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파랑새 10

in kr •  6 years ago 

미림과 연인도 아니면서 마치 연인처럼 싸우고 나니, 소심한 나로서는 선뜻 파랑새모임 본부에 나갈 수가 없었다. 아니, 나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도저히 맨 정신으로 미림을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너, 안 나오고 뭐해? 숙녀를 10분 이상 기다리게 하는 건 매너가 아니지? 빨랑 튀어 와!”

왜 그랬을까?

한참을 끊어진 수화기를 들고 멍하니 앉아 있는데,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분노와 안도감과 회한이 한데 뒤엉켜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고, 왠지 내가 너무 처량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눈물은 잔뜩 잠긴 목울대까지 자극해 원인모를 서러움을 토해내며 어깨를 들썩이며 꺼이꺼이 울었다. 비록 내가 병치레가 잦고 허약한 체질을 타고났다지만, 한 번도 이처럼 서럽게 울어 본 적은 없었다.

나 스스로 내면적으로는 강인해지고 싶었고, 그렇게 나 자신의 여린 감정을 단단히 묶어 두었던 것이다.

“니가 뭔데? 왜? 니가 뭔데... 나쁜 년...”

나는 갈라터진 목소리로 똑같은 소리를 계속 내뱉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뭐라도 손에 집어 들고 내던져버리고 싶었지만, 거실 마루에는 때가 새까맣게 탄 전화기 한 대만 달랑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가 담근 국화주 항아리였다. 그 국화주 병이 탁자 아래에 놓여 있었다.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것으로 묵계처럼 여겨져 온 국화주 병의 뚜껑을 열고 그 옆에 놓인 국자로 떠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런데 목을 넘어간 술은 다시 눈물이 되어 볼을 타고 마룻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나쁜 년!”

눈앞에 너무도 또렷하게 떠오르는 미림의 웃는 얼굴이 얄미워 손바닥으로 때려주고 싶었다. 나는 그녀를 때리는 대신 온갖 욕과 저주를 계속해서 퍼부었고, 저주를 퍼부은 만큼 술이 내 목으로 넘어갔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단 한 번 울어본 적이 없었는데, 하찮은 계집애 하나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 싫었고 바보 같아서 억울했다.

그냥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내가 너무 부끄러워서 밝은 대낮에는 밖으로 나가지도 못할 것 같았고, 이렇게 울고 있는 나라는 존재 자체도 물렁한 허깨비처럼 느껴졌다. 이런 몰골과 낯짝으로 이제 세상을 제대로 살기는 틀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삐죽거리는 입술을 비집고 술을 계속 국자로 떠서 입속으로 들이부었다.

코끝을 찌르는 국화 향에 때문에 감정이 지나치게 고조되었고, 그에 이어서 나타나는 이명과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빈혈로 나는 내 영혼이 내 몸에서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눈을 살며시 감자, 시커먼 어둠속으로 하얀 내 영혼이 연기처럼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방에 들어가서 자거라.”

누군가 발로 내 옆구리를 툭툭 차는 느낌에 눈을 슬쩍 떠보니, 웬 일로 술을 전혀 드시지 않은 말짱한 얼굴의 아버지가 나를 내려다보고 계셨다.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는데, 내가 꺼내서 마신 국화주는 거의 바닥을 드러낸 채 얌전하게 뚜껑이 닫혀 한 구석에 밀쳐져 있었다.

“감기 든다. 방에 들어가서 자. 몸도 약한 녀석이 어째서 마룻바닥에서 잠들고 그래? 안 좋은 일이 있냐? 그럴 땐 술 한 잔 하는 것도 좋은 거야.”

아버지는 그렇게 중얼거리시며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셨다.

나는 벽에 걸린 거울을 쳐다보았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과 퉁퉁 부어오른 눈두덩이, 입가에는 자면서 흘린 허연 침 자국까지 온갖 추악함을 내 몰골에 다 남기고 있었다. 손등으로 입을 쓱 훔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그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저녁 5시를 가리키고 있는 벽시계였다. 거의 3시간가량을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전화를 받을까 말까 망설이는 순간에 안방에서 아버지가 먼저 수화기를 드셨다.

나는 비틀거리면 자리에서 일어나 마루를 맨발로 내려서서 신발을 신고 내 방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경민아! 전화 왔다.”

아버지의 칼칼한 음성이 나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나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되돌아서서 신발을 벗지 않고 마루에 엉덩이를 걸치고 겨우 손을 뻗어 수화기를 귀로 가져왔다.

“여보세요?”

“나야 미림이. 너, 정말 그럴래? 너 때문에 내가 정말 힘들다. 너무 힘들어. 니네 동네 입구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야. 나올 때까지 기다릴 테니 잠시만 나와서 제발 네 얼굴 한 번만 보여주라.”

예상했던 대로 미림의 전화였는데, 미림의 목소리에 이상하게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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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꺼를 못본거 같아요
읽고 다시와서 다시 읽어야겠어요
잘읽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