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파랑새 9

in kr •  6 years ago 

미림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의외로 금방 무너질 듯한 나무지붕을 힘겹게 이고 있는 허름한 막걸리 집이었다. 단골집이서 그런지 미림은 아주 태연하게 구석진 테이블로 나를 이끌었다.

“오늘은 두부 새로 들어왔어요? 지난번에 두부 떨어져서 가게서 파는 두부 사다 주셨는데 맛이 너무 없더라고요.”

“두부가 한 시간 전에 들어와서 지금도 뜨끈뜨끈해. 두 사람도 그렇게 차게 있지 말고 뜨끈하게 불 좀 지펴봐.”

“저야 지피고 싶은데, 이 친구가 영 미적지근하네요. 호호호. 일단 두부김치하고 막걸리 한 주전자 내주세요.”

아주머니라고 부르기엔 나이가 조금 있어 보이고, 그렇다고 할머니라고 보기엔 조금 아쉬움이 남는 여사장님과 미림은 많이 친한 듯 스스럼없이 농담을 주고받았다.

“너, 술은 좀 하냐? 하긴 작가라면 술이야 기본일 거고...”

미림이 주전자를 들어 내 잔에 막걸리를 따르며 그렇게 물었다. 그녀는 마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주전자를 높이 들어 아주 빠른 속도로 콸콸콸 막걸리를 양은대접에 따랐고, 한 방울도 대접 밖으로 튀어나가지 않을 정도로 술 따르는 솜씨가 능수능란했다.

“사실 술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아. 대학 들어와서 처음 배운 거니까. 뭐 아버지가 대단한 술꾼이니까 그 자식이야 뻔할 뻔자 아니겠어?”

“호호호. 너, 글만 잘 쓰는 줄 알았더니, 말도 곧잘 하는구나.”

미림이 한 손을 입에 척 갖다 붙이며 다소 생뚱맞게 웃었다. 경박하지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높지는 않은 그녀의 웃음은 묘한 끌림이 있었다. 그런 끌림 하나하나가 다 내 것이 되지 못하고 허공으로 흩어져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나는 막걸리 잔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단순히 갈증 때문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막걸리 잔을 비우고 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목이 더 마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주전자를 들어 내 잔에 막걸리를 가득 따르고 숨도 쉬지 않고 다 마셔버렸다. 그래도 갈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취하지도 않았는데 온몸이 나른해져만 갔다.

“너, 나 좋아하니?”

“......”

“나 좋아하냐고 물었어. 지금.”

“......”

미림의 공격이 너무 갑작스러운 것이라서 나는 방어를 태세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갑자기 말문이 막히고 만 것이다. 호기 있게 농담 한 번 붙이고 의기양양하던 차에 정확하게 심장 한가운데에 카운터펀치를 맞고 나는 숨이 턱 막혀버렸다.

“나도 너처럼 좋아하는 사람 앞에 앉아 막걸리 세 잔을 벌컥벌컥 마시고 취해 버린 적이 있었어. 바로 이 자리,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자리였어. 그 사람은 네가 앉은 그 자리에 앉아 있었고. 고작 막걸리 세 잔이었는데 말이야. 형편없이 취해서 그 사람 등에 업혀서 집에 간 적이 있지. 부끄럽고 뿌듯하고 싱숭생숭한 그런 느낌이었는데, 그래도 마냥 좋아서 입이 벌어지더라. 그날부터 목이 마르고 목이 타들어가서 물을 아무리 마셔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처럼 그 사람을 향한 내 마음이 한동안 마르지 않더라.”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내 마음을 들켜버렸다는 낭패감보다는 미림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에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그리고 뒤이어 알 수 없는 분노가 가슴 밑바닥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뭐라고? 도대체 네가 뭔데? 나한테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여?”

나는 결코 이런 식으로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 머리가 생각한 말이 가슴에서 먼저 툭 튀어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일단 한 번 그렇게 말을 내뱉자, 뒤이어 온갖 짜증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집에 있는 사람을 갑자기 불러 약혼자라고 하더니. 이제는 네 남자이야기까지 막 지껄이고, 그리고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단정을 짓고...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미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악에 받쳐서 소리치고 있었다. 원래 내 속에 이렇게 많은 분노가 도사리고 있었는지 놀랐을 정도로 나는 한없이 분개했다.

“기분 나빴니?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그런데 너, 나한테 지나친 거 알아? 지나치게 화를 내고 있어. 뭐가 그렇게 너를 화나게 하는 거니? 원래부터 분노가 많은 아이였니? 아니면 내가 다른 남자 얘기를 해서 화가 난 거니?”

의외로 미림은 침착했다. 내가 분노에 이글거리며 쳐다보고 있는 미림의 눈은 슬픔으로 가득했다.

“지금 이렇게 화를 내는 너를 보면서 얼마 전의 내 모습과 너무 똑같아서 놀라고 있는 중이야. 이 모습이 바로 그때 나의 모습이었구나. 그랬었구나...”

나는 온몸의 힘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아주 작게 쪼그라들면서 자꾸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그런 무기력함에 저항하듯 나는 주전자채로 막걸리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가슴은 터져버릴 것처럼 너무도 슬픈데, 그 슬픔보다 그 어떤 분노보다 허탈함이 앞섰다. 그리고 그 위에 뜻 모를 분노가 더해져 감정의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을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이성을 잃어버렸다.

나는 주전자를 입에 댄 채 터벅터벅 걸어서 막걸리 집을 나왔다. 그렇게 나는 주정뱅이처럼 주전자 주둥이를 물고 한참을 걸었다. 이상하게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저 이제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다. 다시는 미림을 보지 못할 것 같았고, 이제 영원히 누군가를 사랑하지도 못할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는 글도 쓰지 못할 것 같아서 눈물이 났고, 내 눈물이 너무 끈적끈적해서 막걸리가 흘러내리는가 싶어 손으로 눈물을 닦아 눈으로 확인까지 하고, 내 눈물이 너무도 맑아서 더욱 슬퍼졌다.

Authors get paid when people like you upvote their post.
If you enjoyed what you read here, create your account today and start earning FREE STE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