄사들을 내뱉게 될 만큼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런 서사뿐만 아니라 영상과 연출 그 자체로도 매력이 넘친다. 흑백임에도(혹은 흑백이기에) 강렬하고 역동적이며 은근 파격적인 카메라 그리고 음악까지. 명작은 시대를 뛰어넘는다고 하는데 라쇼몽은 100년 후에 봐도 촌스럽지 않을 것 같다. 저작권도 풀려서 유튜브로 손쉽게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한 시간 반을 가치있게 재미있게 산뜻하게 훈훈하게 보내고 싶다면 모두 유튜브에 라쇼몽을 검색해주십쇼!
저도 얘기만 들은 영화인데 언젠간 꼭 봐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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