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브레히트 뒤러, <아담> & <하와>. 이미지 출처)
같은 이유에서, 가장 '인간적'인 것을 물으면 그 역시 의다. 인간적이라는 것의 본질은 허영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동물로서의 필요를 넘어서, 끊임없이 초동물적 차원의 욕망을 만들어 내고 휘둘린다. 가장 비실용적이고 허영과 사치와 탐욕으로 넘쳐 나는 의는, 동물적 소박함에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욕망하는 인간이라는 기이한 존재 그 자체기도 하다.
나체,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 및 동물성의 상징인 나체가 의식주 각각과 맺는 관계는 재미있다. 말할 것도 없이 식은 인간의 벌거벗은 동물성 그 자체다. 인간은 입만은 가리고 위장할 수 없다. 입은 옷 위에서 영원히 동물적 구멍으로 남아 있다. 현대의 데이트는 식당에서 이루어지지만, 사랑과 시의 섬세한 풍류를 즐기던 헤이안 귀족들에게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식사라는 것이 얼마나 동물적이고 품위 없으며 지저분한 과정인지를 곰곰이 떠올려 보면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식사는 결코 비동물적, 초동물적으로 가리고 꾸밀 수 없는 것이다. 주는 한편으로는 지극히 문명적인 껍데기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을 사회의 시선으로부터, 타인의 눈으로부터 분리하고 보호해 주는 장치기도 하다. 집 안에서 비로소 인간은 사회적인 배역으로서가 아니라 본래의 육체로서, 나체로서 편하게 벌거벗고 다리를 뻗는다. 가장 좋은 집은 언제나 가장 편한 집이다.
반면 의는 그 자체가 나체를 가리는 것이고, 나체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며, 심지어 나체를 죄악시하는 것이다. 식이나 주와 달리, 나를 위한 것을 넘어 타인의 눈에 들기 위해 나체를 꾸미는 것이다. 인간은 동물이면서도, 동시에 동물성의 노출을 제한하고 그를 위해 불편함마저 감수하며 심지어 동물성 자체를 '불결한 것'으로 죄악시하기도 하는 동물이다. 이러한 제한과 조직과 도덕화 일체를 사람들은 문화라고 부른다. 그리고 나체를 가려 버린 직물 위에서 생물학적 짝짓기의 욕망과는 다른 차원의 욕망과 미와 시선과 자아가 피어난다. 옷이 존재하지 않는 원숭이들의 성욕과 옷에게 입혀 있는 인간의 욕망은 같은 것일 수 없다. 베틀은 끊임없이 동물들이 알지 못하는 미와 욕망을 직조해 낸다. 아름다움을 위해 불편함과 건강의 위험마저 감수한다는 반자연적·반동물적 행태는 압도적으로 의의 영역에서 벌어진다. 예컨대 하이힐이라는 변태적 코르셋.
식과 주가 나를 향하는 것인 데 반해 의는 타인을 향한다. 내가 맛있기 위해 먹고, 내가 건강하기 위해 먹으며, 내가 편하기 위해 집을 짓는다. 그러나 입는 것만큼은 나의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타인의 눈에 들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의야말로 가장 인간적이고 문화적인 것이다. 먹는 동물, 편하게 누운 동물은 옷을 입음으로써 비로소 타인 속에 자신을 놓는다. 타인 속에서 타인의 시선을 갈구하는 존재로서의 자아를 가지게 된다. 타인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으로서의 자아, 타인에게 보임으로써만 의미를 가지는 자아를 가지게 된다. 식과 주에 비해 의는 관계적인 구성물이다. 설령 그것이 벌거숭이 임금님의 옷이더라도, 그것을 알 만큼 지혜로운 것은 어린아이뿐이다. 인간이란 옷을 입고 머리가 무거워지고 가슴이 커질수록 그 무게에 생각이 묶이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줄에 걸린 거미다. 아이들과 달리 어른들은 결코 옷을 벗을 수 없다. 모든 옷에는 휘드라의 독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옷을 찢는 것조차 옷이 된다. 인간은 옷 아래로 내려갈 수 없다. 옷을 벗으려면 불이 필요하다.
