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국가고시는 90%이상 가깝게 합격해야 해서 수능보다 긴장감이 몇배였다. 호텔을 잡아 투숙하며 단체로 준비했는데 사람들이 새벽 3-4시까지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나도 늦게까지 공부하고 고사실로 향했다. 스트레스를 받아서 우황청심환을 복용하였다. 우황청심환은 금박등 작용으로 마음을 빨리 안정시켜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우황, 사향, 대두황권등 들어간 청심환은 원래 뇌중풍, 구안와사, 인사불성, 반신불수등 급성기에 사용하여야 할 약이었다. 의학적으로 새데이션이라고 하는데 안정을 시켜버리니 잠이 올 수밖에 없고 부인과 시험은 워낙 잠이 와서 손을 이로 물어뜯어가면서 시험을 봤다. 한의사가 증상에 맞지 않는 약을 쓰니 참 아이러니 한 것이다. 2000년도 한의사 국시를 합격해서 나는 기쁨에 즐거워하였다. 국시 이후에 꿀같은 1달정도의 공백기가 있었다. 합격소식을 듣고 가장 좋았던 것은 내가 이제 두메산골에 살아도 굶어죽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때 잠이 안올정도로 좋았던 것은 내 순진한 생각이었고 1100번때 면허번호가 이제는 2만명이 넘어서며 의사 수는 10만명이니 이제 의료인에도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대학병원에 지원을 했는데 합격을 해서 2월 초부터 근무를 하게 되었다. 그 날은 진눈깨비가 많이 내리던 날이었는데 날씨가 매우 을씨년스럽고 좋지 않았는데 아마 1년 인턴생활의 운이 그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가자마자 청소를 하는데 쌍코피가 흘러나왔다. 필자는 코피가 별로 나지 않는데 그렇게 힘들지도 않았는데 왜 코피가 났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우선 알지 못하니 선배 한의사들의 교육시간이 있었다. 보통 한의대는 한문을 많이 하는데 한방병원은 특이하게 서양의학 시스템을 쫒아가기 때문에 서양의 의학용어인 메디컬 텀을 많이 사용한다. 필자가 인턴 생활을 할 때 간호사가 시저 시저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그게 ‘가위’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Seizure 경련발작을 말하는 것이었다. 또한 의학용어가 약자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그것도 전문 아니면 모른다. 이런 것은 알기 쉽게 바꿔야 할 필요가 있겠지만 예를 들어 응급상황이 났다는 것을 방송을 듣는 일반인이나 환자들은 당황하고 불안하겠지만 ‘코드 블루’ 이렇게 하면 오히려 의료진만 알수 있으니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필자는 아침에 5시- 6시에 일어나는 것이 가장 어려웠는데 왜냐하면 일과가 끝난 저녁과 새볔 2-3시까지 공부를 시키기 때문이다. 시험은 그냥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면 재시도 보고 계속적인 갈굼이 있었다. 처음에는 선후배 관계라 다 아는 사람들끼리 왜 그런가 싶었는데 학생때의 물을 빼버리는 악역을 해야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럼 수면시간이 거의 박탈당해 몽유병상태가 된다. 어떤 느낌이냐면 구름속을 걷는 느낌이라고 할까? 아니면 좀비가 거리를 활보하는 느낌에 가깝다.
필자가 인턴때 가장 부러운 사람은 환자나 환자 보호자였다. 그 사람들은 잠은 충분히 자니까 편안할 것인데 말이다. 또 퇴근시간이 일정한 간호사도 부러웠다. 계속 잠이 부족하니 설상가상으로 좋지 않던 머리도 계속 나빠져서 암기력은 더 떨어지고 지속적으로 생활은 더욱 힘들어졌다. 그 때 병원에서는 삐삐란 것을 사용했는데 인턴수는 적고 병원은 매우 넓어서 수시로 울려댔다. 가장 이해가 안되는 것은 처음에 인턴 수습기간에는 엘리베이터를 못 타게 했는데 사실 바쁘면 타고 가야 되는데 걸어서 가는 것은 시간 낭비였는데도 이용을 못하게 했다. 지상 1층에서 6층까지 올라가려면 매우 힘이 빠지는 생활이었다. 특히 응급실의 1층에 있어서 왔다갔다 하면 다리가 풀릴 듯하고, 계속 서있기 때문에 다리가 퉁퉁 붓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점심시간이 왜 좋은가 하면 점심식사는 앉아서 하니 부은 다리가 좀 쉬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하도 힘들어서 엄마에게 한약을 지어 먹게 해서 먹었는데 한약을 먹으니 맑은 기운이 올라가고 세상이 한번 뒤집히는 경험을 했다. 물론 그 체력도 결국 금방 바닥났는데 말이다. 나는 잠이 부족하면 매우 힘들어 했다. 시험기간에도 밤새서 공부한 적이 없었는데 수련의 생활은 잠과의 싸움이다. 아브라함 매슬로우(Abraham Maslow)는 인간 욕구의 5단계를 말했다.
