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의 열병

in kr •  6 years ago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 축복받은 베아트리체.jpg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 <축복받은 베아트리체>. 이미지 출처)

사랑은 몰라도 짝사랑은 열병이 분명하다. 어떤 낭만적 미화의 뉘앙스도 없는 의미에서의 열병.

사랑(성애)이 소유욕이라는 것에서 시작하자. 예를 들어 어떤 축구 팀을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그 팀 선수 중 누구도 내 존재조차 모른다 해도, 거기에는 짝사랑의 고통도 개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따금 「왜 혼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짓거리에 시간과 돈과 감정을 소모하고 있을까…」라는 허무감은 오더라도, 그것을 짝사랑의 고통이라고 진지하게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반면 인간에 대한 사랑은 명백히 한 인간을 소유하고 싶다는 것, 그에게 열렬히 사랑받고 싶다는 것, 그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짝사랑의 고통은 이 욕망과 현실 사이의 메우기 힘든 괴리다. 사실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찬미하곤 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보다는 축구 팀에 대한 사랑에서 더 많이, 더 순수한 형태로 찾을 수 있다. 사랑에 대한 사랑에 주의하라!

그것은 이루기 어려운 소유욕의 고통이다. 비슷한 사례를 떠올려보자. 가지고 싶은 스마트폰을 살 돈이 없다던가, 들어가고 싶은 대학에 들어갈 성적이 안 된다던가 등등. 그렇다면 똑같이 충족하기 힘든 이 소유욕들과 짝사랑은 무엇이 다를까? 당연히 인간이 주는 쾌와 가치는 스마트폰이나 대학 따위의 단순함과는 수준이 다르다. 심지어 파리스가 보여주었듯, 권력이나 승리보다도 우위에 있는 것이다. 스마트폰과 달리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며 나를 보고 다가온다. 그리고 나를 사랑해준다. 쾌의 정도가 다른 수준을 넘어 의미의 측면에서 전혀 다른 차원에 놓여 있는 것이다. 혼자서 외롭게 의미를 부여하던 나의 눈동자와 공명할 또다른 의미의 샘을 찾았기 때문이다. 권력도 승리도 스스로 생각하는 소유물들을 주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사랑하는 사람처럼 생생하게 현현해 있지는 않다), 자신의 의지로, 순수하게 나라는 인간 자체를 보며 사랑해주고 따뜻하게 쓰다듬어주는 소유물이라는 최고의 기쁨은 만족시켜주지 못한다. 수많은 권력자들이나 승리자들이 가장 끔찍한 고독에 고통받았음을 떠올려보라. 모든 이에게 우러름과 두려움을 받았지만 정작 가까이에서 그를 진심으로 포근하게 안아줄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파리스는 현명했다. 메넬라오스에게 처참하게 패한 후 성안으로 도망가 헬레네와 달콤한 관계를 가진 파리스다. 승자는 누구고 패자는 누구일까? 사랑은 소유되지 않은 소유물이기에 최고의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그럼에도 소유라는 속성을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 단순히 타인의 능동적 사랑을 갈구할 뿐이라면 사랑과 우정은 뭐가 다른 걸까? 심지어 사랑 이상으로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고 사랑하며 지켜주는 것은 우정인데 말이다. 그러나 사랑과 달리 우정에서 몸이 불타는 고통을 겪진 않는다. 인간은 단순히 능동적인 인간과 교분을 나누고 능동적인 사랑을 받는 것을 넘어, 그를 타인에게 허락하지 않은 채 독점하고, 그의 능동적인 승낙에 의해 그의 육체와 영혼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향유하며 깊숙이 들어가 자신을 새기고 싶어하는 것이다. 반면 우정은 어떤 소유도 독점도 삽입도 허락하지 않는다. 우정은 철저히 서로의 경계를 지키고 존중하기에 성립한다. 그래서 우정은 사랑처럼 천박하지도 어리석지도 않은 고귀한 것이지만, 사랑처럼 뜨거운 욕망의 대상이 되지도 않는다.

