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성 수면

in kr •  7 years ago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황금 상자를 여는 프쉬케.jpg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황금 상자를 여는 프쉬케>.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발작을 일으키듯 자는 시기가 있다. 그 시기에는 하루에 11~12시간 정도를 잔다. 자고 일어나면 상쾌하기는커녕 멍하다. 심지어 두통까지 있다. 알람을 못 듣는 것은 아니다. 분명 잘 듣고 눈을 뜬다. 그런데 제 손으로 침착하게 알람을 해제한 후 다시 눈을 감는다. 그 뒤에도 몇 차례 다시 깬다. 그 때마다 침착하게 시간을 확인하고 잠시 생각에 잠긴 후 다시 눕고 눈을 감는다.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드는 시간이 되어서야 띵한 머리로 느릿느릿 일어난다. 하루 내내 긴 수면으로 인한 사치스런 두통에 시달린다. 사치에 대한 죄책감과 우울감에서도 헤어나오지 못한다. 유일하게 가진 재산이자 가장 중요한 재산을 그토록 낭비하고 또 낭비하는 중이니 어찌 우울하지 않으랴. 그렇게 하루를 망친다. 이런 하루가 계속해서 반복되는 시기가 있다. 어떤 문제가 이보다 중요할까. 하루 전체를 집어삼키고 삶 전체를 집어삼켜가는 이 문제보다 무엇이 더 중요할까.

두 가지 유형의 원인이 있다. 하나는 삶이 너무 무겁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할 일이 너무 많다는 것과 같은 말이 아니다. 무거움의 본질은 일의 양이 아니라 성격이다. 즉 수동적이고 반응적인 것이 될 때 삶은 무거워진다. 깨는 순간부터 접하는 모든 것에 대한 주의 깊고 섬세한 반응을 강요당한다. 예를 들어 일상의 가장 비소한 차원부터가 그러하다. 매일매일 빠짐없이 양치질을 하고 세수를 하고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식사를 해야 한다는 것. 그 천편일률적인 동작들을 매일매일 반복한다는 자체가 너무나 우울하고 숨 막혀서 참을 수가 없다. 이런 짓거리들이 매일매일 강요된다는 자체를 참을 수가 없다. 삶이 이런 반응들의 연속에 불과한 것이 될 때, 삶 전체가 컨베이어벨트와 함께 기계 속으로 빨려들어가 삼켜진다. 침대에서 내려오면 컨베이어벨트다. 넥타이를 끝까지 조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다가오는 유무형의 강요들에 대한 성실하고 섬세한 반응 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나다. 주의 깊고 섬세한 반응과 관리를 통해 나를 근사하게 단장하면서, 번듯한 사회인으로 만들면서, 나의 거칠고 신선한 내면은 완전히 증발해버린다. 삶은 더 이상 어떠한 흥분도 주지 않는다. 욕망되지조차 않는다. 다만 죽는 것이, 더 정확히는 상처 입고 아픈 것이 두려울 뿐이다. 이 지점에서조차 수동적이고 반응적인 것이다. 정해진 대로 반응할 뿐 스스로 생각하지조차 않는다. 일상을 반복하는 기계. 깨어있되 나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깨어 있으면서 내가 없을 수는 없다. 다만 절대적으로 분열된 나, 나를 가두고 억압하며 강제하는 나라는 프로그램이 있을 뿐이다. 내가 눈을 뜨면 컨베이어벨트에 올려놓고, 이를 닦고 얼굴을 씻기고 온몸을 씻기고 옷을 입히고 넥타이는 적당히만 조인 후 사회인으로 출하하는 훌륭한 프로그램. 사람들이 나의 상실을 호소하고 고통스러워할 때, 거기에는 나를 너무나 완벽하게 생산해내는 나라는 프로그램이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다. 디오게네스는 나를 되찾기 위해 나를 버리고 인간의 옷을 벗어야 했다.

그래서 잠으로 도피한다. 거기에 내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없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끔찍하도록 많은 다리도 단단한 껍질도 필요하지 않다. 그것들을 가지고 아등바등 반응할 필요가 없다. 그저 자유롭게 변신하면 된다. 헤엄치면 된다. 근본적이고 숙명적인 우울을 자아내는 시간의 불가역성조차 풀린다. 그러나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내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닦고 얼굴을 씻고 온몸을 씻고 옷을 입으며 넥타이를 적당히 조이고 식사를 챙겨야 할 내가 더 이상 없다. 나 없는 자유. 진정하고도 유일한 자유.

