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바람의 나날 15

in kr •  6 years ago 

"똑똑…….“

누군가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언뜻 정신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잠깐 멍한 상태에 빠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장신을 차려보니, 세 명의 사내가 내가 타고 있는 차를 둘러싸고 있었다. 검은 정장을 차려 입은 사내들이 차 앞쪽과 양옆에서 차안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고, 운전석 쪽에 서 있는 사내가 총을 들이대고 있었다. 그 사내는 바로 유종석 부장이었다.

나는 얼른 무릎 위에 놓여 있던 권총을 움켜잡았다. 권총을 집어 든 순간, 권총에 총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니는 총을 들어 앞쪽에 서 있는 유종석 부장을 겨누었다. 방아쇠를 힘껏 당겼지만 역시 총알은 나가지 않았다.

앞 유리를 통해 유 부장의 냉랭한 얼굴이 크게 투영되어 보였다. 유 부장이 뭐라고 소리치며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총구에서 뭔가 시커먼 것이 쏜살같이 튀어나와 유리창을 뚫고 내게로 달려들었다. 눈을 내려 가슴을 쳐다보니, 가슴 왼편에서 피가 벌컥벌컥 솟구치고 있었다. 고개를 드는데 다시 한 번 총소리가 짧게 울렸다.

나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잠깐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룸미러에 비친 나의 얼굴을 보았다. 눈 주위만 배꼼 뚫린 살색 스타킹을 얼굴에 뒤집어쓰고 있었기 때문에 꼭 거울 속의 미라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위에 챙이 긴 모자를 눌러 쓴 내 모습이 어쩐지 낯설어 룸미러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때 뒤쪽에서 차의 전조등이 룸미러에 강하게 반사되는 것이 보였다. 나는 고개를 차 밑으로 급히 처박으며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슬쩍 보았다. 어둠 속에서 야광으로 된 시계의 바늘만 또렷하게 빛났다. 새벽 한 시였다.

나는 최대한으로 몸을 낮춘 상태로 옆문을 살며시 열고 밖으로 기어 나왔다. 차에서 완전히 내려 차 옆에 몸을 바짝 엎드렸을 때, 조금 전에 지나친 차가 유종석 부장의 집 앞에 멈추어 서는 것이 보였다. 드디어 유종석이 돌아왔음이 분명했다. 나는 몸을 낮추고 벽에 바짝 붙어 기다시피 걸어 그쪽으로 살금살금 움직였다.

거의 사정거리에 들어서자, 유종석 부장이 운전기사가 열어 준 뒷문을 통해 차에서 내려서는 것이 보였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벌떡 몸을 일으켜 유 부장 앞으로 나서며 총구를 들이댔다. 차에서 내리던 유 부장이 흠칫 놀라며 나를 쳐다보았다.

"움직이지 마! 두 사람 다 손들어! 어서.”

유 부장이 놀라서 두 손을 위로 번쩍 치켜들었다. 유 부장의 기사도 차의 뒷문을 닫으려다 깜짝 놀라 엉거주춤 두 손을 올리고 멈춰 서 버렸다. 나는 총을 유 부장에게 겨눈 채 총을 들지 않은 다른 손으로 유 부장을 지목하며 낮게 소리쳤다.

"당신! 이쪽으로 와서 저 차에 타. 어서 움직여! 골통을 날려 보내기 전에…….“

이렇게 하는 것이 과연 잘하는 짓인지 나로서도 알 수 없었다. 장 부장은 유 부장을 깨끗이 죽여 없애길 원했다. 장 부장이 내게 총을 준 것은 유 부장을 납치하라는 뜻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능한 한 살인은 면하고 싶었다.

우선 유 부장을 납치해서 장현태와 나만 알고 있는 성북동 안가에 감금해 둘 생각이었다. 유 부장이 감금되어 있는 동안, 장 부장은 유 부장의 정보부를 접수할 것이다. 유 부장이 없는 정보부는 호랑이 없는 굴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되었다.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유종석 부장을 철저히 가두어 둔다. 그렇게 완벽하게 일을 추진하려면 유 부장을 한동안 감금해 둘 필요가 있었다. 모든 일이 완벽하게 마무리 된 뒤에는 장 부장에게 유 부장이 살아 있음을 실토하고 장 부장에게 용서를 빈다. 그리고 유 부장의 뒤처리도 장 부장에게 맡긴다. 죽이든 살리든 그건 장 부장의 소관이다. 만약 풀어준다고 해도 이미 실권을 잃은 유 부장은 저절로 도태된다.