1단계는 생리적 욕구로 의식주의 욕구, 먹고, 자는 등 최하위 단계의 욕구이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로서, 인간이나 동물을 막론하고 생물체의 본성에 근원을 둔 욕구이다. 예를 들어 호흡, 순환, 체온유지, 배설 , 수면, 식욕, 성욕 등이다. 2단계는 안전욕구로 신체적, 감정적 안전을 추구하는 욕구, 추위, 질병, 위험 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욕구이다. 3단계는 사회적 욕구로 소속감과 애정욕구 , 어떤 단체에 소속되어 상호작용하며 애정을 주고받는 욕구이다. 4단계는 존경욕구로 내적 성취감(자기만족),외적 성취감(타인 인정과 존경)의 욕구이다. 5단계는 자아실현욕구로 지속적인 자기 계발을 통한 자기발전, 자아완성의 욕구, 자신의 재능과 잠재력을 발휘해 자기가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성취하려는 최고수준의 욕구이다. 이것을 보면 인턴은 수면과 식욕이 해결이 안되기 때문에 결국 저등의 동물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이다. 필자가 근무할 당시 물론 인플레이션이 있지만 월급이 100만원도 안되었고, 첫달 월급은 주지도 않았고, 당시 햄버거 패스트푸드점 최저임금도 못되었다.
그런데 이런 병원의 수련의 착취가 아무리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한방, 양방을 모두 아울러 만연하고 있었다. 한방병원의 인턴은 필자가 기타 서양의학병원 실습때 비교하여볼 때 거의 최악의 수준이었는데 한방병원의 특징은 피라미드처럼 인턴이 밑바닥에서 가장 고생하며 그 다음 전공의인 레지던트 1년차가 이틀에 한번씩 당직서가면서 고생하며 2, 3년차는 거의 일을 안한다는 것이다. 물론 필자는 서양대학병원 응급실 실습당시 레지던트 1년차와 인턴만 동분서주하면서 일하는 모습을 봤지만 한의대 병원은 더 심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병원은 더욱 심한 것은 레지던트가 논문을 쓰기 위해서 3일마다 관장을 했다는 점이다. 보통 뇌중풍 환자는 변비가 동반되기 쉬운데 3일에 한번이면 관장할 사람이 매우 금방금방 돌아온다. 그러면 하루에도 2-3번 관장을 하여 대변을 보게 되며 그 이후에 바로 점심시간이 되어 아주 고역이었다. 물론 익숙해졌는데 또 재활의학과에서 물로 하는 장세척이 있어서 그것도 환자 복부 마사지를 하면서 30분정도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병원에서는 인턴이 힘들기 때문에 서로 도와가면서 일을 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환자 30명 있는과와 10명 있는과 인턴끼리 짝지어서 20:20으로 서로 나누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 상대방 인턴이 한방 내과를 돌고 있었는데 원인모를 설사병으로 드러눕게 되었다. 그 무렵 환자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한방 내과가 40명정도 되었고 본인이 맡은 과가 10명쯤있게 되니 결국은 50명을 부항, 뜸, 침을 뽑는 발침, 차트쓰기, 처방전 입력, 보고등을 모두 하게 되었다. 게다가 윗 레지던트는 환자파악을 못한다고 하는데 사실 내 전공과도 아니고 타과를 해주는 것인데 레지던트를 폭행해버리고 병원 관둘까도 생각을 했었다. 군대도 그렇겠지만 상황이 어렵고 힘들수록 인간성이 밑바닥부터 드러나는 것이다. 인턴 시절에도 좋은 때가 있었는데 지리산으로 단풍구경을 가게 된 것이다. 원래 침구과 전체가 회식을 가는 것이어서 내가 돌때 나를 데리고가야 했는데 거의 안데려갈 상황이 되었다가 가게 되었다. 지리산 노고단을 올라갔을 때 기쁨과 컵라면 먹고 해방감을 느낄 때 그리고 돌아와 술도 먹고 회도 먹고 할 때 정말 살아 있는 느낌이 났다.
