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으면서 등장하는 두 가지 키워드는 “의식적인 연습”과 “심적 표상”이다. “의식적인 연습”이라는 표현을 설명하면서 “사람이 어떠한 기술을 늘상 해오던 대로, 자신에게 익숙한 환경에서, 별 생각없이 단순히 연습”만을 한다면 그 사람은 1만 시간을 투자해도 절대로 뛰어난 경지로 도약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1만 시간을 투자하면 어떤 분야에서든 최고의 경지에 올라선다”라는 슬로건이 많은 이들에게 “포기하지 않고 노력을 하면 최정상에 오를수 있구나”라는 소망을 주었을런지 모르지만 사실 그 속으로, 디테일로 들어가서 “연습과 훈련을 어떻게 어떠한 방식으로 할 것인가?”라는 명제에 부딪히면 “단순히 많은 시간 투자는 오히려 독이 된다”라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그러한 시각에서 이야기를 한다.
“의식적인 연습”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저자는 “comfort zone(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함을 주는 익숙한 환경”에서 탈출을 하라는 것과 좋은 피드백을 줄 수 있는 선생이나 코치를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문득 체육과 진학을 위해서 축구를 잠시 배웠던 시간이 떠올랐다. 나와 또 한명의 친구, 이렇게 딱 둘이서 강습을 받았었는데, 그 친구와는 다르게 유독 실력이 늘지 않는 내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항시 그 친구와 비교되는 내 모습에 “나는 공으로 하는 운동에는 재능이 없나보다”라는 생각을 매일같이 했던 고3시절이었다. 그러한 때에 “늘상 해오던 대로의 방법이 아닌, 자신이 편안함을 느끼는 방식이 아닌, 교습법에 있어서 발상의 전환이 있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맞지 않는 훈련 방식과 오래전부터 통용되어던 연습방식으로 인해 재능이 없다라기 보다는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연습을 할때 “아무 생각 없이 마냥 오랜 시간을 투자할 생각을 하지 말고, 의식적인 생각을 하면서, 발전할 수 있는 여지를 스스로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주변과 주위를 살피면서 연습하는 것 그리고 이것을 도와줄 수 있는 스승이나 코치를 찾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러지 않고 마냥 오랜 시간을 훈련하고 노력한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실력상승과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의식하지 않고 별 생각없이 오랜 시간 훈련및 노력을 하느니 차라리 단 시간을 연습해도 “의식적인 연습”을 하라고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다.
의식적인 연습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분명히 납득이 되었으나 솔직히 “심적 표상”이라는 것에 있어서는, 저자가 여러 사례들과 그에 관련된 구체적인 데이터들을 책에 가지고 왔어도 사실 개념을 잡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의식적인 연습”이 쌓이다 보면 “마음속에 어떤 이미지가 그려지거나, 일종의 지도와 같은 것이 확립”되어 지는 것이 심적표상이 아닐까 싶다. 악기 연주자이든, 공부를 하는 학생이든, 운동 선수이든, 꾸준한 “의식적인 연습”을 통해 “심적 표상”이 확립이 되면 어떻게 연주를 할것이며, 어떻게 접근을 할 것이며, 어떻게 표현을 할 것이며 등등의 로드맵이 그려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도를 통해 운전자가 단순히 목적지를 찾아가는 것을 넘어서서 목적지로 가는 동안에 어떤 상점을 들리고, 저 골목에 위치한 기념품 가게를 기억하고, 반대편 상점에 진열되있는 가방을 보고 등등의 디테일한 것들을 운전하면서도 관찰하고 구경하고 기억해 내듯이 건반을 쳐도 그냥 연습을 하는 것이 아닌 “이 파트를 칠때는 어떻게 표현을 하고, 이 부분의 음은 더 강하게 치고 등등의 부분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고치고, 더 낳은 훈련법과 교습법을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의식적인 연습”과 “심적 표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서로 상생하는 관계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적인 연습”과 “심적 표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또한 저자는 “재능”에 대한 자신의 시각을 이야기한다. 사실 우리는 “이 사람은 음악에 뛰어난 재능이 있다”내지는 “이 사람은 스포츠에 혹은 미술에 소질과 재능이 없다”는 말에 너무나 익숙해 있고, 또 은연중에 “내가 어떤 분야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기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한번에 하루아침에 무언가가 되길 바라는우리의 숨은 심리”를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떤 분야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사람이 과연 하루아침에 등장한 것이겠는가? 