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경기.)
[이미지 출처: 로마 공식 웹사이트. 이하 모든 이미지 동일.]
예상치 못한 처참한 폭격. 올드 트래퍼드 참사에 이은 안필드 참사가 될 뻔한 경기. 그러나 막판에 '기적적'으로 정신을 차리며 팬들을 희망고문하게 된, 참사보다 2배 더 잔인한 결과.
로마의 준결승전 상대가 리버풀로 정해졌을 때, 두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었다. 하나는 기쁨이었다. 레알 마드리드나 바이에른 대신 리버풀이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맨시티를 처참하게 박살내며 전 유럽을 놀라게 한 리버풀의 기세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레알 마드리드나 바이에른에 비할 수 있단 말인가? 베스트일레븐의 수준, 선수단의 전반적인 건강 상태, 큰 경기에서의 경험… 심지어 리버풀은, 올 시즌 한정으로 유럽 최고라 할 수 있는 공격진(소위 마누라 라인)을 제외하고는, 로마보다 나은 것이 없어보였다. 반면 좀 더 걱정스러운 반응을 보일 수도 있었다. 전통적으로 이탈리아 클럽들에게 잉글랜드 클럽들은 힘든 상대다. 수준 문제가 아니라 스타일상 상성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클럽들은 잉글랜드 클럽들의 빠른 템포에 좀처럼 대처하지 못했다.
1차전의 결과만 놓고 보면, 후자의 걱정이 지나칠 정도로 들어맞아버렸다. 전반 중반 이후부터 리버풀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기 시작했을 때, 로마 팬으로서 일찍이 느껴본 적 없는 압도적인 공포감과 무력감에 빠져야 했다. 바르셀로나전이나 레알 마드리드전도 이렇지는 않았다. 이번 리버풀전에서는 진형 자체가, '팀' 자체가 와해되어버렸다. 리버풀의 무시무시한 압박 능력, 빠른 속도, 걷잡을 수 없이 몰아치는 분위기 앞에서 선수들은 팀원이 아니라 무력한 개개인으로 노출되었다. 선수들은 정상적인 플레이를 할 수가 없었으며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계속해서 공을 빼앗기고, 헌납하고, 유린당했다.
분명 수비진에 참사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러나 리버풀은 중원 싸움을 생략한 채 롱볼로 한번에 공격진을 향해 공을 보냈고, 또 전방 압박으로 (로마) 수비진과 미드필드 사이에서 공을 탈취해냈다. 리버풀이 로마 수비진을 향해 롱볼을 보내면, 어떻게 걷어내든 리버풀의 에너지와 스피드와 날카로움에 의해 위기가 찾아왔다. 이런 상황이 정신없이 반복되었고, 스리백은 어떠한 보호도 없이 세계 최정상의 스리톱 앞에 계속해서 노출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데 로시, 스트로트만 등 다른 선수들은 수비 보호에 참여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수비 이후 전열을 정비하고 반격할 수도 없었다. 바르셀로나전의 플레이메이커였던 데 로시가 경기에 어떠한 영향력도 미칠 수 없었다. 즉 수비진과 미드필드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졌고, 필드 위 대다수의 선수들이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하는 잉여가 되었다. 인간들이 진형을 짜고 맹수들과 맞서다 약한 틈 사이로 조직 체계가 와해되면, 그 뒤부터는 무력한 개개인으로 전락해 맹수들에게 유린당할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상대에게 이런 무력한 지경을 강요하는 것은 클로프 감독의 독일 시절부터의 전매특허다. 클로프의 도르트문트 앞에서 한번 삐끗하면, 스코어는 걷잡을 수 없이 3:0, 4:0이 되곤 했다. 