또 하나의 이유는 무엇인가. 삶에 무게가 없다는 것. 이것은 무슨 말인가. 바로 앞에서 너무나도 무거운 삶을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반대로 잠은 너무나도 가볍기에 도피 혹은 해방이 되지 않던가. 그런데 어째서 삶에 무게가 없는 것 역시도 잠을 선택하는 이유가 된다는 말인가. 그러나 무게가 없는 것과 가벼운 것은 동의어가 아니다.

도피성 수면의 나날이 어떻게 끝나던가. 삶에 목적이 생기면서다. 일어나야 할 목적. 죽지 않아야 할 목적. 매일 밤 잠들기 전에 무사히 아침 해를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만드는 그런 목적. 더 이상 어두컴컴한 이불 속도 눈꺼풀 밑도 아니다. 예술가도 임신한 여자도 탐욕스럽게 아침 해를 요구한다. 배 속의 아이가 아침 해를 보게 될 그 날까지는. 그를 위해서는 침대 밑 컨베이어벨트를 기꺼이 감수한다. 그러나 더 이상 컨베이어벨트는 없다. 진정한 목적을 찾은 자, 즉 목적과 자신을 동일시하기에 이른 자는 이제 활이자 화살로서 날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충만한 무게가 있다. 근사하게 단장한 내가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차원의 무게가 있다. 그것은 무겁지조차 않은 무게다. 앞서 말했듯 본질은 일의 양이 아니라 성격이다. 목적은 삶을 능동으로 바꾼다.

그러나 그 능동은 주체성도 자유의지도 아니다. 이것들만큼 창조와 정반대되는 것은 없다. 창조는 엄습하는 것이고 나를 도구로 하여 세상에 나오는 것이다. 창조의 능동성, 창조의 기쁨은 활과 화살의 것이지 자율적 통제의 것이 아니다. 능동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운명을 긍정한다. 나 없는 능동성. 낳음의 능동성. 통상적인 의미의 나는 오직 수동적인 삶을 만들어내는 프로그램일 뿐이다. 활과 화살은 본질적으로 죽이기 위한 물건이다. 그런데 누구를? 무엇보다 먼저, 끊임없이 나를 통제하고 소유하려 드는 나를. 나를 죽인 채 날아가는 그 살기야말로 유일한 생기다. 능동인 것이다. 반대편의 수동은 자기의 부재가 아니다. 자기 보존이고 소유 강박이다. 자기를 보존으로, 소유로 이해하는 것이다. 잠이 나로부터의 도피라면, 목적은 나로부터의 해방이다. 어느 쪽의 꿈에도 나는 없다.

목적을 잃은 인간은 풀어진 활이다. 이것이 가벼움과는 다른 무게 없음의 의미다. 굳이 일어나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매일 밤 아침 해를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도 않는다. 사실 살던 죽던 아무 느낌도 없이 무덤덤할 뿐이다. 그는 이제 화살이 아니기에 하늘이 아니라 컨베이어벨트를 딛어야 한다. 그러니 더더욱 어찌 일어나겠는가. 날아다닐 하늘은 아침 해가 아니라 이불 속 눈꺼풀 밑에서야 찾아온다. 꿈이 없다면 꿈을 꿀 수밖에 없다. 설령 머지않아 깰 수밖에 없는 도피라 할지라도.

두 이유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어느 쪽이든, 깨어 있는 것보다 자는 편이 행복하고 자유롭다는 것이다. 사실 깨어 있는 것이 자는 것보다 어떤 점에서 낫다는 말인가? 잠 속에서야말로 인간은 진정으로 행복하고 행복 이전에 행복하며 심지어 더 자유로운데. 깨어 있으면서 가꾸고 생산해야 할 나야말로 삶 전체를 수동적으로 만들어버리는데. 어쩌면 살기 위해서 자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위해서 사는 걸지도 몰라. 그런데 정말로 깨어 있는 것이 자는 것보다 불행하다면, 그래서 좀처럼 침대에서 일어나려 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그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매일 밤 아침 해를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도 않고, 살던 죽던 아무 느낌도 들지 않고 무덤덤하다면, 도대체 그 삶의 가치는 무엇일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죽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죽는 것이 두려워서고 죽지 못해서며 더 근본적으로는 적극적으로 죽으려는 의지조차 없기 때문이다. 눈만 감으면 되는 잠과 죽음은 너무나 다르다. 대부분의 수동적 삶에는 죽음조차 불가능한 것이다. 잠은 지쳐버린 수동적 노동자를 위한 유일한 도피처다.

