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지배해 온 패러다임인 가부장제에 폐해가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현재는 여러가지 사회적인 인식 변화와 행동 패턴의 변화가 꾸준하게 이루어져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여성계에서는 아직도 사회는 여전히 남성이 우위에 있으며 성적 평등을 위해서는 사회가 기회적 평등이 아닌 결과적 평등을 나타내는 결과를 보여줘야 한다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들을 보면서 하나의 해결 방법으로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미혼모로 이뤄진 사회를 시험해 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한 적이 있다. 이를테면 모계 사회라는 것.
이 모계 사회라는 것이 어떤 모습일까? 라는 질문에 답해보기 위해 여러가지 것들을 알아보게 되었고 먹이 사슬 최상위 지배자로 천적이 존재하지 않아 상대적으로 새끼의 생존에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하이에나나 코끼리, 곰등은 필요할 때만 수컷을 찾는 모계 사회를 이루고 있으며 또한 인간 중에서도 비슷한 모양새를 지녔다는 모수족에 대해 찾게 되었다.
모쒀족 또는 모수오족이라 불리기도 한다.
윈남성(云南省)과 쓰촨성(四川省)사이의 히말라야 산맥과 맞닿아 있는 루구호(泸沽湖) 일대 여인국(女児国)으로 알려진 모계 전통을 가진 모수족(摩梭族)이 살고 있다.
농업을 주 생활기반으로 하고 있어 대가족제가 유리한 환경인데 일반적인 가족 구성은 할머니, 모친, 형제자매, 자매의 자식들로 이루어져 있다. 특이한 점은 남자인 가족 구성원은 있으나 부친이 없다는 점과 가장은 가족이 선출한 여성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어머니나 할머니중 집안을 잘 꾸려나갈 인물이 선택되어 가문의 자산을 맡긴다.
자식인 어린 딸은 조상의 혼을 내려받는다는 의미의 성인식(9세~13세)을 치루면 결혼할 자격을 얻고 따로 떨어진 공간의 2층인 꽃층(花楼)에 혼자 사는 방을 받는다. 이를테면 자취는 자취인데 가족과 붙어 있는 모양새. 이 딸은 사회생활을 통해 상대 남성을 물색하고 교감이 통하면 자기 집까지 걸어오게 하여 몰래 이 방으로 불러들여 합방을 한다. 그래 몰래(?) 섹스한다. 몰래니까 새벽에는 들키지 않게(?) 여성의 방에서 나와야 한다.
현대적인 상식으로 생각하면 이것을 결혼이라 불러야 할지 의문스럽지만 이 상태를 걸어서하는 결혼, 주혼(走婚)이라 한다. 말하자면 성교 자체에 결혼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 때 남성은 한번의 행위로 끝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설명하기가 조금 어려운데 이 상태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면
창가를 수놓는 희미한 달빛을 벗삼아 여자는 주혼한 상대 남자를 기다린다. 남자는 올수도 있으나 안 올 수도 있다. 오지 않는다면 외로워진 여자는 다른 남자를 주혼 상대로 정하기도 하는데 만약 전애인이 다시 찾아왔을 때 다른 남자와 주혼관계에 있다는 표시를 보면 그냥 발길을 돌리고 포기해야 하며 현재 애인과 다투는 것은 용서 받을수 없는 행위가 된다. 그러나 거기서 여성이 마음을 바꿔 전애인과 다시 만나는 것 또한 가능해 보기에 따라서는 문란해 보일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수도 있다. 낳은 형제들마다 아버지가 다를 경우도 있다. 이건 뭐 안모씨도 아니고
그렇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서로의 합의와 개인의 행복이 중요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임신을 하고 출산하게 되면 여성의 가족들이 양육을 도와주게 되고 이때 아버지 역활을 하는 것이 여자측의 남자 형제들. 그러니까 집안의 남성은 남의 집안에 씨앗을 뿌리는 행위를 하고 자기 집안 자매들의 자식들 인성을 바로잡는 역할을 맡는다.
실질적으로 씨를 뿌린 애비의 역할에 대해서도 표현이 되어 있으나 누구의 자식인지 알수없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쉽게 인정하기 힘든 형태임에는 틀림없어 1900년대 중후반,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문화적 간섭이 일어났고 관광 수입을 노린 외지인이 유입되어 바깥 사회에 이해받지 못하고 기존 방식에 끼워맞추는 식으로 변화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 방식에 따르면 아버지는 양육권을 가지지도 책임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역할을 하고 싶으면 하던지 아님 말던지 라는 식이다.
이러한 주혼 제도는 아래와 같은 장점을 가지는데
조건을 배제한 순수한 애정으로 이뤄진다.
시어머니가 없다!
남성과 동거하는 형태가 아니라 서로 원하는 상태에서만 볼 수 있어 부부싸움이 발생하지 않는다.
아이를 양육하는 부담이 분산된다.
집안의 재산이 분가로 인해 분산되지 않고 유지된다.
그러나 재산을 관리하는 여장부인 할머니나 어머니를 중심으로 대가족 형태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의견 수렴이 힘들어지는 단점도 존재한다...랄까 너무 어째서 저리 쿨할 수 있는 건지 여러가지 태클을 걸고 싶기도 하다. 현재 모수족의 주혼 풍습은 일반 사회와 만나 많이 변화되었다. 젊은층은 교육과 생계, 편의성을 위해 외부로 진출했으며 그로인해 일반적인 결혼 생활 형태를 선택하기도 한다. 공산주의자들의 박해에도 자신들의 문화와 풍습을 지키고자 했던 이들에게도 현란하고 편리한 외부 생활이 주는 달콤한 신기루는 이겨내지 못했던 걸까.
나는 어쩌면 가장 합리적일수 있는 이 모계, 주혼제도가 지금의 한국에서 적용될 가능성을 생각해보았다.
결론은 불가능. 이 제도의 핵심은 욕심없는 삶이기 때문이다.
위의 젊은이들이 주혼 제도를 포기하는 것은 일반적인 사회를 알게 된 모수족 어머니대가 품은 교육에 대한 욕심으로 인해 여러가지 룰을 주입받은 결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소위 선진국이란 것은 후진국 자원에 대한 약탈이라는 조건을 만족시키며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사는 것이 행복하지 못하다 느낀다 해도 그 체제 자체에서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향유하고 있는 여러가지 이득에 대해 포기하기는 힘들 것이며 거기에 더해 더 가진 존재를 동경하여 또 다른 효율낮은 투쟁과 소비를 감정이란 연료를 태워가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부추긴다. 스스로의 욕망을 너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포장해서 말이다. 그렇게 어설프게 배운 사람이라 여러가지 공포와 걱정에 쩔어사는 나에게 그런 욕심없는 행복은 깨지기 쉬워 보였다.
인류란 그런 역사를 일기에 타인의 피와 땀으로 써갈겼고 그렇게 무섭고 이기적인 존재라는 면이 있었기 때문에 자연에서 약한 부류에 속하는 스펙을 가지고도 지구의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무서운 일들이 매일 벌어지고 있는 세상, 중국에서 욕심없이 먹기 위해 하루종일 일하고 밤에는 애인을 만나러 가거나 기다리는 모수족 사람들은 여성들이 지배하고 있는 자신들의 삶이 행복하다 말하고 내가 보기에도 행복해 보인다. 중요한 것은 역시 긴 역사 속에 그들은 그들의 이상한 풍습, 주혼을 지켜 적당한 부족함 속에서 인간의 선함을 증명하며 행복하게 살아 남았다는 것이 아닐까. 생존만큼 명쾌한 증명은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