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파랑새 6

in kr •  6 years ago 

허탈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니, 오랜만에 형이 와 있었다.

형의 옆에는 청순해 보이는 여자 한 사람이 살포시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주독이 올라 벌겋게 익은 코끝에 술 냄새를 훈장처럼 매단 아버지가 연신 벙싯벙싯 웃으며 앉아 계셨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와는 대조적으로 며느릿감을 요리조리 뜯어보느라 정신이 없으셨다.

형은 간편한 셔츠 차림으로 별 표정 없이 앉아 있었다.

“올 가을쯤에 식을 올리렵니다. 저희가 아버지 어머니 모셔야 할 테니까, 우선 집을 넓은 곳으로 옮기도록 하세요. 돈은 누나와 제가 마련할 테니, 돈 걱정은 하지 마시고요.”

“암, 그려야겠지. 이런 누추한 집에서 어떻게 신혼살림을 하겠냐?”

어머니가 본격적으로 참견을 하고 나섰다.

“이 아가씨 집에서는 얘기가 다 된 거냐?”

“네. 그런 걱정은 마시고, 어머니도 이젠 식당일 그만두세요. 아버지도 술 좀 작작 하시고요.”

“그래야겠는데 그게 쉽지가 않은 걸 어떡해. 술 좀 그만 먹으려고 해도 심심해서 나도 모르게 한 잔 생각이 자꾸 나는 걸...”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런 채신머리없는 모습을 보여서 미안하다는 듯이 얼굴을 한 손으로 쓸어가며 변명이라고 한마디 하셨다. 그럴 때의 아버지 얼굴은 영판 족제비의 낯짝 그대로였다.

“그러니까 뭔가 유익한 소일거리를 찾아보세요. 바둑이라든지 장기라든지, 아니면 낚시나 등산 같은 취미 활동도 좋잖아요.”

“그래 알겠다.”

아버지의 신빙성 없는 대답을 들으며 형과 아가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 형은 내게 눈짓을 주며 말했다.

“같이 나가자. 너한테 할 얘기도 있고…….”

나는 형을 따라 집 근처에 있는 허름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형과 나는 삼겹살을 안주로 해서 소주잔을 마주 잡고 앉았다. 형과 술자리를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형은 형수가 될 아가씨를 내게 소개했다. 아가씨는 조금 전의 얌전하던 모습과는 달리 악수를 청하는 손을 먼저 내게 내밀었다.

“이지혜라고 해요. 경민 씨 소설, 신춘문예 당선작 모음집에서 읽었어요.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눈물까지 찔끔 나오더라고요.”

나는 지혜 씨의 손을 잡고 쑥스럽게 웃었다.

“넌, 사내자식이 왜 그리 수줍음이 많아?”

형이 그런 나를 쳐다보며 싱긋이 웃었다.

나는 아름다운 지혜 씨를 쳐다보며 미림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녀석과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앉아 깔깔 웃고 있는 미림의 모습을.

“글은 잘 되고 있냐? 누나 책 출판하려다가 출판사 사장을 한 사람 알게 되었다. 네 얘기를 했더니, 네가 원한다면 네 글은 무조건 출판해주겠단다.”

형이 내게 그렇게 신경을 써주는 게 오히려 쑥스러웠다. 책과는 본의 아니게 멀어진 형이었다. 그래도 항상 의기소침하던 동생이 글을 쓴다는 게 한없이 미쁘고 대견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출판사에 내 얘기를 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형에 대한 신뢰가 가슴 밑바닥에서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형의 말은 이어졌다.

“그리고 이번 가을에 있을 국회의원 선거와 연말 대통령 선거가 겹쳐 이래저래 바쁘게 생겼어. 게다가 결혼식도 해야 하고……. 그러니까 집안일은 네가 책임지고 맡아야 해. 지금부터는 네가 우리 집의 가장이다, 생각하고 잘 이끌어야 한다. 내일부터 당장 어머니 모시고 나가서 방 네 개정도 되는 집을 한 번 구해 봐. 돈에 연연하지 말고 깨끗한 이층 양옥으로 말이야. 가능한 한 빨리 입주할 수 있는 곳으로 구하고.”

형은 연이어 술잔을 비워내고 있었다.

지혜 씨는 계속 고기를 구워내고, 나는 내 주량에 맞춰 조금씩 마시고 있었다. 그래도 허기진 마음 때문인지, 미림 때문인지, 나는 고기를 계속 집어먹고 있었다. 2인분의 삼겹살이 더 오고 소주가 네 병이나 비워지자, 형의 얼굴도 불콰하게 달아올랐다.

“어쩌면 누나가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게 될지도 모른다.”

형이 무슨 큰 비밀이라도 되는 양,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형은 그렇게 말하고 난 뒤에도 혹시 누가 그 말을 들은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긴장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래서 파랑새 모임이 빨리 활성화되어야 해. 그래야 누나의 입지가 단단해질 테니까. 너도 누나를 돕고, 우리 집안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파랑새 모임에 적극적으로 협조해라. 나는 강수봉 의원 경호하느라 파랑새 모임에 전념할 수가 없는 형편이거든.”

