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THE DAY 11

in kr •  6 years ago 

병원휴게실에서 넬사와 설란이 다리를 꼬고 앉아 자동판매기에서 뽑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휴! 이제 좀 살 것 같아. 많이 한가해졌지?”

설란이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로 바꿔 꼬며 넬사에게 물었다.

“응. 뭐 치료를 하는 게 아니라, 결국 시신 수습이었잖아.”

대답하는 넬사의 목소리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소파에 거의 드러눕다시피 앉은 모습이 페르시안 고양이처럼 우아했다. 넬사는 커피가 든 컵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아예 신발까지 벗고 긴 다리를 소파 위에 올렸다. 그녀는 두 주먹으로 자기 종아리를 툭툭 내리쳤다.

“그러게 말이야. 여기가 무슨 장의사도 아니고. 인턴 때도 이렇게 정신없었던 적은 없었어. 응급실과 사체보관실이 모자라 밖에다가 간이텐트까지 칠 정도니...”

때 묻은 간이텐트가 앞뜰을 빽빽이 메우고 있는 창밖을 내다보며 설란이 참새처럼 재잘거렸다.

넬사의 눈길도 설란을 쫓아 창밖에 머물렀다. 어제의 그 정신없는 북새통치고는 밖은 지나치게 평화로웠고 그런 모습이 현실 같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눈에 새 한 마리가 나뭇가지에 포르르 내려와 앉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좀 전에 엄마한테 전화했더니 전 세계가 같은 시간에 동시에 어젯밤과 오늘 새벽에 그 난리들을 쳤다고 하네. 참 이상한 일이야!”

넬사는 아예 머리를 설란의 어깨에 기대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실 너무 피곤해서 설란에게 어깨를 기대자, 벌떼처럼 졸음이 밀려들었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가볍게 하품을 했다.

“이상한 일이지.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줄이야...”

“설란! 뭐라고?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있었다는 거야?”

“아니... 만화나 영화에서 보던 일이 내 눈앞에 펼쳐져서...”

설란은 그렇게 말하며 넬사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빗질을 했다. 길게 웨이브 진 머리카락은 설란의 가는 손가락 사이를 모래알처럼 빠져 달아났다. 머리를 감을 새도 없었을 텐데 넬사의 머리카락은 실크처럼 부드러웠다.

“그런데 너의 마더? 엄마 말이야. 미국 의학협회 부의장이라고 했지? 거기선 뭐래?”

설란은 그렇게 물으며 대화를 다른 곳으로 유도했다.

“엄마 말로는 바이러스냐? 아니냐? 그렇게 끝도 없는 논의를 하면서 아직도 결론을 못 내리고 있다고 하더라. 설란, 네 생각은 어때? 이게 바이러스 때문인 것 같아?”

“음.... 내 생각에는 바이러스는 아닌 거 같아. 일종의 자연현상이 아닐까? 오존층 붕괴로 인한 지구 자체의 환경 변화라든지... 그냥 환경변화라고 하면 너무 싱겁고, 환경이 주는 경고. 환경이 인간에게 주는 마지막 경고 또는 최후의 통첩. 이렇게 생각해봤는데. 넬사, 어때? 그럴 듯 하지 않아?”

“지금 농담할 기분이야? 설란은 너무 시크해!”

“얘는? 넬사는 매사에 너무 진지해. 진지해서 재미없다니까. 한국 속담에 농담 속에 뼈가 있다는 말이 있어. 내 말이 장난처럼 들리겠지만, 그냥 농담이라고 흘려버리기엔 뭔가 걸리는 게 있지 않아? 뭔가 찜찜한 거 말이야. 너도 느끼잖아.”

“그건 그렇지? 내 느낌이지만 뭔가 큰 재앙이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예감이 정말 안 좋아. 이상하게도 살면서 내 예감이 정확히 들어맞을 때가 꽤 많았거든. 이럴 때 아버지가 옆에 계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버지라면 정확한 결론을 내려 주실 텐데.”

“철학자이신 너의 아버지? 예전에 인도에 가셔서 오리무중이시라며?”

“응.”

“그동안 연락이 한 번도 없었던 거야?”

“응.”

넬사의 대답은 계속 심드렁했다.

“뭔 대답이 그러냐?”

“왜?”

“넬사! 네 아버지에 대한 거잖아. 그런데 무슨 대답이 그렇게 성의도 없고, 애정도 없냐는 거냐고?”

“뭐 딱히 대답할 말이 없으니까 그렇지. 인도에 계시다는 전화를 끝으로 그 후로 아버지와의 연락은 쭉 없었으니까.”

“되게 무심하시다. 너의 아버지.”

“그런가?”

“얘 좀 봐! 진짜 남 말 하듯 하네.”

설란이 별스럽다는 표정으로 넬사를 쳐다보았다. 오래 전에 아버지를 여읜 아이처럼 넬사의 대꾸는 너무 천연덕스러웠다.

“나도 그렇고, 엄마도 이제는 아버지에 대해 무덤덤해.”

“아버지 안 보고 싶어?”

“보고 싶기야 하지. 너무 보고 싶어서 아버지가 쓰신 책을 끌어안고 운 적도 많았지. 어릴 때는... 그것보다 난 아버지가 나를 안 보고 싶은가 그게 더 궁금해. 어릴 때 아버지의 사랑을 무척 많이 받고 자랐거든. 그렇게 나를 예뻐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소식을 끊고 생사도 모르고 지내는 게 이해가 안 돼.”

“엄마한테 한 번 물어보지 그랬어. 그래도 너희 엄마는 아버지 소식을 아실 거 아냐?”

“글쎄, 괜히 어머니를 슬프게 할 거 같아서 물어볼 수 없었어. 딱히 어머니도 아시는 것 같지 않았고. 어릴 때부터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고, 나도 어머니도 무척 바빴거든. 방학 때나 특별한 날에 아주 잠깐 엄마 얼굴을 볼 정도였으니까.”

“그랬구나. 너무 안 됐다. 하지만 넬사, 네가 몰라서 그렇지 너의 아버지도 넬사, 네가 보고 싶을 거야.”

“그럴까?”

“당연하지. 이렇게 예쁜 딸을 어떻게 안 보고 싶겠어?”

그렇게 말하며 설란은 넬사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배시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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