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파랑새 7

in kr •  6 years ago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원고지의 정사각형 칸은 마치 수영장 밑바닥의 타일처럼 일렁거려서 눈알이 빠질 것처럼 아팠다. 아픈 것은 눈뿐이 아니었다. 지독한 편두통과 울렁거리는 배앓이는 나의 인내심에 종지부를 찍을 작정인 모양이었다.

“너도 내가 우습나?”

아버지는 잔뜩 술에 취한 채, 내 방문을 확 열어젖히셨다. 깜짝 놀랐지만. 아버지의 게게 풀린 눈은 견딜 수 없는 연민을 느끼게 했다.

“너도 내가 우습다 이거지?”

아버지는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상반신을 내 방 안으로 쓰러지듯 들이미셨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들고 있던 볼펜을 손에서 놓친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아버님! 이제 그만 주무셔야죠.”

“아니다. 아니야. 술 가져와라. 한 잔 더 해야겠어.”

“아버님! 제가 한 잔 드릴 테니 어서 방으로 가셔요.”

“정말이냐? 나는 네가 참 좋다. 네가 너무 좋다.”

그렇게 아버지가 어머니와 지혜 씨의 부축을 받아 마당을 가로질러 안방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난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나는 떨어진 볼펜을 찾아 손에 집어 들었다. 손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바르르 떨렸다.

한 번도 나와 맞대면을 하신 적이 없는 아버지였다. 아버지에게 있어 나는 열 손가락 안에서 들지 못하는 존재였고, 아버지의 말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런데 경민이는 요즘 뭐 하나?”

내가 아버지 근처에 있는데도 아버지는 형이나 누나나 어머니에게 나의 근황을 묻곤 하셨다.

“그 놈 뼈라도 좀 고아 먹여라. 돈은 내가 줄게.”

그렇게 아버지께서 나를 은근슬쩍 대화에 끼워주실 때만 난 존재했다.

막상 그런 취급을 받는 나는 그렇게 슬프거나 노엽지가 않았다. 그렇게 아버지가 한 번씩은 거론되는 존재인 것이 과히 달갑지가 않았을 뿐이었다. 나는 그저 내가 오래 살지 못 할 거라고 생각했고, 가족이란 구성원에서 완전히 비껴나 있길 원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집안에 암적인 존재였다.

돌아가신 할머니 말씀에 의하면,

“니 애비가 하루에 100원 벌면, 니가 200원 까묵는기라. 그래서 약값 감당이 안 된기라. 고마 죽는다꼬 안 그랬나... 의사양반도...”

어쨌든 지금의 경숙이 누나말고 내 바로 위에 누나가 하나 있었는데, 그 누나도 폐렴으로 앓다가 태어난 지 6 개월이 못 돼서 죽었다고 한다. 나도 그 누나처럼 죽을 것 같아서 약도 안 쓰고 내버려두었는데 봄이 지나자, 기적처럼 살아났다는 이야기였다.

“경민 씨! 잠깐만 들어갈게요. 밖이 너무 추워요.”

원고지를 앞에 놓고 연민에 빠져 있는데, 지혜 씨가 방밖에서 나를 불렀다. 내가 방문을 열기도 전에 지혜 씨가 스스로 방문을 열고 폴짝폴짝 뛰어들어 내 이불 속으로 쏙 들어왔다. 모든 게 순식간이었다.

“경민 씨는 책을 정말 많이 읽나 봐요? 나도 책 읽는 거 좋아하는데...”

지혜 씨는 이불로 몸을 돌돌 말아 엎드리며 베개 앞에 놓인 책들을 펼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중학생 때부터 난 아버지 심부름으로 아버지 책장에 있는 책을 한 권씩 두 권씩 헌책방에 내다 팔기 시작했고, 헌책방 주인과 본의 아니게 친해지게 되었다. 물론 책을 판 돈은 모두 아버지 술값으로 탕진되었지만, 헌책방 주인과의 친분으로 주인이 급한 일이 있을 때마다 난 그 책방을 대신 봐주게 되었다. 그 대가로 그 헌책방에서 하루 종일 책을 읽을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난 그 속에서 페르시아의 왕자가 될 수 있었고, 위대한 정복자가 될 수 있었다. 창녀도 되고 바람둥이도 되고 거지도 되고 뛰어난 모험가도 될 수 있었다. 그 곰팡내 나는 책 속에서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헌책방을 벗어나는 순간, 난 주머니에 동전 몇 개 - 그나마 아버지가 심부름 값으로 주신 동전 몇 개 -뿐이었고, 그나마도 다 헤진 바지주머니 때문에 그것마저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군데군데 페이지가 찢어지거나 사라져서 도저히 팔 수 없는 책들은 모두 내 차지였던 것이다. 나는 다락방에 올라가 그런 책들에 묻어왔을 벌레들에게 온몸을 물어뜯기고 가려워서 잠을 뒤척이면서도 가져온 책들을 되풀이해서 읽을 수 있었다.