사랑은 분명히 소유욕이며 위험할 정도로 강한 소유욕이다. 많은 문제는 이를 분명히 하지 않고 적당히 흐릿하게 둔 채 천상의 금가루를 뿌리는 데서 오지 않을까? 소유욕이라는 당연한 개념을 고려에서 빠뜨리면 자신의 사랑 자체를 기묘하게 오해하게 마련이다. 병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열에 휩싸인 것으로. 높은 곳에 올라와 있는 것으로. 물론 동시에 사람들은 소유욕이라는 개념에만 지극히 편협하게 집착하지만 말이다. 재산을 잃어버릴까봐 전전긍긍하는 천박하고 불쌍한 노예! 사랑을 하려는 사람이든 그 세이렌을 돌파하려는 사람이든 소유욕에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소유욕의 추한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 인간과의 수많은 깊은 가능성이 사랑이라는 독점적 소유의 형식에 묶여 있는 것이 원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랑은 진정한 욕망이 아닌, 오히려 진정한 욕망을 제한하고 방해하는 것이 된다. 정식 연애 중과 별개로, 많은 짝사랑 시점(prolétaire)의 심리는 여기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다만 여기서는 독점적 소유로서의 사랑을 갈구하는 것을 전제하기로 하자.

이루기 어려운 소유욕의 고통을 희석시킬 수 있는 장치가 인간의 의미망에는 충분히 마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의 쾌는 수준이 낮은 쾌고 다른 방식으로 충분히 대체할 수 있는 쾌다. 대학이 제공하는 수준 높은 교육 기회나 사교의 기회는 이론적으로는 다른 방식으로도 열려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이 다른 것들에 의해, 다른 방식에 의해 충분히 대체될 수 있다는 식으로 고통을 희석시킬 수 있다. 심지어 하찮고 속물적인 쾌에 대한 은밀한 경멸도 도움이 된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검증된 바다. 그러나 물질에 대한 모든 고고함은 사랑의 세이렌만큼은 당해내지 못하고 울부짖으며 침몰하고 마는 것이다.

각각의 인간이 지닌 대체 불가능한 고유성이 다른 소유욕들과의 차이일까? 그래서 「인간 역시 그저 물질 덩어리일 뿐이야!」나 「더 좋은 사람은 세상에 충분히 많아. 충분히 만날 수 있을 거야.」 따위의 말로 위로할 수 없는 걸까? 분명 이 조언들은 전혀 효력이 없다. 한 인간의 기적적인 고유성에 대한 몰입, 그에 기반한 사랑의 의미망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개인은 없다. 그러나 동시에 이와 반대로, 사람들은 냉철하게 상대방의 좋음과 가치를 평가하고 서열을 매길 줄 안다. 분명 인간 각각의 고유성은 어떤 보물의 고유성보다도 강력한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끊임없이 매력을 평가하고 쉽게 한눈을 팔며 미련 없이 떠날 줄도 안다. 파리스는 아내 오이노네가 있었음에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헬레네를 골랐다. 로미오가 자신의 신앙을 저버리는 데는 단 하룻밤, 아니, 단 한 순간으로 충분했다. 즉 고유성은 인간의 매력 및 짝사랑의 고통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긴 하지만, 그렇다고 대체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물질을 다른 물질로, 기회를 다른 기회로 대체하는 것을 생각하듯 인간을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다는 게 문제다. 인간의 경우는 상상이 아닌 더 좋은 고유성이 실제로 나타나야만 대체가 가능하다. 마치 인간이 속해 있는 의미망에는 최소 하나의 사랑의 칸이 의무적으로 할당되어 있어 다른 기호로 대체될 수 있을 뿐 비울 수는 없는 것만 같다. 그러나 더 좋은 고유성을 찾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인간에게 매력을 느끼고 사랑에 빠지는 것은 허겁지겁 쇼핑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애초에 더 좋은 고유성을 찾겠다고 안달이 난 사람에게 누가 자신의 문을 열고 고유성을 보여주겠는가? 사랑에 안달이 난 사람에게는 매력이 없다. 오히려 경멸스러울 뿐이다. 무엇보다 인간을 다른 인간으로 대체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물건을 다른 물건으로, 기회를 다른 기회로 대체하겠다는 발상과는 질적으로 다른 거부감을 수반하게 마련이다. 인간의 고유성은 분명 과장된 개념이지만, 동시에 사랑의 강렬한 감정은 인간의 고유성에 대한 신화와 믿음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냉철한 평가와 서열화의 결과면서도 동시에 모든 평가의 개념을 거부하는 고유성을 믿는다는 것. 이는 사랑 자체가 지닌 고통스러운 양면성이다. 어느 하나를 빼보아라. 기묘한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다만 평가와 서열 매기기에 비해 고유성의 서사는 다소 역사적인 면이 있지 않을까?