불교에서 행자는 불교에서 출가하여 아직 계를 받지 못한 예비 승려를 일컫는데 조계종에서는 6개월, 천태종에서는 3년간의 기간을 거쳐 정식 계를 받는다. 필자가 알기로 행자는 절 밖의 일주문을 벗어나면 파계한 것이 되어 승려가 되지 못한다. 한방병원도 원래 백일 킵이라고 불리는 100일동안 병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무시무시한 전통이 있다. 그러면 병원밖을 나가지 못하는 감옥생활을 하는 것이다. 필자 에피소드는 어떤 환자 보호자분이 오셔서 뵙게 되었다. 그 분은 드문드문 오시는데 올때마다 필자가 있으니 매우 놀라서 어떻게 계속 퇴근도 안하고 있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정말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매우 지치게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특히 엠뷸란스 소리가 들리면 도망이라고 가고 싶다. 왜냐하면 중간에 환자가 오면 일이 더욱 가중되며 환자를 입원시키는 차트 쓰고 여러 검사에 약짓기, 침 빼기등 조치를 하면 거의 3시간이 날라가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거의 점심식사를 하지 못하게 된다. 특히 새벽 3시에 응급환자가 오면 그 이후에 수면은 완전히 박탈되어버리고 결국 48시간정도를 잠을 못자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필자는 원래 사상체질에 관심이 있고 잘하며 병원장님도 그 사실을 알고 있고 해서 사상체질과에 뽑히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사상체질과는 마이너과이기 때문에 2년마다 한번씩 뽑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1년을 더 인턴 노릇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결국은 다른 병원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희망을 가지고 인천지역에 정착하였는데 그 병원은 다른 문제가 있었다. 대학병원이 아닌 일반 병원이기 때문에 공부에 대해 체계가 없었다. 즉 회진이나 컨퍼런스등을 통해 배울것이 없었다. 그 다음 문제는 병원이 빚이 많아서 많은 환자에도 불구하고 월급이 3개월 이상 밀려서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때까지 신용카드도 못만들고 살았다. 다행인 것은 병원수련생활을 하면 밖에다 방을 얻어 놓고 살지 않는한 돈이 거의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이러니 하게 그 병원은 직원 사기가 너무 저하되어서 회식을 자주하고 심지어는 금가루가 나오는 횟집에서 회식한적도 있었다.
1년차때는 영어 공부를 위해 외국 영화를 많이 본 듯하다. 그런데 타지에 살면서 외롭고 희망이 없는 우울한 인생을 보낸 듯하다. 그런데 문제가 터졌는데 결국 그 병원은 전문의 의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드러나 수련병원이 취소되었고 결국은 또 다시 병원을 옮겨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어찌 하다보니 사상의학과는 포기하고 결국 한방 안 이비인후 피부과를 선택했다. 이 과는 3과가 함께 있었는데 원래 명칭은 오관과라고도 했다. 그런데 오관과를 아는 환자가 없어서 결국은 서양의학처럼 세 과를 동시에 표기하는 무척 이름이 기차처럼 긴 과가 된 것이다. 그 병원은 인천에 있었는데 그래도 과장님이 교수진이라 배울것이 있었고 1년동안 착실히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서울대 보건대학원 보건정책관리학과도 다니게 되었는데 한약분쟁과 여러 의사파업사태등 한의사도 일반 사회에 관심을 가져야한다는 생각이었다. 또 군대를 연기하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보건대학원은 일반대학원이기 때문에 한의대 대학원과 달리 군대 연기가 안 된 것이었다. 결국 레지던트 수련 1년차때 또 결국 병원을 그만두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물론 잘못 안 것은 필자는 얄궂은 운명을 수없이 수없이 자책했다. 이 상황에서 이제 안 것은 필자의 마음자세였다. 필자는 병원 생활이 계속 힘들어서 계속 떠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물론 자의로 내 발로 걸어 나간적은 없었지만 마음속에서는 그만두어야지 하는 생각이 3년내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레지던트도 계속 같은 병원에서 수련을 못 받고, 옮긴 병원은 수련이 취소되고, 결국 다닐만했던 병원도 1년만 하고 그만두게 된 것이다. 물론 군대로 중단한 과정은 인정을 해줬지만 그 때 과정은 레지던트를 중단하면 다시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규정이 있었다. 결국 2003년 3월 14일 논산에 있는 육군 훈련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입소한뒤 가장 힘든 것은 너무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있어 사생활이 없고 이불 2명이 잘 장소에서 3명이 자게 된 것이다. 그리고 화장실도 같이 가야 하며 이것도 제약이 있으니 매우 불편하였다. 인턴때도 대변을 볼려면 삐삐 소리 때문에 매우 조바심쳤던 생각이 난다. 일반 군인은 신식 내무반을 썼는데 그때 막사는 1970년대 지어졌다고 하며 쥐가 자주 출몰하는 막사였다.