옷이 언제나 나체를 가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옷은 나체를 '적절히' 가림으로써 가장 강렬하게 드러내고 유혹한다. 보일 듯 말 듯한 세미누드에 흥분하다가 올누드를 보면 「음, 그냥 알몸이네.」라고 느끼며 감흥이 깨지는 경험은 보편적이다. 옷은 욕망할 만한 목표로서의 나체를 생산한다. 베일은 베일에 싸인 것을 생산한다. 옷과 뒤얽혀 '섹시함'이라는 직물적 미를 자아내는 재료, 각종 문화적 의례와 퀘스트의 수행을 통해 차례차례 벗겨 나가야 할 목표, 문화를 작동하게 하는 비문화적 문화를 생산하는 것이다. 날실과 씨실을 교차하고 패턴을 넣듯 문화는 엮인다. 그런 문화적 기만을 벗어 버린 인간에게 나체란 「음, 그냥 알몸이네.」일 뿐이다.
식과 주에서 남녀는 구분되지 않는다. 오직 의에서 남녀는 절대적으로 다르고, 달라진다. 남성과 여성은 그 자체가 옷이다. 그것은 옷인 동시에 옷을 넘어 추구해야 할 옷 밑의 근원으로 전제된다. 옷과 옷 밑이 끊임없이 얽히며 서로를 규정한다. 예컨대 여성이라는 패션은 「긴 머리, 화장, 잘 관리된 피부, 날씬한(울퉁불퉁한 근육 따윈 없는!) 지체, 깨끗하게 제모된 겨드랑이, '여성스러운' 행동거지, 신비스러운 옷 밑」 등의 결합이다. 그 구성물은 이따금 바뀌지만, 타인을 향해 엮이는 옷이라는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그것이 여성의 육체를 생산하고, 목소리와 영혼을 특정한 색깔로 물들이며, 분별을 비틀고 헌신을 정신없이 빨아들이는 매력의 특정한 홈이 된다.
그 옷이 벗겨졌다는 수치심은 어떤 뻔뻔한 의식과 이성보다도 머리 하나가 더 높아 결코 가려지지 않는다. 수치심은 발을 치고 밖과 안을 가르고 엮으며 여성이라는 효과를 생산하는 산파다. 여성의 튀로스산 자의식. 그것은 많은 경우 목숨보다도 우위에 있다. 남성은 여성에게 이런 수치심을 요구하고 교육해 왔지만, 또한 그것을 낯설어하고 두려워하며 심지어 역겨워한다. 수치심의 동물인 여성은 가장 비위가 강한 동물이기도 하며, 반면 남성은 자연에서 가장 비위가 약한 동물이다.
그 옷은 남성의 항해도를 규정하는 절대적인 방향 중 하나다. 그것이 세계에 무게를 씌우고 색과 형태와 감촉을 분배한다. 그 수면 밑에 무엇이 있을 것인가? 그것을 모조리 벗었을 때, 예를 들어 똑같이 머리 짧고 어벙한 얼굴로 괄괄하게 구는 동지들이 있을 때, 남성이 받는 충격은 방향상실적이다. 여성이 없는 세계 지도에 의미가 있을까? 여성이 없는 오뒷세이아에 방향이 있을까? 세계에 무미건조한 인간 무리들만이 존재할 뿐 정신줄을 놓고 모든 것을 바칠 만한 매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취함 없는 소금 사막. 머리카락과 옷 밑의 똥자루 세계. 테이레시아스와 이자나미의 세계. 성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불신과 구토의 해일이 배를 덮친다. 하나의 방향과 항로를 없앨 때 비로소 배들은 모든 방향으로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다는 환상이 있다. 그러나 방향과 항로가 없어지면 사람들은 자유롭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항해를 그만둔다.
