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파랑새 12

in kr •  6 years ago 

그렇게 미림과 미적지근한 연인이 되었고, 그런대로 행복한 듯했다. 그걸로 만족이 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뽀뽀하고 싶다. 미치도록....”

미림이 그렇게 말하며 내 볼을 잡고 입술을 쑥 내밀며 내 입술에 그녀의 입을 붙이고 있으면 나는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았지만, 내 손이 그녀의 등이라도 어루만질 수 있어 좋았다.

가까워지지도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않는 미림과의 관계는 가끔 조바심을 불러일으켰지만, 나는 어느 정도 포기하고 또 어느 정도 만족했던 것 같다.

“내 가슴 한 번 만져볼래?”

술이 불콰하게 취한 미림이 내 손을 그녀의 가슴 속에 넣어줄 때서야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가슴을 만질 수 있었다. 나는 무엇 하나도 내 의지로 그녀를 조종할 수 없었다. 그런 나 자신이 너무 답답했지만, 미림 앞에서만 서면 나는 한없이 작아졌다.

나와 미림의 관계가 답보상태인 것과 반대로 형과 지혜 씨는 파국을 맞이하고 있었다.

어느 날 지혜 씨가 내 방에 뛰어들어 “형한테 여자가 생긴 것 같아요.”라고 우는데, 내 몸의 모든 뼈와 내장들이 온통 아래로 쏟아져 내리는 듯했다.

“지혜 씨! 울지 마요. 제가 형을 만나볼게요.”

그렇게 지혜 씨를 끌어안고 나까지 엉엉 울었다.

서로 부둥켜안고 울다 보니, 너무 어색해져서 지혜 씨는 서둘러 내 방을 나갔고, 그렇게 형을 무서워했던 섬약한 나는 지혜 씨를 위해서 형의 뒤를 밟기로 결심을 했다. 오직 지혜 씨를 위해서.

그때쯤 나는 늘 미림을 집 앞에 바라다 주는 매너 좋은 남자친구가 되어 있었고, 미림이 내 얼굴을 잡고 뽀뽀를 해도, 정작 나는 제대로 미림의 얼굴 한 번 만져보지 못한 못난 꼴로 살고 있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형이 누나의 사무실에서 나오는 걸 보고, 나는 형 뒤를 밟았고, 형이 사무실과 가까운 곳에 있는 큰 한옥에서 나온 여자와 얼싸안고 한바탕 소동을 벌이고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았다. 무뚝뚝하기로 소문난 형이 그 여자한테 너무 다정스럽게 굴어서 ‘이 사람이 내 형이 맞나?’ 싶었고, 갑자기 미림이 보고 싶었다.

그때의 심정으로는 미림을 끌어안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나만 믿어! 내가 비록 너보단 나이가 어리지만, 누구보다 널 행복하게 해줄게.”

하지만 지혜 씨 얘기만 듣고 너무 갑자기 집을 나와서 주머니에 돈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걸어서 미림의 자취방으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그 비를 맞으면서 버스 네 정거장 거리에 있는 미림의 집을 향해 부지런히 달려갔다. 거친 숨을 내쉬며 불이 꺼진 미림의 자취방 창문을 까치발로 서서 겨우 열었는데, 안에 미림은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다시 형이 들어간 한옥으로 달려갔지만 내 정신으로는 그 문을 두드릴 수 없었다. 형이 무서운 게 아니라, 지혜 씨 생각이 났다. 내가 지금 형을 만나면 지혜 씨가 집을 떠나버릴 것도 같아서 차마 벨을 누를 수 없었다.

그렇게 형이 들어간 한옥과 미림의 집을 분주하게 오갔고, 미림이 내가 비를 쫄딱 맞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많이 아파하고 미안해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내 몸을 혹사했다. 안 그래도 아파 눕는 날이 많은 내 여린 몸이 너무 지쳐서 잘못하면 죽을 것 같아서 겁이 나자, 나도 모르게 형이 들어간 한옥의 벨을 누르고 말았다.

그때까지는 정말 멀쩡했는데, 형을 만나면 무서워서 죽을 같았은 생각이 들자, 갑자지 오한이 들었고, 밤새도록 비를 맞아서 그런지 몸살 기운이 시작되면서 난 바닥에 쓰러졌다.

물론 벨을 누르고 난 뒤의 기억은 하나도 안 났는데, 그 와중에도 미림이 무척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미림이 이런 내 모습을 보면, 집에 안 들어와 내가 이런 꼴로 죽어가는 걸 미안해 할 거라고 나름 흡족해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실상 흐려져 가는 내 눈앞에 떠오른 얼굴은 지혜 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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