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행복회로가 고장 난 사람이다.

in kr •  7 years ago 

#1
'누구도 나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나의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며 부풀어 있다.'면 나는 얼마만큼 행복한가? 내 상황을 비교적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는 가정 하에 그들의 확신과 나의 행복감은 비례할까?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행복의 조건'이라고 여기는 사물들이 나에게 충만하다면, '내가 행복할 것'이라는 그들의 기대감이나 단정은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나도 '행복하다'는 착각, 안도, 또는 인식을 하게 된다.

행복은 '타인이 나를 얼마나 행복한 사람으로 보는지'로 판별되곤 한다.

#2
이 것을 부정해보자. 100명이나 1000명이 또는 만 명이나 십 만명이 나를 보고 행복한 사람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행복하지 않다. 모두가 나에게서 행복의 이유와 조건과 근거를 발견하는데, 나는 무엇을 내세워 내가 '행복하지 않음'을 증명할 것인가? 단순히, "내 마음이 그래. 영 쓸쓸하고 불편한 것이 행복하지가 않네"라는 말로 나의 불행을 입증하거나 표현할 수 있는가? 이는

행복하면서 불행을 표상하는 기만 행위인가
대체로 행복하지만 간혹 드는 순간의 불만감을 강조한 것인가
아니면 참말로 불행한 것인가

#3
나는 항상 내 심리 상태를 살핀다. 내가 들떠 있다면 무엇을 연유로 이러는지 되짚는다. 우울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원인 모를 조울기질'따위는 없다고 믿는다. '조용히 차분하게, 작고 세밀하게 찾아보면 내가 지금 이 순간 들떠 있거나 침울한 이유는 발견 되기 마련'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깨어있는 시간 중 절반 이상을 긍정적인 감정으로 보냈으면 나는 그 날 하루를 행복하게 보낸 것일까? 아니면, 취침시간 포함 20시간 정도는 신나거나 우울하지 않았고 남은 4시간 중에 3시간 동안 즐거웠으면 나는 행복한 하루를 산 것일까? 이렇게 하루하루를 계산해 나가면 '행복한 인생'을 완성할 수 있을까?

#4
나는 네팔에 갔었다. 사실 그 일은 네팔이 아니라 한국, 미국, 태국, 베트남 어디에서도 일어날 수 있고 어디에서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일이었기에 네팔이라는 공간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 일은 네팔에서 일어났다. 동행한 교수님이 나에게 물었다.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지?"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두서없이 내뱉었다. 다 듣고나서 그 분은

"이야기 속에 행복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 걸 보니, 자네에게 중요한 것은 행복인가보군."

나는 그 날 그 순간을 잊지 못 한다.

나에게 행복이란 '모두에게 그 것을 추구 할 이유와 명분과 권리가 충분하고도 넘치는,
누구나 그 것을 위해 삶을 사는 것이 분명하고 당연한' 무결점의 만능 가치였다.

그 분의 말에서 '행복'이

'내 주관적인 판단에 비교적 덜떨어지고 덜 중요하며 가끔 무능해 보이는 단어들'과도
'특정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라는 측면에서는 다를 바가 없는 하나.

일 수도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삶은 안락함이나 쾌락과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불편이나 고난과 가까워 보였으며 그러면서도 '후자의 생활이 행복하다'는 말로 나같은 일반인에게 위화감을 주지도 않았기에, 나는 그의 말에서 모든 사람의 인생 최고 가치가 '행복'이 아닐 수 있음을 믿게 되었다. 내가 그러한 인식의 화신을 눈 앞에서 보고 있었으니까

#5
그 날 이후 변했다. 나에게는 '행복회로'가 긴밀히 작동되지 않는다. 내가 행복을 더 이상 추구할 가치가 없는 단어라고 규정지은 염세주의자가 되서가 아니다.

현재보다 어떤 의미로든 무엇이든 좋아져 있을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크지 않아서
지금도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는 내가,
물질적 환경의 변화에 기반해서 감정이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그런 의미에서는 오히려 불행회로가 예민하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보다 불충분한 상태가 되면 나는 상당한 박탈감을 느낄 듯 하니까.)

불행회로가 예민하여 더 안 좋은 상태보다는 좋은,
현재의 상태에서 오히려 행복감에 가까운 것을 느끼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행복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고
쉽게 정의내릴 수 없기에

나는 행복회로가 고장 난 사람이다.

#6
지금 글을 쓰면서 누군가 내 글을 읽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공감할 장면을 떠올리면 기쁘다. 일반적으로 글을 쓰는 행위가 나에게 순수하게 즐거움을 준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행복을 추구하든 추구하지 않든 글쓰는 행위는 나에게 필요하고 중요하다. 내가 가입인사에 적었던 '행복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은 허세 작렬을 위한 주장은 아니었다. 내가 실제로 가장 크게 고민하고 있는 내용이다. 나는 행복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산다.

르네 마그리트.PNG

르네 마그리트의 '저무는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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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든 팍님의 글은 저 역시도 참 많은 생각의 소재들을 건져올리게 해주기에 ㅎㅎ 주말하고 오늘 오전까진 업무 중이라..ㅠ
가든 팍님의 불행회로는 저에게 있어선 절망하고 많이 닮아 있습니다.
제가 살아내고 지금으로 오기까지 원동력이 된 건 아무리 생각해도 절망이라고 생각해요. 음 예민하다기 보단 뭐랄까 그냥, 자체가 희망으로 가고픈 절망? 이런 맥락이에요.

