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파랑새 8

in kr •  6 years ago 

미림의 전화를 받은 것은 낮 12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거실에 달린 괘종시계의 뻐꾸기가 열두 번을 미친 듯이 울어대는 바람에 숙취로 인해 찌근거리던 두통이 심해져 얼굴을 베개에 묻고 끙끙 앓고 있었다. 그나마 두통이 조금 가라앉고 있는 찰나에 전화벨이 울려 통증이 다시 시작되었다.

전화벨마저 내 두통을 아랑곳하지 않고 맹렬하게 울어댔던 것이다.

“여보세요?”

“경민이구나? 나야 미림이. 지금 너네 집 들어가는 사거리 앞 커피숍에 있으니깐 어서 나와.”

“네?”

“호호호. 너, 자고 있었니? 지금 몇 신데 아직까지 자고 있어? 나, 지금 너네집 근처에 있다고. 피닉스라고 커피숍. 사거리에 있는 거 알지? 커피 한잔 마시고 있으니까 빨리 나와.”

“그런데 왜 반말을...”

“내가 반말해서 기분 나빠? 호호호. 그럼 너도 반말해. 지금 뭐하고 있어?”

“그냥 누워 있는데요...”

“‘있는데요.’는 또 뭐야? 그냥 반말하라니까.”

“으... 으응.”

나는 무슨 이런 계집애가 다 있나 싶었다. 딱 한 번 얼굴을 봤는데, 어떻게 우리 집 전화번호까지 알아서 전화를 해 반말로 천연덕스럽게 나오라마라 하는 건지 심사가 뒤틀렸다.

“빨리 씻고 나와.”

미림은 그렇게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한참을 멍하니 누워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씻기 시작했다. 찌증이 나고 속이 부글부글 끓는 한편으로 내 가슴은 이상하게 요동치기 시작했고 나도 모르게 외출을 서두르고 있었다.

게으르기 짝이 없는 내가 생각해도 정말 번개처럼 씻고 옷을 입고 집을 나섰던 것이다. 하지만 내 발걸음은 미림이 기다리고 있는 큰 길 쪽이 아니라, 동네 뒤쪽을 향하고 있었다. 발걸음은 정말 빨랐지만, 나는 동네를 멀리 한 바퀴 돌아서 미림이 기다리고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혼자 있으리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안경잡이가 미림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있었다. 안경잡이는 온몸을 돈으로 처바른 것처럼 부유한 냄새를 잔뜩 뿜어내고 있었다.

“여기야! 어서 와.”

미림이 입구로 들어서는 나를 발견하고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미림은 갓 부화한 한 마리 병아리 같았다.

나는 그 두 사람 앞에 앉았다. 하지만 안경잡이는 내 존재 따윈 전혀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녀석은 나를 아래위로 흘끗 훑어보고는 몸을 거의 미림에게 기대어 미림의 귀에 뭔가를 속삭여댔다.

“잠시만!”

미림은 아주 날렵하게 안경잡이로부터 몸을 빼내서 내 쪽으로 건너와 앉았다. 미림이 너무 갑자기 내 쪽으로 건너와서 앉는 바람에 나는 미처 의자바닥을 짚고 있던 내 손을 빼낼 여유가 없었다. 미림이 자신의 엉덩이로 내 손을 깔고 앉았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감전이 된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미림이 엉덩이로 깔고 앉은 내 손을 빼내야 한다는 마음만 있었지, 나는 온몸이 굳은 채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미림이 자세를 다시 고쳐 앉는 바람에 나는 마법에서 풀려난 것처럼 손을 내 무릎으로 가져올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손등에 닿은 뭉클한 살의 감촉과 내 어깨에 부딪쳤던 팔의 느낌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나는 온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서로 인사해. 저긴 우리학교 선배 이은석. 여긴 내 약혼자 장경민.”

미림이 내 어깨를 한 팔로 휘감으며, 나를 자기 약혼자라고 소개하는 바람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그 와중에도 내 어깨가 너무 좁아 그녀의 한 팔에 다 들어가는 게 아닌가 싶어 몹시 거북하고 부끄러웠다.

“약혼자?”

이은석이라는 안경잡이가 안경을 고쳐 쓰며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나와 미림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슬그머니 팔짱을 끼며 몸을 뒤로 눕혔다.

“경민 씨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가 어릴 적부터 친군데, 우리가 크면 서로 사돈 맺기로 했데. 뭐 해? 안 일어나고. 오늘 경민 씨 아버님께 인사드리기로 했잖아.”

미림이 내 겨드랑이를 잡아 일으키는 바람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낭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은석이라는 녀석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나는 미림에게 끌려나오다시피 바깥으로 나왔다.

“하여튼 밥맛이야.”

미림은 커피숍 앞에 세워진 외제차 앞바퀴를 발로 툭툭 차며 그렇게 말했다.

“저 녀석 찬데, 난 저런 놈들이 정말 싫어. 이렇게 여자나 꾀려고 외제차 몰고 나오는 치들 말이야. 어쨌든 만났으니 네가 안내해봐.”

“뭘?”

“이 누나가 맛있는 거 사줄 테니까, 어디 괜찮은데 있으면 안내하라고. 여긴 너네 동네잖아.”

“글쎄.”

“아유 답답해. 차라리 나를 따라와라.”

미림이 지나가던 택시를 잡더니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얌전한 포로가 되어 그녀를 따라 택시 뒷좌석에 올라탔다. 택시에 타고나서도 미림은 내 손을 잡고 있었다. 그녀가 정말 오랫동안 내 손을 잡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녀가 영원히 내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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