그리고 어떤 분야에 재능이 없다라는 말은 사실 어떤 의미에서 “내가 무엇을 못하는 것에 대한 이유로 들이대기에는 이마만큼 속편한 핑계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떤 이가 무엇을 잘 하지 못할때는, 그리고 무엇을 계속적으로 훈련 및 연습하는 것을 포기하게 되는 이유는 “재능이 없다기 보다는 동기부여에 실패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한다. 사실 이 대목을 읽을때 “무언가를 처음할때 잘 하지 못하면, 우리는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얼마나 부정적인 피드백을 듣는가?”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무엇을 배우는 첫 시기에 좀 잘한다 싶으면 “너는 그쪽으로 재능이 있다”내지는 무엇을 배우는 처음 시기에 잘 하지 못하면(잘하지 못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 아닌가?) “너는 그 쪽으로 재능이 없다”라는 말을 너무나 쉽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수많은 말들로 인해, 혹은 부정적 피드백들로 인해 펴보지도 못하고 묻히고 썩히게 되는 가능성이나 잠재력은 얼마나 많을까? 실제로 이 책에서는 어릴때 재능이 발견되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묻히게 된 케이스와 시간이 지나고 나서 후에 재능이 발견되고 계발된 케이스를 이야기한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어쩌면 우리는 큰 거짓에 속아 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성경적인 시각에서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물위를 걸으셨고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이 두려워서 비밀리에 방문을 닫고 모여 있는 그 곳에 나타나셨다. 나는 이 대목을 생각해 본다. 만약에 중력의 법칙과 공간이동이 가능한 사람이 축구를 배우고 훈련한다면 그 사람이 나타내고 이를 수 있는 기량은 어디까지일까? 단순히 “이 사람은 축구에 재능이 있다 없다”라는 말이 “중력의 법칙을 초월하고 공간이동이 가능한 사람”을 담을 수 있을까? 이것이 그렇다면 다른 분야는 어떨까? “음악에 재능이 있다 없다 내지는 미술에 재능이 있다 없다”라는 말이 원죄로부터 자유한, 아니 어느정도 극복이 이루어진 사람을 담을 수 있을까? 죄가 들어오기 이전의 인간은 거의 신적인 존재였다는 것이 성경적인 시각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죄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박탈당한 것일까? 어떤 면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거의 신적인 존재에 죽지 않는 몸을 가졌기에, 악기면 악기, 스포츠면 스포츠, 공부면 공부… 모든 분야들을 다 해보고, 또 현재 시각에서는 비교도 안되는 기량에 각 분야별로 도달을 하면서, 동시에 “그 많은 분야들에서 정점을 찍으면서, 그 중에서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것을 선택”할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늘상 해 오던 대로 훈련하고 연습하고 노력하는 것이 단순히 실력향상으로 이어질 것이다”라는 잘못된 관념을 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로는 1만 시간 아니라 2만 시간을 투자해도 아무런 소득이 없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신앙에서도 그러한 것이 아닐까? 내가 예수를 30년 믿었다고 해서 믿은지 1년 된 사람보다 내 신앙이 낫다라고 말할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내가 주 안에서 죄를 이기는 것을 넘어서서 죄성을 더욱 다스려 나가게 된다면, 원죄가 침투하기 전의 완전무결의 상태로는, 육을 입은 상태에서 결코 도달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더더욱 거룩의 수준이 높아지는 지경으로 가게 되면, 어떤 면에서는 “나는 이러한 쪽으로는 재능이 없다”라고 믿어왔고 여겨져왔던 영역에서도 어떤 변화를 체험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늘상 해오던 식으로 각 분야에서의 연습및 훈련을 하지 않으며, 집중력을 가지고 “의식적인 연습”을 해야겠다. 스스로 comfort zone을 벗어나면서, 훈련방법을 제대로 설계한 뒤에 훈련을 하면 분야에 상관없이 기량향상을 경험하겠구나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살면서 당연시 받아들여져 왔던 개념이나 어떤 통념 그리고 어린 시절에 듣고 익숙해져 왔던 수많은, 그러나 잘못된 피드백들에 대한 폐해나 오류.. 그리고 그것들로 인해 내 맘 깊은 곳에 설정된 “잘못된 믿음”을 주 안에서 깨버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