소유욕과 고유성의 결합에서 무시무시한 괴물이 태어난다. 오직 한 명만이 가질 수 있는 것. 동서고금을 통틀어 형제와도 나눌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권력이고 하나는 여자다. 신의 사랑을 받고 제일의 권력을 얻었으며 많은 아내까지 원 없이 거느렸던 다윗조차 고작 한 명의 여인 때문에 죄를 저지르고 신의 저주를 받았다. 여기에서 그나마 자유로웠던 것은 스파르타인들밖에 없다. 위대한 뤼쿠르고스!

사랑의 대단히 기묘한 난이도 역시 중요하다. 소유의 실현이 너무 어려우면, 불가능하다면, 그 허황됨에 따뜻한 피부의 실감이 사라지면서 소유욕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짝사랑의 실현 불가능성에 대해 아무리 냉정하게 조언해도, 결국 가능성이 있기에, 유의미할 정도로 있기에 짝사랑이다. 두 인간의 관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영원한 교훈의 출처인 역사와 예술은 불가능해 보였던 사랑의 실현을 너무나 많이 전하고 그려왔다. 물론 역사와 예술은 그 반대의 사례, 심지어 치명적인 상처와 파멸을 그 이상으로 많이 전하고 그려왔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상처와 파멸이 달콤한 독약이다. 사랑 없는 합리적인 세상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플라톤이 말한 대로 시인들을 모조리 내쫓아버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소유욕을 충족할 수 없는 이유를 깔끔하게 납득할 수 없다는 것. 스마트폰은 돈이 없으니까. 대학은 성적이 안 되니까. 그런데 사랑은? 외모 때문에? 더 멋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서? 그저 적극적으로 다가서지 않았기에? 사실 그도 나를 좋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다만 나와 마찬가지로 두려움에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명확한 정답은 없다. 불투명한 피부와 옷은 모든 것을 가리고 갈라놓는다. ― 그것이 매력과 사랑의 조건이기도 하지만! 심지어 같은 조건을 맞춰도 무수한 변수에 따라 계속 다른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래서 그 관계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100% 깔끔하게 납득할 방법도 없다. 「다 외모 때문이지 뭐. 인간 뭐 있냐? 다 외모 보고 결정하는 거야.」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의 입에는 언제나 진짜 원인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가 서려 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원인이 아니다. 그딴 걸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저 상처를 줄 뿐이다.