음.. 제가 오늘 쓴 글은 글을 쓸 때는 상당히 제 머릿 속이 명료했는데 여러 분의 댓글을 보다 보니 다시 약간 혼란스러워진..? 상황입니다.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아주 약간이겠지만.. 도움을 드렸다는 점이 기쁩니다. 우리는 언제나 생각을 하며 살아 있다고 느끼겠지요 (데카르트는 아니지만..) 좋은 밤 되세요. 티가든님 ^.^!

복잡하네요, 그 네팔에 같이 가셨던 교수님의 삶이 궁금해집니다. 그 분이 가치롭게 여기는 것도.

우리는 그 곳에 가서 선교 활동을 했습니다. 저는 크리스쳔이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대표를 맡았지요. 독특한 경험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제 삶의 가치관이 통째로 바뀌고 왔으니까요.. 언젠가 이 이야기를 글로 쓰게 될 날이 오겠지요? 그 분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일을 하며 사시는 분들입니다. 저는 한국 교회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진정한 크리스쳔들의 삶을 존경합니다. ^^

뭐가 그리 복잡해? 좀 단순하게 생각해~~ 라는 말을 자주 듣지 않나요? ㅎㅎ 왜냐면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잠들어 있는 부정적인 감각을 깨우기를 싫어해요. 그것이 타자의 입으로 발화되어 나와서 본인을 흔드는 걸 못 참아하거든요. 오늘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감정을 일으킬 듯 해요. 누가봐도 모자랄 것 없는데 힘들어 하고 스트레스 받고 한다고 도대체 니가 뭐가 부족하니 라고 말하는 사람은 타인의 고통을 본인의 잣대로 함부로 판단하기 때문이에요. 내 스스로 행복의 의미를 모르겠고 내가 행복한지 불행한지 모르겠다면 굳이 그걸 생각해내지 않는 것도 방법이죠뭐. 기독교의 핵심가치 중 하나가 감사예요. 이것도 감사 저것도 감사 범사에 감사... 크리스챤으로 그것을 뛰어넘는 것은 없다 믿으면서도 힘들어요. 꼭 입닥치도 가진거에 만족하고 살아 하는거 같아서... 저번 주일에 목사님이 옆사람라고 잠시 인사하자며 이렇게 말하라 하더라고요. “알고보면 저는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당신도 그러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랬더니 하나같이 웃더라구요. 비웃음이 아닌 당혹스런 웃음... 결론은... 너만 그런게 아니야...

누님..제 글을 이토록 진실되게 읽어주심..실화입니까? 저는 위에 행복을 모르겠다고 써 놓았지만, 누님의 댓글을 읽으며 행복합니다. 행복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단지 행복을 위해 산다는 사람들이 행복이라는 감정에 대한 고찰 한 번을 해보지 않는 모습이 실망스러울 뿐이지요. 늘 감사한 마음 뿐입니다 누님.. 헤헤 ^^

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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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님, 제 실명이 자꾸 확산되어 가는데 이거 어쩌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면..모두가 말을 안 할 뿐 전부 알고 있었던 건가요?? ㅋㅋㅋㅋㅋㅋㅋㅋ

미안ㅜㅜㅜ 그 댓글을 지울께 내가 지금이라도ㅜ

누님, 전 괜찮습니다 ㅋㅋㅋ 아이디부터 노골적으로 지은 것도 밝혀져도 상관 없어서 였습니다! 마음 쓰지 마셔요^^

처음 보자마자 이름을 알았지 나는 ㅋ 너무 투명하게 이름을 지은 당신 잘못이야. 그럼에도 떡하니 실명을 이야기한 내 잘못은 인정해요ㅜ 다시 한번 미안해요ㅜ 사랑하는 우리 조카 이름이랑 같아서 유난히 좋았나봐여. 열세살 난 우리 00이 ㅋ

  ·  7 years ago (edited)

행복의 기준은 결코 타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요즘은 유치원생도 알지 않을까요?
겉이 암만 그럴듯해 보여도 짖무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그런면에서 사람들은 정말 타고난 연기자인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팔로하고 갈게요

스팀잇에는 남의 눈치를 보기보다 스스로에게 떳떳한 삶을 찾는 이가 많은 듯 합니다. 남의 불행을 기쁨으로 삼는 이보다 남의 행복을 자신의 만족으로 삼는 이가 많아서 놀랍고 좋습니다. @sunghaw님도 그런 분 중 하나라고 예전에 생각했습니다. 글을 몇 번 읽은 적이 있지요. 종종 교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글을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남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  7 years ago (edited)

박정원님? ㅎㅎ
아~
제 글을 읽으셨군요
저는 몰랐네요

가든님처럼
소신 있는 분들이 많이시더라구요

하루 하루 살아서 무언가 다른 것을 체험할 수 있다는 자체가 축복이라는 생각으로 삽니다. 저역시 힘들고 괴롭고 무기력해질 때가 많지만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무한한 가능성에 기쁘게 살아갑니다. 까짓 행복하지 않으면 어때요. 언젠간 행복해 질 날도 있겠지요. 인생 120 가즈아~~

제 글을 읽고 소통해주셔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늘 감사합니다. 제 느낌엔 곧 @elecpole 님도 스팀잇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실 듯 하여, 제가 기다려지고 설레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