그냥 하루하루 지나가길 바라며 매우 우울해 하며 지내게 되었다. 왜 군대에서 초코파이를 먹는지, 관심도 없는 종교활동을 하는지, 왜 여자에게 환호하게 되는지 알게 되었다. 특히 커피하고 행군할 때 지날 때 논산 밭딸기가 먹고 싶었다. 다행히 한의사협회 회장이 갔다온뒤로는 피자하고 맛있는 것을 사주고 갔다. 아무튼 수료를 하려는 무렵 기이한 질병에 걸렸다. 이게 극심한 피로, 미열, 마른 기침, 숨참, 약간의 오한등이 있었는데 정말 특히하게 모든 훈련병이 시달렸고 공무원 직무교육을 받는데 계속 기침소리의 합창이 지속되었다. 일반인은 논산 바이러스라고 하는데 정말 진단이나 치료도 못하는 특이한 평생 처음 걸려볼 질병이었다. 몸이 안좋으니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어서 군복무가 결정되는 시험에서 별로 잘 본 상황이 아니라 결국 전남쪽으로 가게 되었는데 또 거기에서는 성적이 좋아서 결국은 도를 이동할 수 있는 섬을 선택하였다. 그런데 필자가 가게 된 섬은 배를 타고 1시간 20분을 들어가야 하는데 사실 거리는 별로 멀지 않은데 여러 섬을 들르게 되면 시간이 걸리게 되며 또 배는 오후 3시정도에 끊기니 여기는 수도권에서 오가기 매우 불편하였다. 그리고 급수 시설이 발달이 안되어서 수도가 안나오는 일이 비일비재하여 근처 민가에 가서 물을 받아와서 해결해야 했다. 특히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세수를 해서 상쾌한 기분을 느껴야 하는데 물이 안나오니 온갖 짜증이 밀려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섬이란 농촌처럼 저녁시간에는 불이 꺼져 위락시설이 없고 직원들과 회식을 하려면 노래방이 없어서 비싼 돈을 내고 임신 5개월정도 보이는 배가 나온 주인이 있는 단란주점에 가야 했다. 물론 가장 좋은 점은 자기 일과시간을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 쓸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공중보건의 대다수는 게임을 하면서 일과를 지낸다. 보통 스타크래프트가 대유행이었는데 필자는 오락을 빠지면 조절이 안되어 절대 오락을 하지 않았다. 담배도 끊을 의지가 없을 듯해 피지 않고 술은 컨트롤이 되기 때문에 마신다.
그래서 하다하다 할 게 없어서 인터넷에 있는 모든 신문 기사 내용을 본적도 있고 동의보감을 영어 번역을 한 적도 있다. 또 그 때 다음에 있는 한의사 카페가 생겨나서 개원의의 생각을 알아보려고 그 카페에 있는 모든 글을 읽은 적도 있다. 또 다음에 카페도 운영해가면서 살았다. 그리고도 시간이 나니 맹자, 논어등 동영상으로 유료로 한문 공부하는 사이트에서 공부도 하고 채팅도 하고 그랬다. 공보의 2년차가 되니 인천 강화도로 오게 되었는데 강화는 수도권에 가깝고 교통이 편리하니 매우 좋았다. 또 강화는 다리로 연결되어 배에 지장이 없이 생활하니 좋고 또 강화 공중보건의는 1달에 한번씩 회식등 모임을 하고 또 야유회나 이런 활동이 매우 활발했다. 운동을 정말 못하는 내가 축구화까지 사가며 공중보건의 체육대회에 출전한 적도 있다. 인천에는 군이 옹진과 강화가 있고 결국 강화 공중보건의가 대표로 나가게 된 것이다. 물론 예선 탈락을 하였는데 좋은 경험이었다. 또 강화군은 첩약사업과 알러지 사업등 각종 사업을 하고 방문진료등도 했다. 그런데 공중보건의사는 농촌은 교통이 불편해 환자가 적기 때문에 약간 지루한 측면이 있고 앞으로 진로를 어떻게 할지 고민을 해봐야 하는 시기였다.