짝사랑은 소유욕의 고통이며, 따라서 사랑을 소유해야 하는 소유자 자아의 문제기도 하다. 짝사랑에서 자아는 정반대되는 두 고통을 동시에 겪게 된다. 한편으로 그는 감히 고백할 자격이 없는 왜소한 자신의 모습에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자신이 사랑을 소유할 정당한 자격이 있는데도(예를 들어 껍데기 밑의 내면적 고귀함!) 부당한 사정으로 인해 얻지 못하는 것이라고 암암리에 전제한다. 뻔뻔하고 주제를 모른다는 비판은 소용이 없다. 자아는 사람들과 영원히 다른 방향에서 자기를 보기 때문이다. 소유자로서의 자기에 대한 사랑과 요구는 두 가지 정반대의 상으로, 즉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분노와 자기의 정당한 권리가 실현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분노로 분열되며, 이 둘은 갈마들며 공존한다. 이는 심지어 나는 그를 사랑하는데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굴욕감, 그는 나라는 사랑받을 만한 자격자를 충분히 보았음에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분노와 억울함이기도 하다. 짝사랑은 진정 누구에 대한 사랑인 걸까? 나르키소스는 어떤 의미로도 짝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나 자체로 충만하지 않다. 나는 언제나 사랑받아야 하는 나다. 현대적 자아는 예쁘지 않아도 된다느니 아름답지 않아도 된다느니 따위의 자위를 즐긴다. 그러나 사랑받지 않아도 된다는 고고한 자아는 없다. 사랑받지 않아도 된다니, 이 얼마나 흉하고 괴이한 소리인가? 그런데 이 전제가 없으면 현대적 자위는 뻔뻔한 기만이 되어버리지 않나? 그는 예쁨이니 아름다움이니 하는 외부적 개념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나 자체의 고유한 가치를 믿는다. 수많은 껍데기를 넘어 그것을 볼 수 있는, 나를 사랑할 자격이 있는 존재를 믿는다. 이 나르키소스는 제정신이 아니다. 자기는 상대를 볼 때 껍데기 말고 뭘 보나? 그런데 이 착각이 아니면 사랑은 어떤 느낌일까? 수면의 허영에서 자유로운 사랑이란 어떤 색깔을 하고 있을까?

불타는 소유욕, 달콤한 서사, 소유 자격자로서의 자아가 결합해 그 어느 때보다 상식과 합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광경을 자아낸다. 분홍빛만 살짝 걷어내면 누구나 미친 듯이 웃어대다 못해 불쾌해할 오물 범벅 코미디가. 머지않아 자기조차 몸서리칠 오점 범벅 코미디가. 이 코미디의 잔혹한 지휘자는 신들의 마지막 벌, 희망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당한 허영이고, 상식과 합리 이상으로 정당한 코미디다.

짝사랑의 가장 잔혹한 점, 그것은 정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모든 슬픔, 소유욕의 좌절은 정당화할 구석이 있다. 예를 들어 다수 인간들로부터의 소외(고독)는 가장 깊고 독창적인 정신을 탄생시킨다. 물질적 소유욕의 좌절은 물질적 쾌의 허망함과 위험성(예컨대 소비 강박에 빠지게 하는 현대 문화)을 고찰할 기회를 준다. 어떤 기회의 무산은 다른 기회의 발견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분노는 적절하게 통제될 경우 평정으로는 얻을 수 없는 풍요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패배조차도 귀중한 교훈을 준다. 그것도 결코 잊을 수 없는 형태로 말이다. 자, 그럼 짝사랑은? 유일하게 무언가를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예술가들뿐이리라. 물론 대다수의 결과는 청승맞을 뿐 진부하기 짝이 없는 양산작들이지만. ― 그리고 현실에서 또다른 청승과 진부함을 양산하는 범죄작들이기도 하다. 이게 새롭고 유의미한 무언가를 얻어낼 수 있는 주제기는 할까? 단테의 짝사랑이 그토록 풍요로웠던 것은 베아트리체가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산 사람에 대한 짝사랑은 죽은 사람에 대한 짝사랑보다 더 나쁘다.

