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령산/서리산 찾아, 몽환의 숲길을 걷다.

in kr •  5 years ago 

5월 숲은 하루가 다르다. 여린 연녹 이파리들은 어느새 짙푸르러 싱그럽다. 그래서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했던가.

남양주 축령산과 서리산은 접근성이 좋지 않은 편이다. 수년 전 어느날, 승용차를 운전해 이 산을 찾은 적이 있다. 마석에서 현리 가는 362번 국도를 따라 달리다가 수동면 외방리에 이르러 축령산휴양림 이정표가 가리키는대로 우회전해 채 100m나 진입했을까, 차량진입을 통제했다. 그냥 도로가에 세워두고 걸어 가란다. 산아래 주차장까진 2km도 더 남았는데... "주차장은 협소한데 차량들은 넘쳐나니 도리없다"고 했다.

이번엔 동문산악회 밴드에 축령산 산행 공지가 올랐길래 맨 먼저 '참석' 꼬리를 달았다. 축령산의 암릉과 서리산의 철쭉이 궁금했는데 맞춤 공지였다. 이동 방법은 상봉역에서 만나 경춘선 타고 마석역으로, 마석역에서 택시에 분승해 축령산 입구로 가는 것이다.

마석역에서 일행 열둘은 택시 3대에 4명씩 나눠 탔다. 요금은 대당 1만 5천원, 시간은 25분 소요되었다. 끄물거리는 날씨인데도 축령산 초입은 산객들로 붐볐다. 서리산의 5월 철쭉이 산객들을 불러들인 것이다. 휴양림 주차장은 이미 만차라 초입에 있는 축령산명상센터 앞에서 차량을 통제했다.

휴양림 매표소를 지나 오른편 통나무 데크 사이로 난 길을 오른다. 수리바위, 남이바위를 지나 곧장 축령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벌써 등어리가 축축하다. 울창한 잣나무 숲길로 들어서자, 숲안개 자욱하고 피톤치드 '뿜뿜'이다.

축령산 서릉인 수리바위 능선에 올라선다. 능선 이정표는 수리바위 0.32km, 남이바위 1.27km, 정상 1.99km를 알린다. 능선에 올라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10여분 능선길을 따라 오르니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잘 생긴 바위가 길을 가로 막는다. 독수리형상을 닮았다 하여 '수리바위'다. 이 바위를 보고 실제로 독수리가 많이 날아 들었다고 한다. 금방이라도 날개짓을 할 것만 같은 수리바위다. 바위 아래는 아찔한 낭떠러지다. 조금씩 산 맛을 알아가고 있는 후배 C가 천길단애에 서더니 인증샷을 부탁했다. '후덜덜'하면서도 탄성 연발이다.

수리바위를 지나면서 부터 오밀조밀한 암릉구간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어제 내린 비 탓에 지면은 질척하고 바위면은 미끄럽다. 흙물에 더럽혀진 바짓단에, 윗도리도 바윗면에 쓸려 완전 거지꼴이다.
몇해 전 5월, 홀로 산길 걷다가 이곳 수리바위에 주저앉아 저 멀리 천마산을 눈에 담았었는데... 오늘은 사방이 뿌옇다.
햇볕에 달궈진 바위면이 온돌처럼 따스해 눈꺼풀이 스르르 내려 앉았었는데... 오늘은 으스스 춥다.

수리바위에서 10여분 진행하면 능선삼거리다. 삼거리 이정표는 0.63km 남이바위, 1.35km 축령산 정상을 가리킨다. 자욱한 비안개로 어둑한 암릉길이다. 앞선 산객들이 멈춰섰다. 로프에 몸을 실어야 하는 암벽 구간을 맞닥뜨린 것이다. 여성 산객들이 많아 암벽구간의 진행 속도가 더딘 듯 했다. 왼쪽 산비탈 나무 뒤로 우회길이 설핏 보였다. 마냥 기다릴 뻔 했다. 암벽 대기 줄을 추월해 왼쪽 비탈로 내려섰다. 여기서 다시 길은 갈라지는데 오른쪽으로 올라붙어야 다시 능선길에 합류할 수 있다. 일행 중 산 좀 탄다는 P는 산들머리에서부터 줄곧 앞서가더니 여기서 엉뚱한 길로 빠졌던 모양이다. 얼마 후 남이바위를 지나는데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뒤따라 붙었다. '알바'를 빡쎄게 한 표정이다.
"따라 잡을 수 없게 앞서 가더니, 어떻게 된 건가?"
"하이고, 말도 마이소. 한참 가다보니 앞에도 뒤에도 따르는 사람이 없더이다. 그제서야 아차! 싶었지요. 되돌아 걸으며 바위에 쓸리고 가시덤불에 긁히며 겨우 따라잡은 거요"
흰색 셔츠는 흙범벅이고 얼굴은 온통 땀범벅인 P가 길 잘못 들어 헤매느라 식겁한 얘기를 토해냈다.