그래서 의학입문, 동의보감, 경악전서등 각종 한의학 서적을 번역하면서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아쉬운점은 세 책 모두 내용이 방대한데다 끝까지 번역을 못하고 도중에 하차한 것이 마음이 꺼려진다. 그리고 공보의가 끝나고 다시 병원에서 레지던트 2년차로 수련을 다시하게 되었다. 내가 나갈 때 인턴으로 들어온 한의사들이 나보다 윗년차가 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연차가 올라간 상태라 병원 생활은 힘들지 않았다. 또 과장님도 바뀌고 여러 병원 시스템이 바뀌어 적응이 어려웠지만 시간이 잘 흘러갔다. 2년차때 에피소드는 그 병원은 독일 의대생을 교육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런데 독일 의대생이 오면 한의학 개론부터 영어로 설명해야 하니 머리에 쥐가 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잘해준다는 소문이 났는지 계속 한의학을 배우기 위해서 병원에 방문하는 독일 의대생이 매우 많았다. 거의 격주로 온적도 있었는데 결국은 누군가가 총대를 매고 이 사람들을 트레이닝 시켜야 했고 결국은 내가 영어공부도 할겸해서 맡게 되었다. 그런데 쉽지 않은 것은 영어로 하루종일 한다는 것이 매우 두통을 유발하는 행위였다. 또한 일상대화도 아니고 한의학을 설명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그래도 의대생이고 머리가 좋은지라 사암침처럼 어려운 것을 설명해도 금방 잘 알아듣는 것이었다. 질문도 어려운 것을 해서 항상 골머리를 썩었다.
특이한 경우는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독일로 입양한 한국인이 온 적도 있었다. 독일로 가면 잘 해준다고 했는데 사실 우리 병원 수련의를 독일로 가서 트레이닝 시켜주는 것은 없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독일어를 거의 못한다는 것도 문제고 생각보다 그들이 영어를 아주 뛰어나게 하는 것도 아니었다. 또 같은 재단 소속의 서양의학병원의 응급실 파견이 7일정도 이루어졌는데 거기서 터키계 독일의대생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서양의학은 그들도 매우 잘알고 해서 별로 재미는 없어 했다. 그래서 응급실 컨퍼런스도 하고 실습도 같이 했는데 결국은 그들이 진맥을 해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첫날은 밥은 먹었는지 물으니 금방 밥을 먹고 왔다고
해서 밥 먹으면 맥이 변하니 못해준다고 했다. 둘째 날은 커피를 마셔서 안된다고 해서 겨우 3번만에 진맥을 해주었다. 또 그들이 알려준 것이 고마웠는지 커피 전문점에서 커피도 사주고 점심식사도 병원에서 같이 하게 되었다. 서양의학적인 응급실의 한계를 보면 응급실에서는 명확한 진단을 해야 하기 때문에 예를 들어 당장 아파해도 처치를 하지 않고 방어진료를 위해서 피검사등등을 한다. 결국 환자는 고통속에서 계속 참아야 하며 비싼 진료비와 시간을 오히려 지불해야 한다는 점이다. 일반환자는 침으로 통증을 덜어주면 많이 도움이 될 것인데 말이다. 응급실 구명은 ER이란 미드처럼 드라마틱하지는 않았다. 아주 심한 환자보다 오히려 일반 외래가 안할 때 온 경우가 많고 뇌중풍등 심한 환자는 나도 심심찮게 몇백명을 봤으니 말이다. 어느덧 3년차가 되고 진로를 결정해야 할 시기가 왔고, 한방 피부과는 마이너과이기 때문에 일자리가 없고 결국은 개원을 선택해야 하였다. 개원을 결심한 이후에는 각종 세미나를 쫒아다니느라 3년차 생활이 바쁘게 흘렀다. 결국 11월경에는 전문의 국가고시 준비를 위해서 병원을 나와 도서관을 다니게 되었는데 외부 간섭 없이 월급을 받으면서 공부만 하니 예전에 당직비도 못받고 만 48시간 72시간을 당직섰던 일들이 금방 잊혀지게 되었다.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것이 가까이에서 보면 그렇지 않은 게 많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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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플린의 말에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 보면 비극이란 말이 있죠 빅씽 님 말에 절대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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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한의학이 참 일상에 다향하게 활용될 수 있는
정말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학문이라 생각해요.
아주 부러운 전공을 선택하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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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감사드립니다. 사실 본인 몸과 가족 건강정도 책임지지요. 뜻밖에 지혜같은 것을 배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스타주노님은 어떤 학문을 전공했는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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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클래식 음악을 전공했어요.
그다지 실생활관 상관이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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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네요 저도 클래식 음악을 자주 듣는데 원래 생업과 관련이 없는 것이 삶을 풍요롭게 해주죠 사실 저도 진료과목은 학교에서 배운게 아닙니다 해피 추석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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