옷 밑으로 향한 여성들의 당황이 남성들보다 덜하지는 않다. 자기만의 옷이라는 나르시시즘적 도취 역시도 벌거숭이 임금님의 옷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성적 피로나 실패를 무성적(탈성적!) 개인의 이상으로, 타인의 시선에 대한 투쟁으로 분장하면 달달하긴 하겠지만! 마치 자기는 외모를 보지 않는다는 듯이 말하는 회색 세계의 찬미자들처럼 말이다. 물론 이 역시 하나의 필사적이고 추악한 옷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여간, 그곳에서 어떤 타인의 욕망으로 새로운 옷을 엮을 것인가? 예컨대 레스보스의 자매들? 아니면 타인의 욕망 자체를 포기하고 견유학파에 들어갈 것인가? ― 여성이 견유주의자가 될 수 있을까? 정말로 GIRLS CAN DO ANYTHING일까? ― 인간이니 개인이니 하는 헐벗은 인민복을 어디에 써먹는단 말인가? 그것은 그저 싫은 사람을 대할 때 둘러대던 방패일 뿐인데. 매력 없는 존중을 어디에 써먹는단 말인가? 그것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인간들을 대하기 위한 겉치레 예의일 뿐인데. 소위 탈코르셋 운동이 켈트식 갑옷과 군복 외에 어떤 새로운 매력적인 의상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 기대해 보도록 하자. 어떤 새로운 키푸를 엮을 수 있을지 기대해 보도록 하자.
남성과 여성 중 어느 쪽이 더 옷 입는 동물일까? 언제나 「입을 옷이 없네」를 입에 달고 사는 동물, 자기를 옷으로 표현한다고 말하는 동물, 거울 속 옷에 자기를 맞추면서 「다이어트!」라고 울부짖는 동물, 선악과를 먹자고 꼬드긴 동물일까? 아니다. 남성이야말로 옷이 없는 나체를 견디지 못하는 동물이다. 남성은 제복의 동물이다. 남성은 언제나 벌거벗은 자연에 옷을 입혀야만 한다.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옷을 입혀 객관화시켜야 한다. 남성으로서의 권력을 가지게 된 남성이 옷에 대해 부리는 광기는 여성들의 미어터지는 옷장과는 비교할 수 없다. 남성은 전 세계에 옷을 입히고 그에 따라 자신에게도 옷을 입힌다. 남성은 옷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는 동물이다. 예컨대 이성, 도덕, 민족 등을 근사한 옷으로 만들어 걸침으로써 육화된 이성, 육화된 도덕, 육화된 민족이 된다. 뇌에 이염이 된 것이다. 남성은 자연의 나체조차 옷으로 만든다. 예컨대 순수한 자연, 자연의 법칙, 어머니 자연, 퀴니코스, 여성 등등. 벌거숭이 임금님과 어른들을 아이가 비웃듯, 여성들은 옷에 입혀 있는 남성들을 비밀스럽게 비웃고 경멸한다. 여성은 옷에 대해 더 잘 아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의 싸움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구도. 「바보 아닌가? 옷에 눈이 팔려 그 밑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보지 못한단 말인가? 옳고 그름 그 자체라는 게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자기가 육화된 이성, 육화된 논리란 말인가? 그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실제 육체는 여기에 있는데, 어디에 한눈을 팔고 있단 말인가?」 잠깐, 그렇다면 여성은 옷의 허영 밑에 진정으로 존재하는 나체를 안다는 말인가? 여성의 '감정'은 타인에 의해 엮인 옷에 우선하는 자연이란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옷, 뱀이다. 그녀는 옷 벗은 남성으로부터 불로초를 훔친 것이다. 여성은 옷을 입는 동물이 아니라 옷으로 된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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