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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2/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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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좋아하던 동네는 10년째 살고 있던 해운대였다. 깊은 바다, 해수욕장, 요트경기장, 산, 카페, 고은사진미술관, 영화의 전당, 영화의 전당 라이브러리, 동백섬. 20대 때는 맘 졸이며 사느라 마음껏 누리지 못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자유가 생겼다. 할머니가 될 때까지 이 도시에서만 살아도 여한이 없겠다, 싶을 때 완전히 "정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동네에서 일을 하고 있거나 살고 있는 사람과 만나서 결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가 노력했던 모든 인연이 줄줄 흘러갔다. 나에게 올듯말듯 하다가 다른 이에게 가거나, 결혼과는 거리가 먼 사람 앞에서 나는 대범하게도 위험한 미래를 상상했다. 부모님이 좋아할 직업을 가진 어떤 이는 취향도, 취미도 없이 취기만 가득했다. 대화를 이어가려다 체한 그날 이후로 두 번 다시는 부모님이 좋아할 것 같은 사람을 억지로 만나려 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 앞에서 직접적으로 내가 바라는 것들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보였다.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조용히 깨닫고 돌아섰다. 그렇게 5년. 어느 날 요트경기장에 주차를 해두고 운전석에 앉아 있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와, 끝이구나. 이만하면 됐다. 불이 꺼지고 재가 남았을 때의 시원한 마음, 그런 서늘함이 찾아왔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지금 생각해보면, 바로 그때쯤이 삶을 관통하는 기운이 크게 뒤집어지던 때였던 것 같다. 2022년 가을, 지금 연인을 친구로 우연히 만났다. 5년 동안 나에게 맞는 사람을 열심히 찾아헤맨 예민한 감각으로, 이 사람과의 인연이 축복이라는 걸 직감했다. 기적처럼 그때 연인도 같은 생각을 했다. 그해 여름에 서울로 이직 제안을 받아 4년 동안 다니던 회사를 12월까지만 다니고 그만둘 예정이었다. 2023년 3월에 일을 다시 시작할 때까지 신기하게도 연인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주어졌다. 지난 5년 동안 쉬는 날 없이 여러 가지로 일을 하며 지내고 있었는데 이런 타이밍이라니, 모두 기적처럼 느껴졌다. 그 전에는 상상도 하지 않았던 9,000km 장거리 연애를 너무나 자연스레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서울 생활도.
해운대의 느긋한 바이브가 좋았는데, 서울은 단 한번도 내가 살고 싶은 도시가 아니었다. 하지만 여행하듯 2년을 살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첫 해에는 장거리 연애가 어떻게 흘러갈지 몰랐으므로, 2년이 될지 더 긴 시간이 될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20대 때 4평짜리 원룸에 살았던 기억이 퍽 서글펐기에, 방이 2개는 있고 창문이 많은 곳에서 살고 싶었다. 금액 조건까지 맞추려면 중심지에서는 한참 멀어져야 했지만, 재택근무가 많은 업무 환경이라 구석에 사는 건 크게 상관이 없었다. 친한 언니가 살던 집을 이어받기로 했다가 계약이 틀어져 하루 만에 집을 구한 동네는 바로 우이동. 엘리베이터가 없는 고층집에 연이 닿아 살게 되었다. 집주인이 따뜻한 분이셔서 금전적으로 큰 사고 없이 서울 생활을 마칠 수 있었지만, 가파른 계단으로 이사 들어가고 나가는 게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서울 생활을 겪은 뒤 "간소한 삶"을 더욱 지향하게 되었다. 혹시 다음에도 엘리베이터가 없는 곳에 살게 된다면 그 기회에 반드시 '미니멀리스트'가 되는 연습을 해볼 수 있기를.
어디로든 이동거리가 최소 1시간인 서울의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수많은 어학 공부를 하고 수많은 책을 읽었다. 억지로 생산적인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사람으로 꽉 차있고 가끔 비참해지는 기분을 주는 대중교통이 너무 싫었다. 숨막히는 공간에 딱 붙어 서서 아무렇지 않게 유튜브를 보고 게임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존경스러웠다. 난 이렇게는 못 살아요. 해운대에서는 걸어다닐 수 있는 거리에 모든 게 있었지만, 우이동에는 걸어다닐 수 있는 거리에 약간의 산과 나에게 아무런 효용 가치가 없는 술집, 닭집, 고기집, 그리고 주택가 밖에 없었다. 그나마 도서관과 좋아하는 카페 몇 군데에서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래서 차라리 북한산 둘레길을 많이 찾았다. 15분 동안 깊은 산을 맛볼 수 있는 코스. 이삿짐을 정리하고 마지막 날까지 산책로를 걸었다. 부산에서는 자주 볼 수 없는 함박눈도 함께. 앞으로도 대중교통은 최대한 덜 이용하고 걷거나 자전거로 이동하며 살 수 있는 환경에서 살고 싶다. 그리고 걸을 수 있는 거리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많은 곳에서 살아야지.
서울, 나에게는 그냥 여행처럼 스쳐지나가기에 좋았던 도시였다. 하지만 2년 동안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에서 만난 귀한 예술 도서들, 각양각색의 도서관들, 서울이라서 만날 수 있었던 오랜 지인들과의 기억들, 휴가 나온 연인과 보낸 즐거운 추억들로 영혼이 가득 채워졌다. 아, 그리고 짐 빼기 3일 전에 1종 보통으로 업그레이드한 운전면허도 남았지. 서울에서 일한 경험을 더해 지금은 새로운 프리랜서 일도 이어나가고 있다. 생에 주어지는 모든 기회와 장소 안에서 내가 풍부해질 수 있는 요소들을 잘 선별해 만나는 것. 그렇게 느슨한 큐레이션을 하며 살아가는 것. 덕분에 연습해볼 수 있었다. 서울에서 보낸 2년은 삶이 조금 더 선명해지는 기회였다.
서울에서의 좋은 경험을 잘 살려서
새로운 프리랜서 일도~ 잘 되길 바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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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 감사합니다! :) 무엇을 얻고 무엇을 포기할지 알게 된다는 거, 기쁘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ㅎㅎㅎ 거티님도 새해 복 가득히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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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새로운 길을 선택하는 마음 속엔 단단한 용기가 있더라구요 앞으로 펼쳐질 여정 응원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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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어짜낸 용기 속에 피어난 네잎클로버...!! 🍀 잘 걸어나가볼게요 ㅎㅎㅎ 보얀님 응원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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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막히는 곳에서 좋아하는 것을 찾는 연습하셨군요. 모두가 느끼는 서울이 달라서 재밌어요.
채린님 글의 묘한 매력, 담백하고 깔끔한데 깊은 정취가 느껴져서 홀려서 후루룩 읽으면 여운 가득!
스팀잇에서 이런 글을 읽을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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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이 읽어주셔서 신나요! :) 조용한 동네에서 지내긴 했지만, 용산 근처에서 지냈다면 또 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답니다 ㅎㅎㅎ 그래도 좋은 장기여행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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