그럼에도 두 가지 이유, 삶이 너무 무겁다는 것과 무게가 없다는 것을 구분한다면, 그중 더 근본적인 문제는 후자다. 간절한 목적이 있다면 삶의 수동화 문제는 많은 부분 해결된다. 예를 들어 반응에 있어서의 지나친 섬세함이 꺾인다. 매사에서의 즐거운 투박함이야말로 생명력이 돌아온다는 증거다. 섬세함과 생명력의 반비례 관계는 문화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바다. 자기의 진정한 힘을 발견하고 몰입하는 이가 어찌 잡다한 섬세함 따위에 신경 쓸 수 있겠는가? 낳는 자가 어떻게 일상에 완벽하게 반응하겠는가? 심지어 목적은 자발적으로 삶을 더 복잡하게 만들게까지 한다. 사랑을 하는 이는 더 정교하고 복잡한 스케줄을 삶에 끌어들인다. 그러나 그것은 무겁지 않다. 목적이 그 모든 것을 능동적인 것으로 바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무거움의 문제가 무게 없음의 문제에 완전히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 화살이 난다고 해서 중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듯. 지나친 반응의 요구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능동적 생명력조차도 늘어지게 만든다. 가볍게 솟구치려는 욕망과 가벼워지려는 욕망은 이 지점에서는 분명히 구분된다. 물론 철저히 가벼워져봐야 결국 잠 이상은 아니라는 점에서, 도피성 수면을 끝내는 결정적인 열쇠는 분명 목적이다. 그러나 진정한 목적이 잉태되게 하기 위해서라도 가벼움이 요구된다. 진정으로 가벼운 이에게는 자연스레 목적도 깃드는 법이다. 즉 침대에서 내려오기 위해서는 두 가지 의미 모두에서 가벼워야 한다.

두 가벼움 외에 또다른 해결책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것은 규칙과 습관이다. 정확한 기상을 어겨서는 안 되는 규칙으로 삼고 반복을 통해 의식 이전의 습관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이는 분명 위의 두 관념적 가벼움에 비해 보다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러나 오히려 더 어렵고 비현실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칸트조차도 규칙과 습관만으로는 일어날 수가 없어 끈질기고 단호한 하인을 필요로 했다. 하인이 깨운 뒤에도 제발 더 누워 있게 해달라고 빌곤 했다니, 아마 하인 없이 알람만 있었다면 그의 전설은 상당 부분 시시한 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랬다면 후세에는 더 좋았을 것이다. 인간이 규칙과 습관의 시계로 살 수 있으리라는, 불가능한 데다가 해롭기까지 한 환상을 불어넣진 않았을 테니. 이런 환상은 군인들에게나 현실이다. 삶에 대해 어떠한 의심도 품지 않고, 품지 않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그 인종 말이다. 그러나 그 외의 다른 인간들에게는 결코 현실적이지 않으며, 삶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희열과 환멸 사이를 오가는 사유가 종족에게는 더더욱 적합하지 않다. 규칙과 습관은 두 가지 가벼움을 돕는 도구일 때만 진정으로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도피성 수면이 해결해야 할 문제이긴 한 걸까? 왜 계속 누워 있으면 안 되나? 반응이 삶의 전부인 수동적 인간이 잠을 선택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을 말릴 근거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 근거는 오직 목적의 도래에 의해서만 주어지며, 목적이 없는 상태 중 최상인 궁극의 가벼움은 잠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도피성 수면을 가벼움과 구분해야만 한다. 가벼움은 그 자체만으로는 잠과 구분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목적을 잉태할 수 있고, 중력을 최소화함으로써 목적으로 날 수 있게 한다. 가벼움과 목적의 이 같은 조응은 깨어 있는 시간뿐만 아니라 침대 위의 시간까지도 포함하여 삶 전체를 변화시킨다. 삶 전체를 가볍게 만든다. 반면 도피성 수면은 어떠한 변화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히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계속 도피하기만 하면 언젠가는 도피조차 불가능하게 된다고. 잠조차도 깨어 있을 때와 분리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눈꺼풀 밑의 꿈은 깨어 있을 때의 꿈이 자아낸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피성 수면은 진정으로 삶 전체를 가볍게 만들 시간과 힘을 모조리 삼켜버린다. 그 표면적 가벼움은 실은 삶에 무게를 더하고 있는 것이다. 지끈지끈한 두통처럼. 그래서 그것은 해방이 아니라 도피다. 중력의 악순환은 침대 밑과 위에서 얼굴을 정반대로 바꿔가며 반복된다. 결국 꿈은 깨어 있을 때 꿔야 한다. 진정으로 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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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에 kr-pen을 추가해보시면 어떨까요. 첫 포스트시네요. 반갑습니다. 지금은 살기 위해서 자는 편인데, 잠자기 위해 살았던 때도 생각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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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도피성 수면에 능한 사람이라 반가워서 들어왔다가 이렇게 좋은 글과 작가분을 만나네요. 오늘 만큼은 안자길 잘한 것 같습니다.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