그것이 나의 계략이라면 계략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중 생각에 불과했다. 지금은 유종석을 안가로 끌고 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사실 유종석을 죽이는 것이 훨씬 효과가 크겠지만, 유 부장의 실종 또한 그에 못지않은 여파를 불러일으키리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마이클 로빈의 경우와 같은 무책임한 살인만은 면해 보자는 고육지책이었다. 하긴 살인 자체가 무책임한 것이지만 말이다.

또 그 이전부터 나를 괴롭히고 있는 생각은 차라리 모든 것을 세상에 알리고, ‘양심선언’이라도 하여 이런 일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찌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손을 놓을 수 없을 지경까지 이 일에 깊숙이 개입되었고, 세상 사람들이 나를 온전히 놓아두겠는가, 하는 두려움 때문에 결국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장 부장이 어쩌면 제 무덤을 파게 될지도 모르는 이 일을 결정한 것처럼.

유종석은 머뭇거리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때 나는 보았다. 두 손을 쳐들고 있던 자가용 기사가 뭐라고 소리를 지르며 들고 있던 손을 내리면서 양복 안주머니로 빠르게 한 손을 집어넣는 것을. 그리고 앞으로 나서던 유종석이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리는 것을 동시에 보았다.

나는 위기를 직감하고 황급히 몸을 날려 바닥에 엎드리는 유종석의 등을 발로 밟고 높이 도약하며 운전기사의 가슴을 향해 빠르게 돌진했다. 이마로 송판을 머리로 깰 때의 그 느낌대로 짧은 비명과 함께 기사는 총을 꺼내지도 못하고 떠밀려 담벼락에 강하게 부딪쳤다. 나는 쓰러지는 운전기사의 머리카락을 손아귀에 단단히 감아쥐고 놈의 머리를 벽에 거세게 내리찍었다. 놈은 꺼내려던 총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며 앞으로 축 늘어졌다. 나는 다시 한 번 늘어진 운전기사의 머리를 벽에 세게 찍었다.

늘어진 운전기사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몸을 돌려보니, 유종석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그새 어디로 몸을 숨긴 모양이었다. 여우처럼 재빠른 놈이었다. 바깥의 소란을 눈치 챈 것인지, 유종석의 집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몰려나오는 소리가 들려, 나는 차가 서 있는 곳으로 황급히 뒤돌아 뛰었다.

급하게 차 문을 열다가 들고 있던 권총이 손에서 굴러 떨어졌다. 떨어진 권총은 어디로 굴러갔는지 얼른 눈에 띄지 않았다. 그 순간 대문 열리는 소리가 철컥, 하고 들렸다. 나는 길에 떨어진 권총을 찾아볼 사이도 없이 서둘러 차에 올라 황급히 시동을 걸었다.

차를 급하게 후진시켜 나는 허겁지겁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골목길을 완전히 빠져 나온 나는 유 부장의 집에서 두 블록쯤 떨어진 곳에 차를 반듯하게 세우고 키를 그대로 꽂아놓고 차 문을 닫고 내렸다. 차적 조회가 불가능한 차라는 이야기를 장 부장으로부터 들었었다. 그리고 벗은 스타킹과 모자와 장갑을 둘둘 싸서 근처 쓰레기 더미에 쑤셔 박았다. 옷의 먼지를 깨끗이 털고 나서 서둘러 그곳을 빠져 나왔다.

골목길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가 장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먹통이었다. 일이 끝날 때까지 장 부장은 귀가하지 않고 사무실을 지키겠다고 말했었는데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세 번을 더 걸어본 뒤, 나는 전화 걸기를 포기했다. 장 부장의 사무실로 가려다가 갑자기 피곤함을 느껴 마침 지나가는 빈 택시를 타고 그냥 아파트로 돌아오고 말았다.

나는 자혜가 잠들어 있는 옆에 살며시 몸을 눕혔다. 자혜가 잠결에 가만히 몸을 안겨왔다. 나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자혜의 등으로 팔을 둘렀다. 자혜가 내 품속을 파고들더니 다시 잠에 빠져버렸다. 신경은 무척 날카로웠지만, 몸 또한 무거워 스르르 잠이 쏟아졌다. 벽시계가 새벽 세 시를 울리는 소리가 잠결에 어렴풋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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