거기에는 언제나 상대와의 객관적 전력 차 이상의 무언가가 작용했다. 상대 팀의 수준급 선수들이 클로프의 선수들 앞에서는 어처구니없이 실수를 연발했고, 클로프의 선수들은 본래 클래스 이상의 엄청난 스탯을 쌓았다. 가가와 신지가 그 대표적 사례다. 도르트문트에서의 하강과 리버풀 부임 이후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클로프 감독은 보다 성숙해져갔고, 이번 시즌 살라흐의 합류 이후, 자기 축구를 위한 가장 이상적인 공격진을 얻었다. 또 하나의 인상적인 팀, 그러나 클로프의 팀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과르디올라의 맨시티는 클로프의 리버풀에게 무력하게 무너졌다. 거기에는 감독의 역량, 팀의 완성도, 선수들의 수준과는 다른 상성이라는 요소가 절대적이었다. 클로프의 축구는 정교한 예술품을 부수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즉 수비진에서 공격진까지 정교하고 섬세한 고도의 팀 플레이를 전개하며 아름답고 완벽한 공격 축구를 지향하는 팀에 대해, 그 연결 고리를 끊고 무력한 부품들로 만드는 것이다. 과르디올라의 맨시티보다 낮은 완성도를 가진 모리뉴의 맨유가 이번 시즌 리버풀에게 그나마 좋은 모습을 보여줬던 것도 동일한 이유에서 기인한다. 리버풀이 끊어낼 연결 고리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클로프의 축구는 90분 내내 지속적으로 펼치는 것이 불가능하다. 웅크린 채 버티고 있으면 언젠가 틈이 난다.
디 프란체스코 감독은 클로프에게 약한 면과 강한 면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으로 그는 과르디올라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공공연히 밝히며, 공격적인 축구를 지향하는 감독이다. 그러나 이번 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 보여주었듯 수비 조직 정비에도 일가견이 있다. 다소 결과론적인 비판이기도 하지만, 이번 경기에서는 라인을 끌어내리고 웅크리고 버티며 상대의 체력적 문제와 빈틈을 노려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디 프란체스코는 라인을 높게 올리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리고 이는 전반 초반의 선전 이후 커다란 약점을 노출하며 재앙으로 돌아왔다. 클로프 축구의 강점에 더해 이탈리아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잉글랜드 클럽의 템포와 스피드, 유럽 최고 수준의 공격적 날카로움이 걷잡을 수 없이 연쇄 작용을 낳았다.
스리백 포메이션의 사용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분명 이 전술은 로마의 기적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이번 시즌 내내 로마가 사용하며 익숙한 것은 4-3-3이며, 그 익숙함과 숙련도는 수비와 공격 모두에 해당된다. 익숙치 않은 스리백 전술이 바르셀로나전에서 기적을 가져왔던 것은, 바르셀로나가 수비에서 공격까지 팀 전체에 걸쳐 에너지와 기동력, 파워와 높이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방 압박 및 투톱을 향한 단순한 롱볼 공격 앞에서 바르셀로나는 무력했다. 로마의 숨 막히는 전방 압박 속에서 바르셀로나는 단순한 롱볼로 반격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고, 메시와 수아레스의 투톱은 그 기회를 살리는 데 부적합했다. 로마의 스리백이 높은 라인을 형성하며 3-4-1-2의 단순한 공격 전개를 보조할 수 있었던 이유다. 수아레스-메시 투톱은 단순한 롱볼 전술하에서 상대의 높은 수비 라인을 위협할 정도의 에너지와 스피드를 갖추지 못했다.
