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용히 가게 셔터를 올리고 들어와 사내를 탁자에 앉혔다. 우선 웃옷을 벗기고 상처를 보니, 그리 심한 편은 아니었다. 카운트 서랍에 있는 연고를 짜서 상처에 발라주고 붕대로 싸매 주었다. 대충 치료가 끝나자, 사내는 웃옷을 입었다.
나는 냉장고의 문을 열고 병맥주를 몇 개 꺼내왔다. 사내는 갈증이 심했던지 맥주를 병째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반 병 가량을 한 번에 들이킨 사내는 입가에 묻은 거품을 손등으로 쓱 닦아내며 물었다.
"좀 전에 내가 듣기로는 박윤도가 자네 형이라는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박윤도가 내 친형입니다."
"그런데 왜 날 구해 주었지?"
"당신이 먼저 달려들지 않았다면 내가 당신처럼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왜지?"
"어쩌면 당신과 같은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사내는 반말로 지껄였고, 나는 높여서 대꾸했다.
사내는 아직도 의아하다는 듯이 큰 눈망울을 두리번거리며 남은 맥주를 마저 마셔버렸다. 입가로 흘러내린 맥주가 시커먼 목을 타고 옷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사내는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바닥이 보일 때까지 맥주를 들이켰다.
"나와 같은 이유라고? 내가 누군 줄 알고나 하는 소리야?"
사내는 히죽 웃으며, 내게 '잔인'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주름 잡힌 미소를 얼핏 내비쳤다. 나는 사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혹시 살인을 해 본 적이 있나? 한 번이라도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있냐고?"
사내는 내게서 시선을 거두며 뚱딴지같은 물음을 던져왔고,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사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살인이라는 생각도 없이 살인을 한 후에 한동안 충격을 받았는데, 점점 죄의식도 없이 살인을 하게 되더군. 마치 숙달된 망나니가 죄수들의 목을 내려칠 때처럼."
나는 사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가 진실인지, 또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선뜻 짐작이 가지 않았다.
"시골에서 처음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도장에 들어가 권투를 시작했지. 선천적으로 타고난 체력에다가 펀치력도 있어 데뷔 일 년 만에 한국 챔피언을 따냈지. 그야말로 승승장구였어. 날로 기량은 향상되고, 전적은 쌓여갔지. 동양타이틀 도전을 앞두고 전초전 형식의 라이벌전이 있었지. 상대는 한물갔지만, 그래도 백전노장의 전 동양챔피언이었지. 처음부터 때려 부수는 작전이었지. 늙은 호랑이 잡는 데는 그게 최고지. 나는 강펀치를 휘두르며 놈을 무자비하게 다루었어. 두 번이나 다운을 빼앗고 중반전으로 넘어섰어. 놈도 끈질기게 덤벼들었어. 결국 7회에 카운터블로를 얻어맞은 놈은 링에 길게 드러누워 버렸고, 끝내 들것에 실려 나가더군. 나중에 알았지만, 그 친구 뇌출혈로 사망했더군. 그 이후로는 이상하게 링에 올라가는 것이 두렵더라고. 이상하게 몸도 무겁고 갈수록 의욕이 줄어드는 거야. 내가 사람을 죽였다는 끔찍한 현실에 맞닥뜨리자 도저히 운동을 계속 할 수 없었어. 그 뒤로 동양타이틀전을 반납하고 먹고 살기 위해 막노동판과 술집 웨이터를 전전했지."
사내는 다시 오프너로 새 맥주병을 따서 벌컥벌컥 맥주를 마셔대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갈증에 시달려 온 마라토너처럼 그는 허겁지겁 맥주를 들이켰다. 나는 조금 전의 포장마차에서와는 달리 술은 입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술집이라는 곳이 온갖 더럽고 추악한 것들이 마구 뒤섞여 있는 곳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더군. 하룻밤에도 몇 번씩 옷을 벗어던지는 아가씨들과 그런 아가씨들과 그런 아가씨들의 돈을 착취하는 업주나 기둥서방, 또 그런 업주나 기둥서방의 등을 처먹는 건달들까지. 그런 것을 볼 때마다 문득문득 살의가 솟구치는 거야. 이미 한 명 죽였는데 두 명 세 명인들 어떠랴 싶더군. 그런 놈들은 이 사회의 쓰레기 같은 놈들이야!"
갑자기 흥분이 되었던지, 사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때 내실로 통하는 문이 삐죽이 열리더니, 세영이 놀란 토끼 같은 얼굴을 쏙 내밀었다. 세영은 우리 쪽을 한동안 쳐다보더니, 아무 일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도로 문을 닫았다.
"단지 그게 당신이 내 형을 죽이려고 했던 이윤가?"
나도 덩달아 목청이 높아지며 대들 듯이 사내를 노려보았다.
"자네도 성미가 급하군.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만 참으라고."
그렇게 말한 사내는 다시 맥주병을 거꾸로 세우고 입속으로 맥주를 부어넣기 시작했다. 병을 입에서 떼며 꺼억 트림을 내뱉은 사내는 맥주병을 탁 소리가 나게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 바람에 술병 밑바닥이 깨지며 유리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때 다시 내실로 통하는 문이 열리더니 세영이 살금살금 걸어 들어왔다. 나는 세영을 제지하지 않았다. 사내도 세영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세영은 빗자루를 가져와 깨진 병조각들을 쓸어 모으기 시작했다.