간간이 후드득 나뭇잎을 때리던 빗방울이 잠깐이지만 싸라기눈으로 바뀌었다. 달랑 한여름용 냉감셔츠만 입었는데 ㅠ

움푹 패여 편안한 의자처럼 생긴 남이바위 위에 섰다. 발아래 짙은 운무는 수동면 일대를 삼켜 버렸다. 맑은 날이었다면 천마산과 운길산 능선이 또렷하게 조망되는 곳인데, 천지가 잿빛이다.
세조의 총애로 승승장구 하던 남이장군, 이후 예종이 즉위한지 얼마 안되어 평소 그의 재능을 시기하던 유자광이 반역을 꾀한다고 아뢰어 스물여덟 나이에 주살됐다. 그 남이장군이 자주 이 바위에 올라 앉아 호연지기를 길렀다 하여 ‘남이바위'로 불리워지고 있다.

남이바위에서 축령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간간이 밧줄의 힘을 빌어야 한다. 암릉 묘미가 쏠쏠한 구간이다.
드디어 축령산 정상(886m).
비좁은 정상엔 자그마한 돌탑, 그리고 정상표시석을 앞세워 인증샷을 담으려는 산객들로 시끌벅적하다. 사위를 둘러 산세를 살펴보았으나 온통 잿빛 일색이라 미련없이 떠밀리듯 산정을 내려섰다. 축령산에서 북쪽능선을 따라 서리산 방향으로 향한다. 산비탈을 내려서자 촘촘하게 치솟은 잣나무들이 찐하게 반긴다. 숲향이 그윽했다.
안부 절고개를 지나 서리산 오르는 완만한 능선길이 호젓하다. 가던 길 멈추고 두릅을 찾느라 눈에 불을 켠 산객도 눈에 띈다. 무단 채취는 불법인데...

너른 헬기장 한 켠에 터를 잡고서 배낭을 내렸다. 십시일반 준비한 간편식을 꺼내놓고 빙 둘러 앉았다. 여기에 신문지에 돌돌 말아온 곡차?를 곁들이니 다들 세상 부러울 게 없다는 표정이다.

자욱한 비안개는 걷힐 기미가 없다. 하지만 숲속의 몽환적 분위기는 소생의 메마른 가슴에 따스한 불을 지펴 주었다. 모처럼 센티멘탈한 기분을 느낀 건 덤이라고나 할까.ㅎ

서리산 정상(832m)에 올라서자, 산객이 넘쳐났다. 만개한 서리산 자생철쭉을 보기 위해 운집한 탓이다. 서리산은 응달진 북서쪽 급사면에 서리가 쉬 녹지 않아 '서리산'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霜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현리 방향은 가파른 절벽이나 남쪽은 완만해 연분홍 자생 철쭉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진분홍 철쭉이 황매산이라면 연분홍 철쭉은 단연 소백산이 으뜸이고 다음으로 서리산을 꼽을만큼 입소문 나 있다.

화채봉으로 이어지는 서리산 철쭉동산으로 들어섰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새어나온다. 연분홍 철쭉꽃이 만개한 꽃터널은 좀처럼 나아갈 수가 없다. 너나없이 핸폰에 꽃을 담느라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핸폰에 꽃사진이 늘어난다는 건 나이들어가고 있다는 의미라던데...

철쭉동산을 빠져나와 화채봉 삼거리에서 왼쪽 방향으로 틀었다. 날머리까지는 약 2km 남았다. 산길 걷는 맛을 조금씩 알아간다는 후배 C는 스스로가 대견스러운지 "이 정도면 저질체력은 벗어났지요?"라기에, "이제 히말라야도 거뜬하겠다"고 답했다.

계곡물 소리가 가까워졌다. 저만치 주차장이 내려다 보인다. 봄의 끝자락, 남이장군의 발자취가 있는 축령산과 산철쭉 만발한 서리산을 9.5km 이어 걸어 원점회귀했다. 버스 편이 여의치 않아 많은 산객들이 택시를 찾는 바람에 마석읍내 택시가 동이 난 모양이다. 한시간 가까이 택시를 수배한 끝에 겨우 성공하였으니...산 느낌은 극상이나 대중 교통 접근성은 최하로 기억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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