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한화이글스와 빙그레의 추억

in kr •  6 years ago 

닉 혼비는 성공적인 데뷔작 <피버 피치>에서 한 문장의 명언을 인장처럼 박아놓았으니, 바로

"축구에 있어서 이혼은 가능해도 재혼은 불가능하다."

이다. 이 말은 '마누라와 차는 바꿔도 팀은 못 바꾼다'라는 영국 축구 속담(?)과 일맥상통하면서도 위악적인 마초이즘의 기름끼는 쏙 뺀, 보다 문학적인 버전이다.

야구도 마찬가지다. 프로리그를 가진 구기종목 팀스포츠라면 어떤 종목이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고로 비슷한 크보의 격언 또한 존재한다. '야구는 버려도 팀세탁은 불가능하다.'

나는 한화 이글스 팬들 백 명 사이에서 내가 가장 선배라고 주장할 수 있다. 공식적으로 이글스의 7백 2십 몇 번째 팬이기 때문이다.

빙그레 이글스가 창단되었을 때였다. 기족 구단의 팬심에 오염되지 않은 어린 팬들을 모집하기 위해 신생구단의 모기업 빙그레는 고무신과 막걸리를 뿌렸다. 실체는 난삽한 장난감 세트였지만 그 이름만은 찬란한 '어린이용 야구장비 풀세트'와 빙그레의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내걸었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공짜 장난감을 안길 수 있다는 사실에 재빨리 어린이 회원 가입을 신청했다. 그리하여 우리 형제는 빙그레 이글스에 장가를 들게 되었다. 자본주의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순정은 막대한 혼수에 팔려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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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은 환상적이었다. 유치찬란한 주황색 야구용품(이라 쓰고 장난감이라 읽는다)은 산동네의 좁고 찌글찌글한 골목에서 우리 형제를 대스타로 만들었다. 얼마 전에 만난 유년시절의 잊을 수 없는 단짝친구는 동생과 내가 '이글스 보이'가 되어 번쩍번쩍 등장한 일을 아직도 기억했다.

동네 슈퍼 냉장고에서 굳이 빙그레 아이스크림을 집으며 구단에 대한 의리라는 것도 경험해봤고 응원팀이 없는 아이들을 굽어보며 조직생활의 울타리 안을 차지한 선민의식도 맛봤다.

그리고 빙그레는 강팀이었다. 상대 투수가 흔들린다 싶으면 자비없이 터뜨리던 일명 다이너마이트 타선은 성장기 남성의 입맛에 잘 맞았으며, 아마 남성호르몬 조절에도 일말의 역할을 했다고 믿는다. 그렇게 이글스는 모기업이 한화로 바뀌고도 빙그레 투게더 아이스크림처럼 언제나 달콤할 줄 알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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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이 변한다는 십년 간, 이 팀은 전무후무한 역대급 비밀번호를 찍으며 나를 고통과 굴욕에 빠트렸다. 하지만 이혼은 가능해도 재혼은 불가능하며, 팀세탁은 다른 우주의 물리법칙이다.

어이없거나 아까운 패배에 TV에 리모컨을 내던지는 걸로는 팬의 고통을 체험했다 할 수 없다. 어느새 약팀이 된 팀의 모습에 '그깟 공놀이'라 짐짓 해탈한 척 하는 모습은, 말 그대로 척이지 진짜 해탈이 아니다. 내년은 나아질 거라고 기대하는 마음도 아니다. 진정한 해탈은 내년에도 나아지지 않을 것을 확신하면서 오늘도 졸전을 펼칠 대전구장을 향해 차를 모는 그 마음이다.

9회 말, 시합을 포기한 채 10대 0으로 지고 있다가 한 점을 냈을 때 , 그 득점 하나를 보여준 게 고마워 만면에 빙그레한 웃음을 띄우며 환호성을 지를 때,

병살타로 시합이 끝나도 김태균의 마지막 스윙폼은 상대 타자들보다 유려했다고 만족할 때,

꼴찌에 분노하기보다는 야구는 축구처럼 리그 강등제가 없다는 사실에 행복과 감사를 느낄 때...

비로소 팬은 해탈했다고 할 수 있다.

허나 해탈은 도달하는 것보다 유지하는 일이 더 어렵다. 열반이 해탈보다 윗길인 이유는 중생이 육신과 욕망의 지배를 받는 한 해탈은 거 뭐시기, 기독교적으로 말할라믄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거라서 글타.

견물생심이라 했다. 올 시즌 오랫동안 2위 자리를 유지하다보니, 최근 3위로 떨어진 게 안타깝고 분해 견딜 수가 없는게 아닌가! 2위를 견하니 1위를 생심한다. 그러니 3자가 전쟁포로에게 부여된 수인번도로 느껴질 수밖에.

가을에만 데려다줘도 한용덕 감독이 계신 곳을 향해 삼궤구고두의 예를 행하며 군신의 맹을 맺기로 결심한 적 언제이던가. 불과 두세달 전이다.

그러나 삼궤구고두와 칰전도비 없이도 우리는 이미 이어져 있다. 어차피 내 영혼의 일부는 청계... 아 아니 보문산 기슭에 할양되어 있다. 어느 해보다 뜨거운 이 여름에, 나는 야구중계를 보며 3연패중인 선수들에게 성을 내다가 문득 '우리 선수들은 얼마나 덥고 지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승패보다 어서 빨리 우리 선수들이 샤워기의 물줄기와 에어컨의 냉기로 탈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시합이 끝날 때까지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애증이란 이런 것이다.
결코 섞일 수 없어 뵈는 물과 기름이 마침내 서로 용해되어 정이 되었음을 확인하는 순간. 팀과 나는 이제 서로가 서로의 일부이며 나의 세계가 조금 더 확장되었음을 느끼는 순간이다. <머니볼>이 던지는 잠언처럼 그깟 공놀이가 주는 애틋함은 불합리하다.

그리고 인생은 불합리함을 받아들이는 아이러니한 긍정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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