형은 뛰어난 주먹 실력과 담력을 인정받아 강수봉 의원의 경호원으로 채용되었다. 물론 그것도 다 누나의 입김이 작용했겠지만.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나 어머니한테도 비밀이야. 우리끼리만 알고 있는 거야. 며칠 전에 파랑새모임 지도부 회합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의논된 것인데, 누군가가 실력자의 위치에 있어야 우리 모임의 홍보나 활동이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린 거야. 그래서 강수봉 의원과 어떤 의논도 없이 독자적으로 국회의원 후보를 내기로 한 거지. 물론 누나를 후보로 내세우는 데는 만장일치로 합의되었어. 곧, 전국 대학생 파랑새 모임이 결성되면, 근로자 파랑새 모임, 여성 파랑새 모임까지 연이어 결성될 거야. 그렇게 되면 명실상부하게 꽉 짜인 조직이 되는 거지.”

형의 목소리는 그의 체격과 어울리지 않게 작고 속삭이는 음성으로 변해 있었다. 다만 그의 눈만은 매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번뜩이며 사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형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짐에 따라 상대적으로 증폭되는 갈증에 연거푸 소주잔을 입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지도부만 남기고 소위원회는 각자의 모임으로 분리시키기로 했다. 즉, 일종의 점 조직 같은 거지. 위기에 처한 도마뱀이 자신의 꼬리를 자르고 달아나듯, 어떤 사고가 발생하면 그 소위원회 하나만의 희생으로 타격을 축소시키겠다는 의도야. 그래야 지도부가 살아남아 계속 모임을 유지해 나갈 수가 있지. 사랑방 좌담회 형식으로 전환되면 오히려 더 밀접하고 긴밀하게 접촉을 할 수 있고, 그것을 하나로 연결하면 큰 흐름을 이룰 수가 있어. 강물이 모여서 바다가 되는 격이라고 보면 돼.”

지혜 씨는 전혀 무관심하다는 듯 구운 고기가 타지 않게 뒤집느라 여념이 없었고, 형은 먹이를 발견한 굶주린 독수리처럼 눈빛을 날카롭게 빛내며 자기 이야기에 정신없이 빠져들고 있었다.

나는 형이 이야기하는 도중에 힐끔힐끔 지혜 씨의 조각 같이 단아한 얼굴을 바라보며 미림을 생각했다. 내 팔을 끼던 그녀의 말랑말랑하던 팔뚝의 감촉과 그녀의 향기와 목소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가로수 길을 걸어가는 어떤 녀석의 뒷모습이 클로즈업되어, 나는 미칠 것 같은 가슴앓이를 시작하고 있었다.

“누나는 처음부터 반대였어. 아직은 시기상조다. 덜 익은 풋사과를 따서 어떻게 하겠느냐? 다음을 기약하고, 우선은 조직의 활성화에 주력하자. 아직은 우리 모임이 순수성을 간직하도록 하자. 정치와 연계된다면 어딘지 모르게 순수성을 잃게 될지도 모르고, 모임 자체의 주목적에도 어긋난다. 이렇게 지도부를 설득했지. 하지만 지도부의 생각은 전혀 달랐어. 우리의 현실을 한번 보자는 것이었어.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이 벼랑에 선 것 같은 안개정국과 구태의연한 정치적 파행, 경제적인 위기, 전반적으로 침체된 사회 분위기, 연일 계속되는 시위와 집회, 공권력의 남용과 인권유린, 이러한 현실을 무시하고 어떻게 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라고 하겠느냐는 것이었어. 그래서 교양강좌와 정치공세를 병행하자는 쪽으로 지도부의 의견이 수렴되자, 누나도 결국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었지. 어찌 되었던 순수한 청년단체로서의 성격은 최대한 유지하되, 정치적 역량도 함께 키워 가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던 거야.”

형은 말을 마치자, 앞에 놓인 물 컵을 들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형제끼리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 이야기밖에 할 게 없어요?”

지혜 씨가 빙긋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형이 턱으로 흘러내리는 물을 손등으로 쓱 닦으며 한쪽 팔로 지혜 씨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미안. 지혜가 옆에 있었다는 걸 깜빡 잊었군. 하지만 사내들이 만나서 계집애들처럼 호들갑이나 떨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어? 게다가 서로 바빠서 이런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별로 없고……. 그리고 나는 지금 사무실로 들어가야 한다고.”

형이 그 말을 마치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형의 호출기가 맹렬히 울렸다. 형은 허겁지겁 전화를 걸고 오더니,

“긴급호출이야. 경민아! 너, 지혜하고 내 대신 영화나 한 편 봐라. 이 여자, 영화광이거든.”

형은 내게 돈까지 쥐어주며 황급히 식당을 나가버렸고, 나는 조금 난감한 기분이 되어 지혜 씨와 둘이 식당을 나왔다.

“형님을 약 올리는 의미로 우리 오늘 재미있게 놀아요. 영화도 보고, 술도 마시고, 나이트클럽에도 가요.”

지혜 씨가 그렇게 말하며 내 팔을 끌었다. 나는 지금 내 팔을 끄는 것이 지혜 씨가 아니라 미림이었으면 참 좋겠다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그녀를 따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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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도 기대합니다 ㅎ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