"꼭 죽이고 싶은 놈이 하나 있었지. 독사라고 불리는 놈이었어. 돈도 안 내고 술을 처먹고 툭하면 아가씨들을 때리고 돈을 빼앗고 심지어 손님들에게까지 행패를 일삼는 인간말종이었지. 수시로 놈을 죽일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좀처럼 기회가 주어지지 않더군. 그런데 그 기회라는 것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치게 되더라고. 그날은 영업을 끝내고 아가씨들도 외박을 나가거나 다 퇴근해서 혼자서 홀을 청소하던 중이었어. 청소가 거의 다 끝나 가는데, 독사라는 놈이 술이 잔뜩 취해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내 멱살을 잡아끌지 않겠어? 그래서 질질 끌려가보니 승용차가 한 대 서 있더라고. 무조건 차를 운전하라더군. 시키는 대로 차를 몰았지. 행선지도 가르쳐 주지 않고 그냥 계속 가라는 거야. 그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어. 하지만 뒷좌석에 앉은 녀석이 자꾸 구둣발로 내 뒤통수를 걷어차는 거야. 그렇지 않아도 놈을 노리고 있던 참이었는데 이 기회에 놈을 해치우기로 결심했지. 차를 세우고 취한 녀석을 차 밖으로 끄집어내서 마구 때렸지. 분이 풀리도록 놈을 때리고 나서 놈의 늘어진 몸을 운전석에 태우고 차를 벼랑 아래로 밀어버렸지. 그런 다음 미친 듯이 가게로 되돌아와 태연하게 청소를 끝내고 소파에 누워 잠을 청했지. 별일 없더군. 한 번인가 형사가 찾아온 뒤로는 끝이야. 그래서 그런 놈들 하나쯤 죽여 없애는 게 아주 간단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지. 경찰에서도 대강대강 넘겨버리고 말더군. 그때부터 나는 술집을 전전하며 그런 놈들을 하나씩 죽여 없애기 시작했지. 이제 그런 놈들 숨통 하나 끊어놓기는 식은 죽 먹기야."
사내는 히죽 웃기까지 했다. 세영은 흩어진 유리파편을 쓸어 모으며 사내의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다. 사내는 상관없다는 듯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던 중에 여자를 하나 만났지. 식당의 주방에서 일하는 여자였는데, 애 하나가 딸린 과부였어. 물론 나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그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어. 그 여자를 만나고부터나서는 살인을 그만 두었어. 직장도 건전한 곳으로 옮기고... 나는 그만큼 그 여자에게 푹 빠져있었던 거지. 가정이라는 것, 가족이라는 것의 포근함을 알게 된 거지. 밤늦게 경비를 서고 새벽에 교대하고 돌아올 때까지 여자는 자지 않고 나를 기다려 주었지. 정말 꿈만 같았지.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해바라기인지 하는 곳에 발을 들여놓더니 가정을 등한히 하기 시작하더군. 몇 번 호통도 치고 알아듣게 타이르기도 했지만 그때뿐인 거야. 나 몰래 다니는 것 같더군. 그러더니 어느 날 발가벗겨져 목 졸려 죽었다는 거야. 온몸을 담뱃불로 지진 자국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어. 그래서 애를 고아원에 맡기고 내 나름대로 해바라기라는 단체를 파고들었고, 그 해바라기의 교주가 박윤도라는 것을 알게 된 거야. 물론 박윤도가 직접 안 죽였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조사해 보니 박윤도 역시 전에 내가 죽였던 건달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더군."
사내는 이제야 무언지 알겠느냐는 듯이 나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내 또래인 것도 같고 더 나이가 들어 보이기도 하는 사내의 넙데데한 얼굴을 나는 쳐다보고만 있었다.
‘미친놈이군!’
나는 어느새 사내의 말을 모두 믿고 있었다. 아무리 거짓말이라고 내 자신에게 타일러도 사내의 말은 납처럼 무거운 진실로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세영은 청소를 다 끝내고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다.
사내의 말에 의하면 강 형사가 말한 해바라기 모임에서 죽은 여자가 바로 이 사내의 동거녀인 셈이었다.
"당신이 지금까지 지껄인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잘 모르겠지만, 당신은 미친놈이야. 어떻게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고 그 응징의 방법으로 살인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점에서 보면 당신 역시 당신이 죽인 놈들과 하등 다를 게 없군."
나는 옆에 놓인 검을 집어 들어 사내의 머리를 정면으로 겨누며 일어섰다. 사내는 의자가 지익 소리가 나게 끌리도록 앉은 채 뒤로 움찔 물러났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놀란 모양이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자기가 아무리 죄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사람을 죽일 권리는 없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
나는 칼을 사내로부터 거두며 단호하게 덧붙였다.
"자네 말도 옳아. 내가 미쳤다고 했지? 맞아. 나는 미친놈인지도 몰라. 하지만 요즘 세상에 조금이라도 미치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누구라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정도 미쳐있는 거야. 어떻게 이런 미친 세상을 조금도 미치지 않고 살 수 있겠어?"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쪽에 앉아 있던 세영이도 놀랐던지 덩달아 일어서고 말았다. 사내는 그대로 뒤로 돌아보지 않고 가게 문을 연 뒤, 셔터를 올리고 나가버렸다. 열린 문과 셔터를 통해 매서운 바람이 불어 닥쳤다. 나는 갑자기 오한이 들어 몸을 부르르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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