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과 관계

in kr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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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스툼 유적의 한 무덤에서 발견된 프레스코.)
[이미지: Cdimaio53, 2012-03-07, 위키미디어 공용.]

어떤 선물을 줘야 할까? 가장 먼저 떠오르고 또한 유일한 대답: 받을 이가 좋아하는 것을 준다. 그래서 요즘은 현금을 주는 것이다. 상품과 취향이 넘쳐나는 현대 사회에서 뭘 좋아하는지(무엇이 필요할지)는 감 잡기 어렵고, 또 그럴 시간과 여유도 없다. 하지만 아무리 상품과 취향이 많아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어디 있으랴. 돈은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다 ― 아마도 마음으로도? 그러나 이는 좋은 대답이 아니다. 확실히 어떤 관계에서는 이런 방식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현금 선물이 선물이라기보다 차라리 모욕으로 보이는 것은 너무 구태의연한 탓일까? 실용파들은 선물의 의미를 너무 축소하고 있다. 그들은 선물을 의례적으로 정해진 날에 주는 호의의 표시 정도로 여기고 있다. 설날에 주는 세뱃돈 정도로. 그렇지만 선물의 본질은 그런 호의가 아니다. 선물은 보다 깊숙한 관계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준다는 것에서 중요한 것은 좋아하는 것을 주는 자의 호의가 아니다. 좋아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훌륭하게 준비하는 감각과 정성인 것이다. 즉 선물은 관계의 충실성 및 충실 의지를 서로 확인하는 의식이다. 너라고 하는 인간을 진지하고 섬세하게 바라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성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 그러나 남성들에게는 천성적으로 익숙해지기 힘든 짓거리. 여자가 남자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단기간 관계 의무 면제권이다 ― 그녀가 정말 남성을 잘 알고 호의적으로 대하고자 한다면. 그러나 그 선물을 받을 수 있는 남성이 있을까?

그러나 그런 선물만 있을까? 그런 관계만 있을까? 선물은 서로의 호의와 선호를 반복하는 의례일까? 보다 능동적이고 심층적인 선물이 있다. 받을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을 선물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그 사람을 초대하고 이끄는 것이다. 이는 관계 맺음 자체의 두 본질, 공존하면서 때로 충돌하기도 하는 두 본질과 같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과 만나고 서로가 좋아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호감을 쌓고 관계를 지속한다. 쾌와 불쾌와 취향의 분포도에 부합하는 상대를 만나고 그 분포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두 사람 각자를 재생산하는 것이다 ― 인간은 지금의 자기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타인의 눈동자에서 몸을 씻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들은 상대를 자기가 좋아하는 방향으로 초대하고 바꾸려 한다. 쾌와 불쾌와 취향의 분포도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두 사람을 다르게 바꾸는 것이다. 주변 세계를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빚으려는 욕망. 이는 인간의 심층적인 면모이며 관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차이의 존중과 만끽이란 오직 이 두 가지 위에서의 이야기다. 신선놀음을 할 것이 아니라면.

준다는 것은 보통 어떤 사람의 현재 존재 방식에 부합하는 것으로만, 그것을 보존하는 것으로만 이해된다.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동등한 보상이라는 짝을 전제한다. 내가 너에게 신경을 쓰고 기분 좋게 만들어줬으니 너도 똑같이 내 비위를 맞춰줘. 그러나 주는 것은 또한 변하게 하는 것,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 지극히 이기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이기적 선물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사람들은 언제나 선물을 주는 자의 어려움과 덕목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그러나 받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며 나름의 덕목이 필요하다. 훌륭한 감각과 충실성은 주는 자의 문제만이 아니다. 첫 번째 선물이든 두 번째 선물이든 선물은 철저히 상호적인 것이다. 선물이라는 행위를 싫어하게 된다면 그것은 오직 받는 어려움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물을 가볍게 만들어버리곤 한다. 관계를 가볍게 만들곤 한다.

두 번째 선물을 주고자 하는 이는 또한 받을 준비도 되어 있어야 한다. 주기만 하는 것은 관계가 아니라 전도다. 선물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는 어려운 문제다 ― 누구에게 받을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두 번째 선물, 그러한 발상은 오늘날 부담스럽다. 그것은 심지어 주제넘는 오지랖이나 꼰대짓으로 보인다. 왜? 예를 들어 사람들은 언제나 친구가 아닌 윗사람에게서 그런 시도를 '당하기' 때문이다. 동등한 권력을 고려하지 않는 호의는 폭력적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관계의 심층적 성격이 거부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날의 친구 관계, 차이와 다양성을 말하는 시대의 친구 관계가 사실 동일한 선호와 취향과 세계관의 재잘거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어느 때보다도 많이 연결되고 쉽게 연결되는 세상이지만, 사람들은 타인을 대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심지어 싫어한다. 오늘날에는 어차피 관계를 통해 변화해야 할 이유가 없다. 수많은 편리한 매체를 통해 언제든지 얼마든지 비관계적으로 변화를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에게 관계의 역할은 그저 수많은 매체가 채워주지 못하는 조금의 체온, 조금의 공감, 조금의 살아 있다는 실감을 채워주는 정도가 된다. 거기서 필요한 것은 오직 관계의 첫 번째 성격뿐이다. 같은 쾌와 불쾌와 취향의 분포를 공유하는 관계. 물론 이런 사람이 실제로 비관계적 매체를 통해 차이와 변화를 추구하는 경우는 없다. 관계 이상으로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매체를 통해 귀찮게 차이와 변화를 추구할 이유가 무엇인가? 매체가 대체할 수 없는 진정한 관계의 잠재력: 어떤 경우에도 자기가 전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는 것. 몸과 감각 전체가 미지의 가능성에 노출되게 된다는 것. 현대인들은 이 잠재력을 곧 트러블 가능성, 불쾌함으로 받아들인다. 취향입니다. 꺼져주시죠. 그러나 이로써 사라지는 것이 위험과 부담뿐일까? 심층적 본능 자체가 불가능해지지 않는가? 나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가 굳어버리지 않는가?

인간은 오로지 자기가 존경하는 이에 의해서만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존경이란 동등한 친구 관계와 가장 반대되는 개념으로 보인다. 즉 두 종류의 인간만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나보다 많은 것이라곤 주름과 권력밖에 없는 꼰대거나, 나이도 보이는 세계도 다 똑같은 친구거나. 감탄하고 존경심을 느낄 수 있는 친구가 없다는 것. 친구와 같은 풍경을 재잘거릴 뿐 친구를 따라 다른 세계로 들어가지는 못한다는 것. 오늘날 두 번째 선물은 받는 것도 주는 것도 어렵다. 이는 현대 문화에 있어 무엇을 의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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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읽고 갑니다. 다음에도 글 많이 올려주세요.
보팅하고 갑니다 맛팔 부탁 드려요......

잘 보고갑니다. 좋은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