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내려놔."
헤어지자고 말했다. 내가 아닌 그녀가. 그래서 무너진 것도 내 쪽이었다. 근데 왜 칼은 그녀 손에 쥐어진 채 그녀의 손목을 겨누는가.
아이가 생겼다고 했을 때 사실 그녀가 진심으로 침울해보였다. 아마 내심 내가 아이는 지우자고 말하길 바라는 눈치였다. 언제나 가까운 듯 멀리 있길 원하는 게 천성이라고 말하던 그녀였다.
그리고 나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드디어 그녀를 동아줄로나마 잡을 수 있다는 실마리를 봤다. 다행이라고, 고맙다고 답하는 날 보며 그 얼굴에 서린 묘한 표정은 왠지 이 대결에서 자신이 진 것 마냥 일순 구겨젔다. 그걸 들키지 않으려 얼른 쑥쓰럽게 고갤 숙였어도 자명했다. 피임을 잘 할걸,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잡은 게 이렇게 금방 끊어질 줄인 걸 알았다면 그녀도 웃었을까. 양가 부모님도 만나고 결혼 준비도 꾸역꾸역 해내면 그녀는 달리 말이 없었다. 모든 게 다 괜찮다, 좋다, 두 마디로 완성됐다. 헛구역질을 할 때조차 그녀는 버릇처럼 괜찮아, 좋아, 최면을 걸듯 말했다.
어쨌든 드디어 나와 이어질 날이 얼마 안 남았을 때 아이는 도망가버렸다. 어쩌면 제 어미를 닮아 누군가와 억지로 연결되는 걸 싫어했을 수 있으니 아이, 누구를 탓할 순 없으리라. 분명 그녀도 유산이라는 두 음절에 울먹였다. 마치 마지막 황제의 낯처럼 담담한 척 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서 헤어지자고 말한지도 모른다. 이제 이 관계에서, 못 이긴 척 허락한 반직선 우에서 이번만큼은 실수 없이 자리를 독점하려 했는데 그 근거가 온데 없이 사라졌다. 시어머니의 은근한 눈총은, 직장이 너무 고되다는 걱정은, 기운내라는 인심 속에 그녀는 약자가 될 것인가. 아니. 그런 걸 견딜리 없는 여자다. 이별의 말 끝에도
결혼은 원치 않는다는
미심쩍은 토가 달렸다. 썅년이라 욕해도 할 말 없는 상황에서 그냥 알았다고 대답한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다시금 등신임을 인증한 셈이다. 왜 그랬는진 모르겠다. 왠지 당연한 듯 그녀가 돌아올 것 같았다. 오락가락 살만 맞댄 7년의 시간이 분명히 도래할 금단증상을 진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 그녀는 칼을 든 채로, 처참하게 예쁜 민낯으로 서있었다. 그동안 맘고생 했는지 몸이 더 야위어있었다. 술기운에 걸려온 전화 너머로 구구절절, 비참한 심경이 이어졌다. 가족에게도, 내 가족에게도, 생전 타인에게 처음으로 죄인이 된 기분을 아냐는 물음. 정답을 찾지 못했고 엉망인 그녀에 집으로 헐레벌떡 뛰어갔다.
"말리지마."
"누나 못 죽어."
"이도저도 싫어. 사는 게 싫어."
"누나 취했어."
"너도 날 버릴 거 잖아!"
"먼저 버린 건 누나야."
아차 싶은 순간 탁- 퓨즈가 끊기고 흰 속목 위로 벌건 줄이 그였다. 그 틈에 달려가 칼을 낚아챘다. 자신이 그어놓고도 그녀는 순간의 아픔에 놀라 풀썩 주저앉았다. 이미 술병이 몇 개 굴러다녔다. 주머니에 선물로 받은 손수건은 그대로 옛 주인은 상처를 봉했다.
"그만해."
우는 그녀를 품 안에 받는 심정은 사뭇 복잡하다. 이 관계는 이제 복구할 수 없겠지. 헌데 이대로 그녈 내버려둘 순 없다. 내가 감당할 이유가 있나. 그렇다고 뭐든 없던 셈 칠 수 있을까. 그렇게 엉킨 단서들 사이로 어차피 남는 건 그녀가
나 없인 살 수 없다는
그런 착각이었다. 아니, 최소한 이렇게 유연하고 유약한 사람을 받아낼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점처럼만 사랑하자는 억지로 은근슬쩍 애정을 갈구하는 그녀의 구멍들. 나만이 공기처럼 그녈 만족시킬 수 있다는 무언의 결론에 도달하면서 품 속에 젖어드는 그녈 안는다.
어쩌면 나는 누군가에게 오롯이 유일할 수 있는 이 관계에 중독된 게 아닐까. 그렇다면 금단에 시달린 건 사실 그녀가 아닌 내가 아닐까.
항상 안주머니에 넣어둔 약혼반지를 기다렸다는 듯이 꺼내는 나를 보며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사실 앵간해서 그녀가 취하지 않는다는 것도, 손목 한번 긋는다고 사람이 죽지 않는 것도 안다. 하지만 노심초사 했다는 듯, 실제로 그리웠던 만큼 간절히 바라봤다. 이내 왼손을 내미는 그녀.
살며시 웃고 있었다.
어차피 서롤 속이는 게임이었다는 것. 피차 부정할 마음은 없는 듯했다. 헤어지자는 것도, 다시 만나게 하는 것도 그녀의 재주. 우린 다시 이어질테다. 곧장 끊어질 듯 점묘화처럼 이 관계를 만들어보자고, 그녈 안은 채 다짐했다. 애써 그녀에게 일일히 같은 다짐을 받아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이미 뻔히
그녀가 그녀의 방식대로 자리를 선점하듯
나 또한 내 나름의 수를 쓸 수밖에 없다고
참으리 어리석고, 비이성적인 감정의 일을 결심하고 있는 나였다.
20151027 #쮼 #5편
뭔가 시간 순서는 나중에라도 바꿀 수 있을 것 같습니다(스팀잇에선 불가능하겠지만ㅠ)
그래도 4편을 먼저 본 후에 5편을 봐야 거기서 오는 대조가 있다고...혼자 궁시렁댑니다(?!)
예전에 이미 써서 공개했던 것들을 여기에 차곡차곡 모아보는 용도로 아카이빙 중입니다.
네이버 블로그는 디자인이 눈에 확 들지 않고, 일단 제가 공개적으로 쓰질 않아서...ㅎㅎ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에서 이리저리 실험하다가 박제(?!)할 것은 여기에 모아두려고요@.@
환영합니다! :) ㅎㅎ 벌써 잘적응하신 것 같네요. 우선 일주일 뒤에 보상 받으시면 바로 환전 시도해보세요. 그럼 뭔가 확 신기한 느낌을 제대로 받으실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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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환전하는데 시행착오가 있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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