반면 리버풀은 에너지, 스피드, 파워, 높이 모두에서 로마에 앞서면 앞섰지 뒤지지는 않는다. 사실 유럽 최정상급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르셀로나전에서 움티티와 피케를 제압했던 제코는, 이번 경기에서는 후반전 막판까지 꽁꽁 묶여 있어야 했다. 쉬크 대신 선발 출전한 윈데르 역시 제코가 묶이는 이유가 되었다. 쉬크가 제공하던 높이 및 수비 견제 기능을 윈데르는 전혀 제공하지 못했고, 그의 장점인 빠른 스피드와 날카로운 킥력이 발휘될 기회 자체가 나오지 않았다. 전방의 위력이 감소하고 공을 지켜주지 못하면 후방에 위험이 가중되는 것은 필연이다. 4-3-3이었다면 중원의 여유로운 배치 및 전문 윙포워드의 존재로 인해 보다 안정적이고도 유연한 공격 전개를 노릴 수 있었다. 로마에게 익숙한 포메이션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번 경기에 사용된 3-4-2-1의 단순한 공격 전개는 리버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전반 중반 이후 분위기가 넘어간 뒤에는 어떠한 수비적 역할조차 하지 못했고 반격의 가능성도 제공하지 못했다. 스리백 전술의 공격 전개에서의 약점을 메워주는 높은 수비 라인은, 엄청난 에너지와 스피드를 갖춘 리버풀의 스리톱 앞에서는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버렸다. 공격과 수비에서 철저한 카운터를 맞닥뜨리게 되니, 두 명의 윙백과 두 명의 중앙 미드필더는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하는 잉여가 된다. 리버풀의 중원 생략 축구, 직접적으로 로마의 높은 수비 라인과 대결하는 방식은 로마의 약점을 완벽하게 찔렀다. 페로티의 교체 투입과 함께 4-3-3으로 돌아간 후, 로마는 2차전에서의 미약한 희망을 살리는 두 골을 넣을 수 있었다. 물론 90분 내내 지속적일 수 없는 클로프 축구의 약점과 맞물린 결과기도 하다.
비가 내려 잔디가 미끄러웠다는 상황이 이 모든 문제와 맞물렸다(안 좋은 일은 늘 한꺼번에 찾아오는 법이다). 선수들의 볼 컨트롤이나 패스의 흐름 등이 안정적일 수 없었다. 이는 클로프 축구 및 리버풀 선수들, 그들이 선택한 롱볼 공격에 보다 유리하게 작용했다. 스타디오 올림피코 못지 않은 안필드의 붉은 함성 역시 선수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기 충분했다는 점도 빼놓아서는 안 되리라.
2.
팀이 와해된 경기에서 선수 개개인을 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 팀 스포츠에서 팀을 떠난 개개인은 거의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와해된 팀에서 누가 더 못했는가, 책임이 있는가를 따지는 것은 해롭기까지 하다. 실수만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 수비수들을 비판하는 데 한계가 있는 이유다.
그렇지만 점수 차가 벌어지면서 의욕과 집중력을 상실하고 추가 실점을 방치한 선수들은 특별히 비판받아야 한다. 물론 지난 바르셀로나전 후기에서 언급했듯이 정신력은 마음먹기가 아니다. 팀이 와해되고 계속해서 실점하는 상황에서 정신을 붙드는 것이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챔피언스리그 토너먼트에서는 한골 한골의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친구들이 아니던가.
그런 의미에서, 하지만 긍정적인 의미로, 나잉골란, 제코, 페로티는 언급할 만하다. 그들은 와해되고 멘털이 붕괴된 팀원들 사이에서 반격을 이끌고 기적적으로 두 골을 만들어내며 미약한 희망의 불씨를 살렸다.
(페널티킥 득점 이후 바로 공을 들고 달려가는 페로티. 페로티 투입 이후 그 중심의 4-3-3 포메이션으로 전환하면서 로마의 공격 전개는 원활해졌다. 페로티는 앞장서서 공격을 이끌었고, 나잉골란이 얻어낸 페널티킥을 마무리하며 팀의 두 번째 득점을 넣었다.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페로티 특유의 페널티킥 모션 대신 정석적으로 찼다.)
3.
실로 오랜만에 로마는 메인 스폰서 계약을 맺었다. 바르셀로나의 전 메인 스폰서로 유명한 카타르 항공. 바르셀로나를 기적적으로 꺾고 4강에 진출한 후의 계약이라 더 의미심장했다. 그 메인 스폰서 로고를 부착한 유니폼으로 치른 첫 경기가 이번 경기였다. 카타르 항공 관계자들의 표정이 궁금하다. 어쨌든 하얀 어웨이 유니폼과는 잘 어울렸다. 카타르 항공 로고가 특별히 아름답지는 않지만, 밋밋하던 어웨이 유니폼을 순식간에 아름답게 완성시켰다.
(소매의 저 오줌 자국만 없으면 완벽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