그 시절 내겐 책만이 유일한 기쁨이었고, 어둡고 칙칙했던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나만의 영역을 구축할 수 있는 안전한 도피처였다.

그런 덕분인지 나는 그 당시의 나이로는 접하기 힘든 철학서부터 난잡한 포르노잡지까지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얻을 수 있었고, 지금 이렇게 소설을 쓸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어쩌면 우리 가족에게 견디기 힘든 시절이었겠지만, 책이 있어 나는 그 시절이 그렇게 슬프거나 고통스럽지가 않았다.

그것은 어차피 나란 존재가 우리 가족에게 있어 크나큰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 했고, 그 관심 밖에서 음지에서 홀로 자라는 식물처럼 있는 듯 없는 듯 나는 그렇게 자라왔던 것이다.

사흘이 멀다 하고 앓아눕는 나란 존재는 어쩌면 가족에겐 암적인 존재였을지도 몰랐다. 학교를 가다가도 하늘이 노래져서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쓰디 쓴 노란 물을 게워내고 집으로 되돌아오기 일쑤였고, 등교를 해서도 양호실에 누워 있는 날들이 훨씬 많았다. 체육시간에는 늘 고질병으로 뛸 수 없는 아이들과 함께 운동장 구석에 앉아 있어야 했고, 주번 대신에 교실을 지키는 날이 점점 더 늘어갔다.

“나도 글을 한 번 써 보고 싶어요. 전부터 몇 번 써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되네요. 몇 줄 쓰고 나면 그 다음부터 머릿속에만 빙빙 돌고 안 써지더라고요.”

지혜 씨는 돌아눕더니, 들고 있던 책을 가슴에 안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있고, 지혜 씨는 내 책상 바로 옆에 고치처럼 이불로 몸을 감싸고 얼굴만 내민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형은 오늘도 안 와요?”

형은 이사를 온 뒤에 어머니 신경통을 구실로 지혜 씨를 우리 집에 들어앉히고 종무소식이었다. 지혜 씨는 군소리 없이 집안 살림을 도맡게 되었다.

“형님이 많이 바쁜가 봐요.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 지 알려줘 봐요.”

나는 펼쳐놓은 원고지를 덮고 지혜 씨 쪽으로 돌아앉았다. 지혜 씨도 이불을 둘둘 말고 고개만 빠끔히 내민 채 일어나 앉았다.

왜 이렇게 지혜 씨하고는 스스럼이 없는 것일까? 그녀가 먼저 내게 마음을 열어서 그런 것인가? 미림이 주는 아슬아슬하고 짜릿한 감정이 왜 지혜 씨를 만나면 안개처럼 흩어져 버리는 걸까?

“쓰지 마세요.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에요. 저처럼 아무것도 할 게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거든요.”

“잠깐만요.”

지혜 씨가 갑자기 몸을 일으켜 내 앞으로 다가오는 바람에 나는 숨을 멈추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이 내 얼굴과 닿을 듯이 가까워져 나는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나는 밀랍인형처럼 굳어버렸다.

“경민 씨! 정말 여드름이 많네.”

지혜 씨가 내 얼굴의 여드름을 짜기 시작했을 때, 나는 한없이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깊고 깊은 수렁으로 내가 작은 모래 알갱이가 되어 한없이 빠져드는 것을 느끼며, 나는 미림과는 또 다른 아찔함으로 까무러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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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열심히 쓰시네요.
꾸준함이 빛을 발할 때가 오겠지요.
종종 찾아오겠습니다.
요즘은 소설을 읽는 사람이 많지 않기는 하지만, 언제나 잔잔한 수요는 계속 있겠지요. 다만 알려지지 않았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