실현된 사랑은 그 고유한 관계 양상 속에서 그것만의 것을 준다. 그러므로 설령 이별하더라도(오히려 이별을 통해 더욱) 남는 것은 많다. 그러나 짝사랑은 정말로 다 똑같다. 짝사랑에는 사실 어떤 고유성도 없이 그저 진부한 환상과 감성만이 반복되기 때문일까? 고독도 사랑도 독특한 무언가를 발견하게 해주지만 짝사랑만은 정말로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즉 짝사랑은 사람을 그저 진부하게 만들 뿐이다. 자아를 그저 진부하게 반복할 뿐이다. 물질적 소유욕의 경우처럼 그 쾌 자체를 비하하고 경멸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사랑은 그렇게 비하하기에는 너무나 크고 어려운 적인 것이다. 교훈? 앞으로는 함부로 사랑하지 않겠다는 움츠러듦? 여기서는 스케일이 너무 작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짝사랑이 주는 유일한 효용은 수많은 짝사랑 관련 양산작들에 눈물 흘릴 수 있는 감성을 준다는 것이다. 어정쩡한 짝사랑의 눈물보다는 거절의 아픔이 어떤 면에서나 낫다. 전체적으로 고통은 덜하고 얻을 것은 더 많다. 왜? 거절에는 상처가 있다. 그 상처로 인해, 그 상처와 맞서며, 인간은 성장할 수밖에 없다. 반면 짝사랑에는 거절과 같은 상처가 없다. 그저 진부한 환상과 감성과 청승맞음의 반복 재생뿐이다.

분홍빛 장막을 걷어내고 보면, 짝사랑이란 처치 곤란한 열병이고 불모의 수렁이다. 인간이라는 합리적 동물이 이 수렁에 빠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사랑의 실현이 기쁜 것은 그만큼 주변에 펼쳐진 무섭도록 적막한 수렁 때문이기도 하리라. 그러나 사랑은 그 자체에서 나가려는 발길을 적당한 성공 가능성으로 다시 붙잡아놓는 간교한 도박장이기도 하다. 사랑만큼 포장이 잘된 도박이 있을까?

짝사랑의 문제가 고독도 사랑도 승리도 패배도 아닌 어정쩡함에 있다면, 무언가를 얻을 그릇도 안 되는 소심함에 있다면, 성공하든 실패하든 후회하지 않을 만큼의 고백을 해버려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도 사랑은 희망으로 인간을 유린한다. 섣불리 고백하지 않는다면, 아픔을 견디면서도 묵묵히 시간을 보낸다면, 언젠가는 우연이 둘을 자연스레 맺어주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날까지 솔직하지는 않지만 소소하게 기쁜 가면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가슴에 달콤한 상처를 새기면서. 열지 않은 선물 상자는 모든 것이 들어 있는 선물 상자, 판도라다. 가지지는 못하지만 잃어버리지도 않는다. 세상 어디에도 다시없는 그 고유성을. 베일을 두른 그 얼굴을. ― 누구의 얼굴?

사랑이 오직 사랑으로만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또 하나의 나르키소스가 필요한 걸까?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는 수면의 베일 대신, 소유하든 상실하든 자신의 항로를 선택하는 냉혹한 자부심이. 「진부한 청승맞음으로, 하찮고도 답 없는 문제로 소모하기에는 내 시간과 가능성은 너무나 귀중하다. 나는 내가 저질 환상에 빠져 있는 것을 견딜 수 없다. 차가운 거절이든 그것보다 더 차가운 고독이든, 나는 무언가를 충분히 얻어낼 수 있고 시원하게 잊어버릴 수도 있다. 어떤 사랑도 어떤 소유물도 나보다 우월하고 귀중하지는 않다. 나는 소유의 소유물이 아니다.」 거울 없는 나르키소스는 소유와 상실의 구도 자체를 전혀 다른 직조로 대체한다. 여기서는 사랑의 방향만이 다른 것은 아닌 것이다. 이것은 승산 없는 판을 빠르게 접고 다른 소유의 기회를 기웃거리는 현대적 합리성이 아니다. 이 수선화의 아름다움에는 두려운 냉기가 감돈다. 어쩌면 짝사랑의 열병 따위보다 훨씬 두려운 냉기가. 그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건 무슨 뜻이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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